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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5;1-15. 감사의 진정한 고백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으로. 2024. 11. 10.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는데,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출입문 중에 양문을 지나가십니다. 양문은 양들이 지나가는 문인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는 제물들이 자나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양문은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 양문 근처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연못의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이 주목받는 사람이 된 곳입니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의 자리로 옮긴 곳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맨 끝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곳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삶의 가장자리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설 수 없는 가장자리가 있고. 타인에 의하여 세워진 삶의 가장자리가 있고 조용한 변방의 가장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알아야 할 것은 항상 삶의 가장자리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습니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사해와 같은 언저리, 가장자리에 위치한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이러한 삶의 가장자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렇고, 모세와 다윗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다 이스라엘의 가장자리인 나사렛과 갈릴리 출신들입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 멸시를 받았지만 사실이고 팩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삶의 가장자리를 좌절과 절망의 자리라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회복과 소망의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심으로 나아 갈 수 있는 자리가 삶의 가장자리입니다. 시작되는 곳은 바로 삶의 가장자리이고, 삶의 낮은 곳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은 어디서 소망을 봅니까? 높은 곳과 정상과 자신의 가능성이고 자신의 능력입니다. 잘남과 능력과 높아짐에서 소망을 보고 소망을 찾습니다. 그래서 미리 판단하고 평가를 하고 구별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낮은 곳에서 소망을 보고, 자신의 부족에서 소망을 찾습니다.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약자와 삶의 고난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감당할 수 없는 시련가운데 있는 분들에 대한 이해를 하시고 공감을 하십니까? 무엇으로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고 동행을 하십니까? 삶의 가장자리를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해가 되고 없음을 체험한 사람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마굿간에 오셨습니까? 삶의 가장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입니다. 왜 눈물을 흘리시고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사랑하지 않고는 울 수 없기 때문이고, 애통하지 않고는 흘릴 수 없는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아픔과 인간의 절망을 헤아린 눈물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부르시는 음성이 들리십니까? 삶의 가장자리에서 부르고,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부르십니다. 우리를 알기 때문에 초청을 하시고 쉼을 주시고, 책임을 지십니다. 어떻게요? 동남풍과 북서풍을 동원해서 환경과 여건의 온도를 높여서 생각지도 않은 자리로 이끄시고, 삶의 가장자리와 없음에서 소망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눈물의 세월이십니까? 삶의 가장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그래서 감사가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베데스다 연못이 주는 의미와 주님의 은혜가 무엇일까요?
2-1.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주변은 인생에서 낙오되고 뒤쳐진, 삶의 가장자리에 내 몰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3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어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절. 거기 38년 된 병자가 있더라.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 앞을 못 보는 소경과 다리는 저는 사람과 혈기 마른 사람들과 불치병이 있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힘을 쓰고 활동하게 만드는 원기가 혈기인데 이것이 말랐습니다. 살아갈 힘이 없고, 무엇인가 새롭게 해볼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조금의 기력도 없습니다. 일어 날 지체가 이런저런 이유로 주저앉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전 출입을 못합니다. 유대사회로부터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인생이 저렇게 되었을까? 따가운 시선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성전을 못 들어가고,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중풍병자는 움직일 수 없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사람입니다. 가장자리의 오랜 세월 때문에 몸과 마음이 병 들었습니다. 의지할 곳과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소망의 빛을 보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입니다. 걸어가고 달려가도 시원치 않을 이 경쟁의 세상에서 절뚝거리며 걷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자리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는 곳에, 아무런 힘과 능력도 없고 소망도 없는 삶의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낮은 곳으로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되는데, 나의 삶은 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탄하고 체념한 자리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못한 어렵고 포기한 사람에게 향합니다. 38년 된 혈기가 마른 중풍병자입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시며 그를 만나십니다. 