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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 통일과업과 신당(新唐) 전쟁준비 신축 10개 성 중 하나인 주장성 (But, 주장성의 명문기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신라의 관직 등 신라 명문기와들이 출토되었다)
주장성(晝長城)? 위에 조선조 때 남한산성 개축하여 사용 증거
신라의 문무대왕이 삼국통일 과업을 방해 공작하는 당에 대항하여 외교전을 펼치면서, 신당(新唐)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쌓은 10개 성 중에 하나가 주장성(晝長城)이다. 고고학적 발굴로 지금의 남한산성보다 폭과 높이가 최소 3배 이상이며, 성문이 노출되지 않는 철옹성으로 전쟁물자 보급기지창으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신라의 동양 최대 건물터와 동양 최대의 대형 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 400년 전 조선의 대표 성곽인줄로만 알았던 남한산성이 문무대왕이 1,300년 전 신당(新唐)전쟁을 준비하면서 쌓은 거대한 산성 건물터와 명문기와 유물 등이 발굴되면서 일부 학자들이 주장성(晝長城)터?로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산성을 조잡한 조선의 행궁복원은 중단하고 청소년과 국민의 호연지기를 키우기 위해 장엄한 신라의 산성을 복원하는 것이 가장 큰 급선무라고 본다.
남한산성 1부 신라 주장성의 존재를 확인하다, 남한산성 발굴 - 길이: 15:26 K-HERITAGE조회수 17,830회
주장성 터에서 발굴된 20Kg의 신라의 기와. (크기와 무게도 대단하지만, 땅 속에 1,000년 간
묻혀 있어도 5ton 트럭이 지나가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강도가 견고하다.)
통일신라 초대형 기와의 비밀 - 길이: 5:43 K-HERITAGE조회수 3,852회
이 기와들은 인위적으로 겹겹이 쌓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관리를 하지 않아 건물이 무너지면서
땅 속에 매몰된 채 천년 동안 묻혀 있게 된 것이다.
주장산성(남한산성)서…기와 한 점당 무게 20㎏
< 1) 기원 후 470년 경 신라 자비마립간 시기에 경북 구미.선산 지역 장정 3,000명을 동원하여 충북 보은 삼년산에 최고 높이 24-25M 삼년 산성을 쌓는다. 신라는 이 성을 통해 한강 유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는다.
이 성은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500년 간 단 한 번도 적군에게 빼앗긴 적이 없는 철옹성이었음을 사서가 전하고 있다.
신라가 삼년산성 축조 후 200년이 경과한 후 대당 전쟁을 치르기 위해 문무대왕이 10개의 주요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10개 산성 중에 하나인 주장성의 규모와 높이가 얼마나 높고 장대한 산성이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이곳 남한 산성 터에 신라인들이 쌓은 건물터가 동아시아에서 최고 큰 건물로 판명이 되었는데, 출토 유적을 통해
주장성의 본래 높이가 족히 25M는 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성의 축조 방법, 두께와 높이, 성문의 위치와 옹성과 치성 등 신라의 축성 기술이 총동원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남한산성은 후대 조선 정부가 신라 산성과 거리가 먼 중국 공자이념을 따르는 빈약한 읍성일 뿐이다.
2) 공맹사상을 추종하는 사대주의 국가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전국에 산성을 허물고 고작 기껏해야 4-7M에 불과한 읍성 위주의 성을 쌓았다.
그리고 왕이 도망갈 수 있는 강화산성과 남한산성 만 기껏 7-8M 정도 높이로 쌓았으니 얼마나 한심한 국가였는지 알 수가 있다. 이는 지방의 성이 높을 경우 반란시에 진압이 어렵다고 노(魯) 왕에게 진언한 공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3) 중국 노(魯)나라의 책사(모사꾼)였던 공자는 왕에게 왕권강화설에 입각하여 15-20M에 이르는 지방 제후의 주요 성들을 7-8M 정도로 낮추어야 그 지역 제후들이 왕에게 반란하지 못한다고 간언한다. 즉 책사이자 모사꾼인 공자는 왕권강화를 위해서 지방의 제후들의 높은 성곽이 필요없으며, 만일 성에 의존하여 반기를 들었을 경우 진압하기 힘들고,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근거지를 처음부터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춘추전국 시절 약육강식의 정세와 주변국과 군웅을 다투는 상황에서 노(魯)나라의 왕은 공자의 왕권 강화설과 중앙집권화 이론과 탁상행정의 발상을 받아들여 지방의 주요 성곽과 국가 방어에 주요한 산성들을 허물고 낮추기 시작한다.