그 장소가 베데스다입니다. 그런데 베데스다는 벧 이라는 단어와 헤세드 라는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벧은 집입니다. 벧엘하면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헤세드는 은혜입니다. 메구미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곳이 베데스다입니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앞을 못보고 절뚝거리고 혈기가 말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상하고 깨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해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베데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그곳에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조차도 허용이 되지 않는 사람을 예수님이 주목을 했습니다. 그리고 베데스다에서 베데스다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무엇일까요? 헬라어는 알레떼이아. 히브리어는 에모트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과 변하지 않는 그 무엇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예수님이 답이 됩니다만 진리라는 단어의 의미를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보면 좀 더 깊은 뜻을 알게 됩니다. 먼저 진리의 헬라어, 알레떼이아는 참과 진실, 참된 뜻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알지니라는 헬라어는 알레떼이아 기노스코입니다. 참 되고 진실 되고 옳은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는 알레떼이아 엘류떼로 참 진실이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그냥 있으면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인지 아닌지, 맞는지 틀린지, 상고하고 자유케 하시는 주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다른 예수가 있고, 적그리스도도 있고, 다른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님을 분명히 알면 그 진리가 내 자신을 자유케 합니다. 두 번째는 진리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에모트는 알레프+멤+에트 의 세 글자로 이루어 진 합성어 입니다. 에모트는 헬라어 진리의 의미보다 더 깊은 진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모트의 첫 번째 단어, 알레프는 숫소인데, 배우다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를 제물로 바칩니다. 그러니까? 제물로 예배와 감사와 참회와 참됨을 배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을 받드는 사람을 받으시는데 제물로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제물을 드림으로 육신의 생각인 소욕이 빠지고 영으로 살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숫소인 알프레를 배우다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면 숫소를 왜 배우다로 했을까요?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소가 일을 하니까? 짐도 지고 밭도 갈고, 논도 갈아엎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배우는 것은 일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이 내어 주는 것이고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소가 되었나요? 잠만 자고, 게으른 사람이 있습니다. 고집이 센 사람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쇠고집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에게 멍에를 씌우고 때리고 일을 시킵니다. 소는 그냥 두면 일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바로 내가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진리를 배우지 못합니다. 내 고집을 꺾고 수소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의 히브리어 단어 에모트의 담긴 첫 번째 알레프의 의미입니다.
에모트의 합성어 두 번째는 멤인데 물입니다. 여러분, 물은 어떻습니까? 물은 흘러야 합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강물 같이 흘러야 합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소낙비 같이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로 성숙해집니다. 여러분, 물은 고여 있으면 썩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과 말씀이 내 심령 속에 흘러야 진리가 됩니다.
에모트의 합성어 세 번째는 에트인데 목표입니다, 목표는 십자가입니다. 신앙인의 목표는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입니다. 가 죽어야 모두가 삽니다. 성숙하고 똑똑하고 슬기로운 사람을 섬깁니다. 못난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비방하더라도 섬기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참입니다. 진리는 말씀, 예수그리스도, 사랑, 변화되지 않는 것 모두입니다. 하지만 내가 배우지 않고 내가 흐르지 않고 내가 죽지 않고 내가 사는 것이 없으면 진리는 그림의 떡이 됩니다. 여러분, 주님의 모든 것을 배우지 않고, 주님의 심장과 은혜와 사모함이 흐르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로 죽고, 사는 것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배워야 진정한 쉼을 얻습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개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왜 배우라고 할까요? 주님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고 깨달아 성숙해야 내 자신이 자유자가 됩니다. 그러면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저와 여러분을 자유케 합니다. 참으로 진리로 자유하려면 주님의 모든 것을 내가 배우고, 주님의 심장과 은혜와 사모함이 내게 흐르고, 주님의 십자가로 내가 죽고, 내가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삶의 가장자리와 그림의 떡에서 소망의 자리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런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먼저 축원을 드립니다.