이 때 주변국들이 노나라가 성곽을 7-8M로 낮추는 것을 지켜본 후에 총공세를 취하여 노나라의 성을 탈취하고 오히려 성곽 높이를 20m 이상 재건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이는 노(魯)나라에 엄청난 국가적인 위협을 초래하게 되었다.
노(魯)나라의 왕은 공자에게 책임을 물어 징계를 하였으며, 인의예악만을 논하고 현실을 도외시한 공자와 제자들과 그 식솔들을 일체 노나라에서 살지 못하게 하고 영구히 추방해 버렸다. 그 일로 공자 일행들은 조국(祖國) 노나라로 복귀하지 못하고, 평생 죽을 때까지 주변국을 떠도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4) 공자가 죽은지 1900년이 지난 다음 고려 정권에서 아웃 사이더였던 무능한 유학자 정도전의 말을 들은 이성계 일당이 고려에서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정권을 빼앗은 다음 조선을 개국한다.
이 탐욕과 질투의 화신 친몽파 집안 이성계가 홍건적 도적 두목 출신 주원장에게 고려 왕의 옥쇄를 갖다 바치며 친명 사대 정권을 세우고, 그의 아들 이방원은 정권 장악과 역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해 개국 공신과 심지어 처와 장인의 가족들까지 전부 몰살시켜 버린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공자의 무능한 가르침에 따라 전국의 중요 산성과 성곽마저 허물어 버린다. 더불어 지방의 토호세력과 권문세도가들의 사병과 군사 훈련장을 와해시켜 더 이상 반기를 들 여지와 조직자체를 와해시킨다.
결국 이러한 조선의 정책 기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 식민지로 이어지는 비참한 말로가 예정되어 있었다.
공자가 말한 왕권강화가 결국 문치라는 국정의 틀을 만들었고,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환란을 초래하였고, 구한말에 고종이 자신만 살겠다고 러시아 공사관에 아관파천한다거나, 일본에 조선이라는 나라와 백성을 팔아 먹는 매국노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이 친일파로서 호의호식하였지만, 백성을 만주로 대륙으로 미주로 흩어져 간 파탄의 경지를 초래하였다.
이처럼 조선을 개국한 친몽파들이 시대에 따라 친명파의 옷을 갈아입고 나라를 절단으로 만들었고, 사대주의자 친명파들이 나라와 백성을 팔아 친일파가 되었고, 이 친일파들이 지금 중국몽을 말하며 뻔뻔스럽게 친중파가 되어 나라를 망치고 있다.
5) 조선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방침에 따라 산성의 기능 축소 정책 때문에 결국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은 부산진성과 동래성(보급 기능 수행)이 일본군에 의해 쉽게 공략당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서울 한성까지 점령하는데 불과 20여일 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유림 세력들의 망국적 정책 기조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피해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왕의 직분을 망각하고 혼자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쳐 가니, 도성 안의 백성들이 노비문서가 보관된 관서를 불태워 버렸고, 서이 명나라로 넘어 가려자 재상 류성룡이 극구반대하여 의주에 머물렀다. 이들이 다스린 나라가 얼마나 한심한 나라였는지 역사 속에서 재확인할 수가 있고 그 교훈을 만대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한다.
6) 그런데 현 대한민국에 조선의 당파 노론세력(일제 친일파 세력)의 맥을 잇는 식민사학자들이 여전히 언론, 학계와 정부 기관과 한 통속이 되어 조선의 궁궐을 보수하거나, 되지도 않는 남한산성을 유네스코에 등록해서 조선 왕의 행궁터를 보수하려고 하니 참으로 문민정부, 참여정부를 이은 이 정부의 한심한 군조직을 와해작태가 어두운 달그림자의 문재앙이라고 하겠다.
각설하고 옛 신라의 장대한 주장성, 삼한통일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주장성 복구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청소년들에게 호연지기를 키우고 자긍심을 일으킬 수 있다. 있지도 않은 만리장성을 지금도 인위적으로 확장하여 고구려사를 편입시키려는 짱게이 중국과 80년에 걸쳐 평성궁을 복원하면서 통일 신라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둔갑시키려는 일본을 통해 우리의 역사 몰이해를 자각해야 한다.> --- 편집자 주.
통일신라 건물지 무더기 발견 |
<신라의 통일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문무대왕이 대당전쟁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 일환의 하나로 10개 성을 신축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주장성(晝長城)이었다. 신라 통일과업 완수를 위해 한강 유역을 방어하기 위한 천혜의 요새 구축이 필요하였다. 사료는 조선조가 폐기 처분하여 모두 유실되어 있지만, 언젠가 유적 발굴로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 <신라의 축성기술은 이미 서기470년에 만든 충북보은 삼년산성이 말해주듯 현존하는 최고의 산성으로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보은 삼년산성은 무너져 내린 곳이 다수이지만 잔존 최고 높이 25m 폭 12m 길이 4Km에 이르는 현존하는 한국의 최고의 산성 중에 하나이다.
보은 산성(삼년산성)은 지금부터 1500년 전 추정 최고의 높이 25m, 하단 폭 14m, 상단 폭 8m에 이르는 장엄한 산성으로 신라가 멸망하고 10년 지난 시점 고려 왕건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점령을 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한 난공불락의 산성이다.
삼년 산성은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내외축 석성으로 470년 경 자비 마립간(왕중의 왕) 때 일선군(경북 구미선산) 지역의 장정 3,000명을 동원하여 축성했다고 문헌적 기록이 남아 있고, 그후 소지 마립간 대까지 16년에 걸쳐 보강 축성한 기록이 있다.
보은 삼년산성은 각 성문, 4대 문지는 사용용도에 따라 축성 방식이 신라 만의 과학적인 설계가 적용되었으며, 어떤 적군도 접근이 불가할 정도로 매우 체계적으로 축성되었으며, 토목과 건축학적으로 삼국과 고려, 조선시대를 걸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산성 축조 기술을 보여주는 산성이다.
해발 400m도 되지 않는 곳에 백제와 고구려로 오고 가는 길목에서 방어와 공격 그리고 보급 기지창으로서 주변 산성과 더불어 총괄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던 성이었다.
산세가 높지 않지만 가파른 7부 능선에 성을 쌓는 것은 신라 산성 만의 특징이다. 신라 산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해발 3-400m에 산성축조에 따른 공력이 몇배 절감되고 둘째, 험준한 7부 능선을 끼고 있기 때문에 방어가 쉬우며 세째, 반대로 적의 동태에 대한 감시가 용이하여 공격진 편성과 외부 진격로 확보가 빠르게 전개되는 전형적인 신라산성 축성 방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 충북보은 삼년산성은 신라가 패망후 고려 왕건 재위 10년에 왕건이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공격하였지만 결국 이 성을 점령하지 못할 정도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이와같이 삼년산성은 축조 후, 500년 간 단 한번도 점령 당한적이 없는 철옹성이었으며, 여기에 있던 신라의 화랑과 부흥군들이 강원도 인제를 경유하여 함경도로 들어가서 신라의 통일 강역인 만주의 간도 지역에서 신라군과 신라인 그리고 여진인들이 힘을 합쳐 금나라를 세운 것이다.> --- ]
<주장성(晝長城)은 최고의 산성축성 기술의 총아인 삼년 산성 축성 후 220년이 지난 시점, 대당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만든 성이기에 그 축성 기술은 매우 발달하였을 것이다. 발굴된 동양 최대의 단일 건물터(53.5m×18m)와 벽체의 두께(2m)와 건물을 보호하는 성곽의 위세는 대단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일본의 14세기 전후 오사카성에도 이런 축성 토목기술이 없었으니 삼국 통일을 위한 문무대왕과 신라 축성부대 공병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신라의 주장성은 신라 패망 후 고려를 거치며 훼손되었고, 조선시대에 산성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 축성기술자 양성도 없이 훼손되고 무너진 성터 위에 개략적으로 쌓았다.