2-2. 삶의 가장자리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에 내려놓음이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주목을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이미 형편을 아셨습니다.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사람은 인생 끝 날 때까지 가장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을 했습니다. 회복의 조건이 안 된다고 합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합니다. 삶에 소망을 주실 분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동할 때에 그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천입니다. 온천물이 지하에서 솟아나는 것과 같은 연못입니다. 항상 솟아나는 곳이 아니라, 간간히 솟아나는 연못입니다. 연못이 요동치는 일은 아주 보기 드문 일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물을 생명입니다. 물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수로가 많이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베데스다 연못은 엄청난 곳입니다. 그래서 요동치는 것을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문이 나기를 물이 밑에서 솟아날 때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낫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일한 한 가지 소망은 연못의 물이 동할 때 그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것입니다. 38년 된 중풍병자의 유일한 소망도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전혀 엉뚱한 것을 구합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물이 동할 때에 그곳에 자신을 넣어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은 소망이 아니고, 오히려 절망입니다.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있는지요? 얼마나 많은 절박한 사람들이 있는지요? 모두 똑같은 이유, 똑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경쟁해서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나 38년 된 사람에게 이런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낫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을 이루어달라고 합니다. 그 일에 예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지 않습니까? 신앙을 이와 같이 이해를 하고 해석을 합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합니다. 답은 주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고, 주님이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심은 자신의 뜻과 자신의 바램과 바라는 소망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 38년 된 병자도 이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이것을 내려놓으면 더 이상 소망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물에서 외줄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탈출을 하려면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문제는 올라갈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줄을 놓으면 깊은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붙잡을 힘이 없는데 그것을 놓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한 상황에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힘이 없어서 그 줄을 타고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아래를 보니까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줄을 놓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크게 다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올라가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999년 7월 4일이었습니다. 이날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인데 주일날이었습니다. 윤 원준이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블루밍턴(Bloomington)에 있는 한인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교회로 들어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날아온 총탄에 맞아서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습니다. 벤자민 스미스라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무차별 난사한 총에 맞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 당시 미국의 법무장관을 비롯해서 약 1,500명의 조객들이 윤원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장례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그의 사촌형이었던 박 승호 목사님이 유족들을 대표해서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동생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분명하고도 큰 소리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는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하며, 미국을 용서하겠다는 윤원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내 사촌 동생을 죽인 벤자민 스미스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아울러 내 형제의 꿈을 빼앗아가고 그의 피를 흘리게 한 이 미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벤자민 스미스와 미국을 용서합니다. 조객들은 모두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눈시울을 붉히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가리켜서 사랑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사랑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결코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은 결국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것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 바닥이 생각보다 깊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깊이 떨어져서 죽을 줄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내 자신의 것을 내려놓았을 때와 삶의 가장자리와 없음에서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을 때에 비로소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비웃음과 비관에 맞서 마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자리에서 마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결심을 하게 되고, 용기를 얻고,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더불어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푸는 일입니다. 여러분, 매사에 마음을 모으기만 해서는 안 되는 구나, 풀 때는 풀어야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 꺾일 일들이 숱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으고, 집중하고, 전력을 다 해야 합니다. 하지만 뒤쳐진 사람에게 소망이라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가장자리에서도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렇게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고 진리로 자유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삶의 가장자리에서 유일한 소망은 결국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방식은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8-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께서 38년 된 사람을 회복하는 방식은 세상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바라고 기대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식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입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일어서지 못한 나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빛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는 살리라는 말씀에 살아 난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 답이 있고, 주님께 소망이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알지 못합니다. 언제 깨닫습니까? 삶의 가장자리와 가장 끝에서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저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은 아무것도 없음입니다. 의지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입니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삶의 가장 자리에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무능 때문에 좌절하고 낙심하는. 그래서 더 이상 자신에게 의지할 것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왜 복이 있나요? 이유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가족들이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죽을병이 아니라, 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함이라. 인생의 가장자리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길과 생명과 소망을 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삶의 가장자리에서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10절. 어디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느뇨? 네의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합니다. 소망을 방해하고, 주님의 은혜를 가로막습니다. 그들의 판단과 법으로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스스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가장자리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힘이 드십니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오기가 힘이 드십니까? 자신을 주님의 은혜를 가로막지 마십시오. 15절, 자기를 고치신이는 예수라 하니라.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 못나올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가장자리에서 주님이 주실 소망만을 바라보시고, 자신의 할 수 없음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고 이루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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