왜냐하면 현 남한산성은 외부의 침공에 단순한 도피처로 사용되지만, 쉽게 점령 당하는 조선식 산성이다. 그것은 성곽의 축성 방법과 높이와 옹성과 치성의 유무 그리고 문구조에서 찾아 볼 수 있고, 붓자루에 의지했던 조선 유림들의 무능과 무지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장성(晝長城)의 위치를 그 동안 추정만 하다가 최근 남한산성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주장성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차후에 문무대왕의 삼한통일을 준비한 나머지 9개의 철옹성을 찾아 복원해볼 역사적 의의가 충분하다고 본다.> - 편집자 주 -
남한산성 행궁지의 정문인 한남루 등 통일신라 전 신당전쟁 준비를 서두르던 건물지가 대거 발견하였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은 남한산성 조선 행궁권역 8차 조사를 통해 행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한남루지와 행궁부속건물인 완대정지, 옥천정지를 조사해 조선시대에 구축된 남한산성 행궁지의 전체규모를 밝히려고 하였다.
남한산성 조선 행궁지 조사는 행궁 복원을 위해 1999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모두 8차에 걸쳐 이뤄져 왔다. 그동안 행궁의 상궐지와 하궐지, 좌승당, 재덕당, 좌전, 행각건물지와 담장유구 등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상궐과 좌전, 재덕당 등은 이미 복원이 완료된 상태다. 문화재청은 그간의 조사 성과를 반영, 지난 6월 경기도 기념물인 남한행궁을 사적 제480호로 승격, 지정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조선시대보다 앞선 시기의 유구도 다수 확인됐다. 특히 백제시대의 주거지와 8기의 수혈유구가 확인, 남한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사용됐음이 5차 조사에서 확인됐다. 6차 조사에서는 하궐 동쪽에서 통일신라시대의 대형건물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신라의 산성과 비교하면 조선의 산성은 보잘것 없는 6-7m의 남한산성이다. 그러나 주장성(晝長城)은 높이 25m이상의 웅장한 신라 대석성이다. 이를 복원할 때 자라는 학생들과 청소년들에게 삼한 통일을 위한 조상들의 위업과 웅장한 기상을 드러낼 수 있고, 호연지기를 배울 수 있다.
현재 전국에 산재한 조선 유림의 초라한 읍성과 성들은 교육적인 면에서 배울 것이 전혀 없다. 소중화주의에 빠져 큰 성을 짓지도 못하게 한 사대주의 유교의 나라인 조선의 성이나 조선의 보잘것없는 행궁지 복원 사업은 중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조선 인조 때 청태종에게 반기를 들고 청태종의 즉위식에서 온갖 모욕적인 행동과 외교적 결례를 범하고, 붓으로 대포를 막겠다는 이 무지몽매한 자들이 청의 침략을 자초하였다. 그리고 결국 남한 산성에서 40여일간 저항하다 결국 개처럼 끌려나와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였던 출발점이지 않는가? 그런 조선 산성의 행궁지 복원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본다. > - 편집자 주-
※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시기가 아니라 신당전쟁 대비한 성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주장성 내 이 건물지는 정면칸이 12칸이 넘고 길이가 50m에 달한다. 암키와 하나의 무게가 무려 19㎏에 달하는 등 이제까지 확인된 국내 최대 규모의 건물일 뿐이 아니라 동양에서 가장 큰 기와이다. 남한산성이 신라 문무대왕 12년(672)에 축성된 주장성(晝長城)이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8차에서는 조선시대 행궁관련 유구 확인조사를 우선했다. 하지만 한남루지와 인조대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장방형 연못지, 완대정지와 우물지, 옥천정지 등이 정말 조선시대 것이었는지 신라의 전형적인 산성 방어 시설인 성곽의 집수지 인지 정밀 조사가 필요하며, 신라시대의 것을 조선시대에 수리해서 사용한 것인지도 밝혀야 할 것이다. 토지 박물관 측의 양심적인 발굴을 기대할 수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 역사 조작과 왜곡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조사단은 향후 자문위원회를 개최, 발굴현장을 공개하고 조사된 조선 유구의 보존방향을 논의할 계획이다. 조사를 의뢰한 기전문화재연구원은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복원계획을 수립, 2008년까지 조사된 건물지 복원을 완료할 방침이다.
한편, 조사된 유구 중 한남루(漢南樓)는 1798년(정조22)에 행궁의 정문으로 신축, 1909년 이전에 이미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하지만 프랑스 외교관 프랑뎅이 1890년대에 찍은 사진이 남아있어 원상으로 복원이 가능하다. 17세기에 제작된 ‘남한산성도’에는 표시돼 있으나 한남루 신축과정에서 매립됐던 방지(方池)가 지도의 정확성을 입증하게 됐다.
조사단장인 토지박물관 조유전 관장은 “10여년 간 조사한 남한산성 행궁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와있다. 이번 조사에서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를 찾아낸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남은 기간 동안 통일신라시대의 대형건물지를 집중적으로 조사, 올해 말께 모든 조사를 완료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 수가 없는 엉터리 조작일 뿐이다)
<이와같이 대한민국은 지금도 중국 식민 조선사대주의자들과 친일파를 추종하는 신식민사학자들이 살아 있어 우리의 역사를 숨기고 파괴하고 있다. 신라의 주장성 터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슬그머니 덮으려고 하고 있다.
민족의 기상이 깃든 주장성은 1300년 전, 조선의 망국적인 남한산성보다 900년이나 앞선 장엄한 산성이었다.
일본은 나라시에 있는 13,000년 전의 평성궁을 복원하기 위해 1920년대 부터 90년에 걸쳐서 주춧돌 한 점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곳에서 일본은 자연석 기반석 몇 점을 찾은 다음 폭 20M 길이 60M 건물지가 있었던 것처럼 흙 두덕을 쌓아 거짓으로 복원하기도 하였다.
건물 주춧돌로 보기 힘든 돌 4점을 두고서 마치 건물지가 있는 것처럼 꾸며 놓고, 그리고 출입구에 해당하는 주작문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복원한 것을 직접 답사하여 목격하였다. 일본은 그곳을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중국은 1995년 북경을 방문했을 때 만리장성을 고치고, 늘리고 새로 짓는 것을 목격하였다. 만리장성에 대하여 추후에 논하겠다.>
통일신라 대형건물터 남한산성에서 발굴 |
남한산성에서 통일신라 유물 쏟아졌다
기사입력 2007-11-16 14:22
【서울=뉴시스】
신라 주장성 복원 필요성- 신라의 통일 과업을 위해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큰 건물지가 산성 안에 있을 정도면 신라의 위세가 우리가 아는 것과 달이 얼마나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가 아니라 통일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지은 건물터이지만 아직도 그 용도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계속 연구 발전해야 한다.
제대로 하려면 일본의 나라 평성궁 발굴을 위해 9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겨우 주춧돌 몇점과 기와 조각을 찾기 위해서 그들이 기울인 노력은 바닷가에서 바늘 하나 찾기 할 정도로 집요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것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역사를 왜곡하고 가리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사대주의 학자들과 신식민사학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정치권 뿐 아니라 진보와 보수를 떠나 우리는 주장성의 재발굴을 주장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조선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인조가 결국 당 태종에게 이마를 9번씩이나 땅바닥에 조아리고, 이마에 피가 흘린 상태로 죄상을 고백했던 치욕의 현장은 당연히 보전해야 하지만, 신라의 웅장했던 주장성을 복원해야 한다. - 편집자 주-
남한산성에서 통일신라시대 대형건물지가 대거 발굴됐다.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내 행궁지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중 하궐 앞마당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통일신라의 ‘주장성(晝長城)’관련 대형건물지를 발견했다. 건물지는 국내 산성에서 축조된 최대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길이 64㎝ 내외, 두께 4~5㎝, 무게 19㎏에 달하는 초대형 기와가 지붕에 사용됐다. 건물지 남서쪽에서는 낡은 기와를 교체 수리하기 위해 기와 350여 매를 차곡차곡 정리한 기와저장 시설이 확인됐다. 암키와와 수키와를 구분, 경사면을 따라 쌓아놓았다. 기존의 낡은 기와를 교체하기 위해 한쪽에 기와를 미리 제작, 모아둔 임시저장소로 짐작된다.
대형건물은 남북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방형 건물이다. 사방에 외진주가 있었던 팔작이나 우진각 형태이고, 정면 14칸, 측면 4칸으로 추정되고 있다. 크기는 정면 53.5m, 측면 17.5m로 이제까지 산성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건물지 중 최대다.
건물지 유구 내부는 조선시대에 많이 훼손된 상태다. 하지만 서쪽과 북쪽, 동쪽의 외진주 초석과 주초석, 배수석렬 등이 확인됐다. 벽체는 산자갈과 목탄을 깔고 그 위를 점토로 판축, 쌓아올린 토벽이다. 벽체 안팎에는 할석이나 기와편을 쌓아 마감했다.
발견된 건물지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대형이다. 초석과 기단석이 잘 다듬어져 있으며 두꺼운 벽체와 대형 기와가 얹혀진 것으로 보아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갑진년(甲辰年) 말촌주(末村主)’, ‘임산고자(林山傐子)’, ‘천주(天主)’ 등 각종 신라 명문기와들도 다수 출토됐다.
건물지 서편의 와적상태로 볼 때 건물은 화재로 인해 붕괴됐으며, 목탄시료에 대한 절대연대 측정결과, 서기 600~800년으로 예상하고 있다. 인화문 토기편과 경부파상선문 대호편, 편병편 등의 토기상과 기와제작기법상의 특징으로 볼 때도 건물의 사용 시기는 7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 즉 삼한 통일을 준비하고, 완성하기 위해 신라 문무대왕 12년(672) 이 국가 동원체제에서 신당(新唐) 전쟁을 치르기 위해 축성한 주장성(晝長城) 관련 유구로 추정된다.
토지박물관 조유전 관장은 “10년간 조선시대 행궁지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다가 지난해 7차 조사때 하궐터 하층부에 통일신라시대 기와편이 출토, 이른 시기의 유구가 있을 것이라는 단서를 찾아 금번 조사에 착수했다”며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발굴은 한국고대건축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며 고대사의 미스테리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왼쪽은 신라의 수키와, 오른쪽은 조선의 행궁기와./이승영기자 sylee@newsis.com
이승영기자 sylee@newsis.com
남한산성에는 거대 무기고가 있었다 |
초대형 기와는 통일대업의 초석? |
남한산성에서 1300년 전의 초대형 기와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국내 어디서에서도 보고된 적이 없는 초대형 기와로 한 장의 길이가 무려 63cm, 그 무게만 20kg에 달한다. 통일신라인들은 무슨 이유로 이처럼 크고 무거운 초대형 기와를 만든 것일까. 그리고 이런 초대형 기와를 올린 건물은 대체 어떤 건물일까. 병자호란 당시 최후의 저항선이었던 남한산성. 그러나 이곳은 우리 역사상 항복과 치욕의 현장으로 가장 뼈아픈 현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07년 이 남한산성에서 놀라운 발굴이 있었다. 그것은 1점당 무게가 20㎏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 초대형 기와가 남한산성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것이다. 기와들이 출토된 건물터도 국내 산성에 축조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중 최대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의 비밀, 그것은 한 시기 이곳이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웅변이었다. 발굴된 초대형 기와는 슈퍼 기와 초대형 기와가 발견된 곳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임금이 피신했던 남한산성의 행궁 터 앞마당. 기왓장이 발굴됐다는 것은 그곳에 건물이 있다는 증거. 그런데 이 기왓장은 보통 기왓장과 달리 거대한 기왓장이었다. 전국 어디에서도 발굴된 적이 없는 엄청난 크기의 기왓장이 발굴된 것이다. 수습된 기와는 토지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깨지지 않은 완형으로 발굴돼 보존처리를 마친 초대형 기와만 350여점에 달한다. 한두 개만 발굴됐다면 장식용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350여 점 이상 발굴됐다는 것은 이것이 실제로 사용된 기와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40cm 이상의 기와는 특대형으로 분류하는데, 대부분이 50cm를 훌쩍 넘으며, 길이도 두께도 조선시대 기와의 4 배 이상 크고 두꺼운 만큼 무게도 국내 최고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크기의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는 도대체 어디에 사용하던 것일까. 초대형 기와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해 기와를 복원하여 압력과 인장 실험을 해보았다. 강도는 700kg(이상) 보다 더 크게 조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70kg의 성인 8명이 올라가도 끄떡없을 뿐만 아니라 격파시범단의 격파에도 전혀 깨지지 않았으며, 2000cc 중형차가 그 위를 지나가도 버텨냈다. 심지어 5ton 트럭이 지나가도 견디어 내었다. 남한산성의 슈퍼기와는 크기도 초대형이었지만 강도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1300년 전 신라인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이처럼 크고 무거운 초대형 기와를 만든 것일까? 초대형 기와 건물의 존재는 ‘판축형 벽체’ 초대형 기왓장이 발굴된 남한산성 행궁지에서는 건물지도 함께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행궁 앞에는 대형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초석의 위치를 조사하면 건물의 크기와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것. 남한산성 건물지의 경우 초석 사이의 간격과 사라진 초석을 고려해보면 남북의 길이 53.5m, 측면이 18m나 되는 초대형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 방식으로 보면 정면 16칸, 측면 6칸의 건물이었다. 이 정도 크기의 건물이라면 당대로서는 동양 최대의 크기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렇다면 과연 초대형 기와의 무게를 지탱할만한 건물이 존재했을까? 건물 내부의 초석을 따라 조성해 놓은 흙벽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2m에 이르는 두꺼운 흙벽체는 단순한 흙벽체이 아니라 기초바닥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해충을 방지하는 목탄을 올린 다음, 소금과 흙을 다져 층층이 쌓아올린 판축공법으로 만든 벽체이다. 1500여 년 풍납토성이 거뜬할 수 있었던 공법으로 그것이 바로 판축공법이다. 판축형 벽체는 상부로부터 내려오는 하중을 안전하게 지반으로 전달 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초대형 기와지붕의 엄청난 무게를 지탱할 수 있었다. 출토된 ‘천주(天主)’의 비밀 2미터 두께의 벽체와 승용차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강도를 지닌 초대형 기와를 덮은 초대형 건물, 도대체 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왜 통일신라인들은 남한산성에 이토록 엄청난 건축물을 지어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발굴된 350여 개의 기와 중에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있다. 발굴한 명문 기와는 10여 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명문이 ‘말촌주’다. 그리고 천주(天主)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 가 나왔는데 역사학자들은 그 동안 국내에서 발굴된 적이 없는 ‘천주(천주)’라는 글자가 새겨진 두 개의 명문기와에 주목했다. ‘천주’라는 용어는 마테오리치가 ‘천주실의’ 집필한 이후부터 동양에서 가톨릭의 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뿌리 내렸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가톨릭이 들어왔던 것인지에 대해 고고학계의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이 엄청난 규모의 건물은 종교시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박물관의 불국사 터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의 유물 중에 돌십자가와 아기를 안고 마리아 상처럼 보이는 유물도 있다. 당시 중국 당나라의 경우에는 기독교가 ‘경교’라는 이름으로 이미 들어와 있었다. 서안의 비림의 한 비석 이름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당나라 때 경교(景敎)라는 명칭으로 유행하게 된 사연을 적은 비석이다. 시리아 문자와 한자로 된 비문에는 7세기 당 태종 때 서역에서 들어온 종교가 중국에 뿌리내렸다고 새겨 있고, 경교의 선교사가 일본의 왕을 알현했다는 기록이 일본 기록에 남아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는 당연히 경교 선교사들이 다녀갔을 것이고, 또한 신라에 서역인들과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 공주와 결혼하였고, 여기에서 태어난 왕자가 페르시아 사샨 왕조의 왕국을 되찾게 되었다는 페르시아 판 대서사시가 이란 박물관과 대영제국 박물관에 그 기록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장안 광주 서주 등지에 경교 사찰도 창간되었다. 이런 중국의 기독교가 신라에 유입됐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경교 경전을 살펴보면 천주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교 경전이 아니라 당시 일상적인 절대신 천주는 중국측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경교 경전에서 신을 가리키는 용어는 일신, 미사가, 세존 등 이었다. 16세기 마테오리치가 북경에 건너와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쓴 <천주실의>를 정할 때 이미 기존에 천주라는 단어가 있었음을 마테오 리치 신부를 도왔던 명청기의 학자들이 이 천주라는 단어를 제시했을 것이고, 마태오 릿치도 이 ‘천주’라는 기존의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때부터 ‘천주’가 가톨릭의 하느님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따라서 신라시대의 ‘천주’는 종교적 용어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 단어에 대한 문헌과 서지학자 등이 총동원되어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굳이 추측하자면 우리가 하늘의 주인이라는 신라인들의 자신감의 표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지만 당시의 하늘의 주재자이신 절대자를 표현하는데 신라인들이 쉽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대형 기와는 ‘주장성의 무기고’의 지붕? 남한산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병자호란 12년 전인 인조시대. 그런데 성곽복원공사를 위한 발굴조사에서 입수시설의 지하 4m 위치에서 또 다른 석성의 흔적이 발견됐다. 남한산성은 안팎을 모두 돌로 쌓아 올린 전형적인 7세기 신라 성벽이었다. 이는 남한산성이 신라시대의 통일을 준비하던 성곽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석성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다. 또, 건물지에서 <마산정>이라는 명문기와가 발굴되었다. ‘마산정’의 정(停)은 신라의 군사조직을 가리키는 용어로 당시 신라의 핵심군사조직은 중앙의 ‘구서당’과 지방군에 해당하는 열 개의 ‘정’이었다. 하지만 마산정은 역사서의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 건물의 용도는 바로 무기고였다고 주장한다. 초대형 기와 건물은 견고한 구조로 적이 지붕을 뚫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고, 신라의 중요한 지방 군사조직을 가리키는 ‘정’이 들어간 명문기와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주장성의 핵심시설인 무기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접근전이 벌어지면 무기고는 적의 가장 중요한 공격 목표가 된다. 이 때문에 가장 튼튼한 무기고가 필요했던 것. 실제로 중국 시안에서 발굴된 고대 무기고 역시 남한산성의 초대형 기와 건물과 동일한 구조였다. 견고한 벽체, 기둥 사이에 복도식 화랑을 설치한 구조로 남한산성 초대형 기와 건물과 동일한 구조였다. 초대형 기와 2만여 장, 두께 2미터의 판축형 공법으로 쌓은 벽체를 가졌던 길이 50여 미터의 초대형 건물, 해발 500미터, 성 한가운데 자리 잡았던 이 대형 건물은 바로 신라 주장성의 난공불락의 무기고였던 것이다. 왜 초대형 무기고가 필요했을까 남한산성에 거대 무기고를 짓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입했을 것이다. 신라왕성 경주를 지키는 시설도 아닌 주장성에 왜 이토록 견고한 무기고가 필요했는지 관심이 집중된다. 거대 무기고가 구축된 시기에 주목해보자. 무기고 바닥에서 출토된 숯덩이, 이를 수습해 탄소연대 측정을 실시했다. 탄소연대 측정은 방사선 동위원소를 이용해 유물이나 유적지의 조성 연대를 알아내는 방식, 결과는 신뢰도 95.4% 수준에서 660년~880년 사이로 나왔다. 기록에 따르면 문무왕이 지금의 남한산성 자리에 주장성을 쌓은 것은 672년, 이 시기 문무대왕은 둘레 8km에 이르는 주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거대 무기고도 이 무렵 구축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주장성을 쌓은 672년은 이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최전방도 아닌 한강 유역인 이곳에 성을 쌓고 거대 무기고를 설치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는 경주에서 풀 수 있다. 경주 낭산 기슭의 사천왕사, 지금은 터만 남은 사천왕사는 7세기 중후반 다급했던 신라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그런데 사천왕사 건립 연대도 믿을 수가 없기에 연대 기록을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다.- 편집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