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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현(전남대 철학과)
- 목 차 -
I. 머리말
II. 복과 행복의 구분의 실마리
III.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1.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한 물음
2. 지속적인 활동성으로서의 행복
3. 행복의 외적 조건과 획득방식
IV. 행복주의 윤리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
V. 맺음말
VI. 참고문헌
I. 머리말
앞에서 우리는 ‘복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라는 주제 하에서 한국인의 삶 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복의 현상과 구조, 그리고 그 기능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복의 본질을 밝혀 보려고 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작업은 크게 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즉 유가철학과 불교철학의 관련 자료를 기초로 한국인의 복에 대한 이해를 정리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그 하나의 논의 축이었으며, 한국인 고유의 민속 현상과 문학작품 속에 널리 나타난 복의 현상과 기능을 정리‧분석하는 일이 그 다른 하나는 논의를 이루었다.
이제 복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라는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서양인들은 행복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이해해 왔는가? 말하자면 서양인의 행복에 대한 이해를 참고해 보려는 문제의식에서 서양인의 행복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방식을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안목에서 정리해 보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점은 한국인의 복에 대한 생각을 서양인의 행복관에 비추어 보는 것이고, 또한 바람직한 행복관에 대한 철학적 제안의 기초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주제는 연구자들이 설정한 전체 연구의 보론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시간과 지면, 그리고 필자의 부족한 역량 등을 인해 다소 임의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서양인의 행복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의 논의의 범위를 불가피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으로 한정시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필자가 서구의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오랫동안 서양의 문화와 정신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고, 또 오늘날도 여전히 서양인이 바람직한 것으로 추구하는 행복에 대한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다는 학문적인 확신에서이다. 달리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은 필자가 보기에 행복에 대한 서양철학의 가장 포괄적인 이해를 드러내 주는 고전적인 견해라는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에서 필자는 먼저 논의를 실마리를 풀기 위해 행복이라는 개념을 사전류의 검토 작업을 통해 간략하게 스케치해 볼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서양 철학사에서 행복론이 처음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드러나 있는 책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중심으로 행복에 대한 이해를 정리하고 해석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윤리학 저서 곳곳에서 행복주의 윤리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칸트의 견해를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II. 복과 행복의 구분의 실마리
일상어에서 행운, 복, 행복이란 말마디들은 우리말에서도 그렇지만, 서구의 언어에서도 아주 자주 그 의미의 구분 선이 분명하지 않은 채로 사용되고 있다. 행운(복)과 행복에 대한 서양어의 개념적 의미를 대비해 풀어보기에 앞서 먼저 이런 말들에 대한 우리말 큰사전과 조선말 대사전의 뜻풀이를 참조해 논의의 실마리로 삼아 보자.
낱말우리말 큰사전조선말 대사전행운좋은 운수 또는 행복스런 운명좋은 운수 또는 행복스런 운수복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한 현상과 거기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①생활에서 누리게 되는 만족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즐거움; ②(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는) 대상으로 하여 만족과 기쁨이 많이 차례지는 것 또는 그 만족과 기쁨; ③해당 대상이나 경우를 많이 가지거나 당하거나 겪게 되는 것; ④미신적 관념에서, 숙명론적으로 받게 되어있다고 하는 행운행복①복된 좋은 운수; ②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①생활에서 충분한 만족을 느끼어 흐뭇이 즐거운 상태; ②좋은 일이 많고 복이 많이 차례져서 부러운 것이 없이 즐거운 상태; ③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에서 사람이 맛보는 크나큰 만족과 기쁨
얼른 보면 여기서 복과 행복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언어사용이 그렇듯이, 남북한의 국어사전에서 모두 상호 호환개념처럼 그 뜻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찬찬히 뜯어보면, 우리말 큰사전이 복과 행복의 의미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정의한 반면에, 조선말 대사전은 한편으로는 복과 행복을 거의 같은 의미로 취급하긴 하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각각 다른 의미, 다른 가치 규정을 통해 정의하고 있다. 말하자면 복이 행운이란 말을 숙명의 의미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면, 행복은 사람의 능동적이고 자립적인 활동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조선말 대사전의 이러한 부분적인 구분 틀은 아래에서 드러나겠지만, 서구의 언어에서의 행운과 행복의 구분에 비추어 매우 흥미로운 대목으로 읽혀진다. 한자 문화권에서 복이라는 말이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온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어 왔는가는 문헌으로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추측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아마 서구와의 접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20세기의 전후로 사용되기 시작한 번역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전적인 정의만을 두고 말하자면, 조선말 대사전은 서구적인 의미의 행복 개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내비쳐 준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서구의 언어에서 행운과 행복의 의미 구분에로 시선을 돌려보자.
서구의 몇몇의 언어에서 행운을 갖는다/복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행운과 행복함이라는 의미에서 행복은 구별되어 왔다. 행복에 해당하는 말은 그리스어 eudaimonia, 라틴어 felicitas/beatitudo, 영어 happiness, 독어 Glück/Glückseligkeit, 불어 bonheuer 등이다. 이에 비해 행운이란 말은 보통 그리스어 eutychia, 라틴어 fortuna, 영어 luck, 독어 Glück, 불어 fortune 등에 해당된다. 독일어 단어 Glück이란 말을 예로 들어보자. 마치 우리에게 복과 행복이 그렇듯이, 독일어 단어 Glück은 자주 복 혹은 행운이라는 의미와 행복이라는 의미로 혼용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 말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즐겁고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숙명 혹은 우연이라는 의미에서 행운을 나타내는데, 이는 그리스어 eutychia에 해당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추모사에 쓰듯이 어떤 사람이 충만한 삶을 살았다거나 잘(성공적으로) 살았다고 이야기 할 때의 행복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리스어의 Eudaimonia에 걸 맞는다. 전자는 우리의 말의 복에 가깝고, 후자는 행복에 근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연 혹은 운명과 결부된 행운을 평가절하하고 배격한 것은 아니지만, 서양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의식적으로 줄곧 행운보다는 행복에 더 많은 가치를 두어 왔고, 또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으로 이해해 왔다.
서양에서 행복은 고대로부터 인생의 최상의 선으로, 곧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궁극목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럼 행복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과 이해는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부나 명예 혹은 권력에서 찾으며, 또 어떤 사람은 행복을 건강과 장수에서, 또 혹자는 학문적 탐구와 이론적 관조에서 찾는다. 우리의 경우에 아주 오랫동안 수‧부‧귀‧다남자 등이 복의 상징이 되어온 것처럼, 서구에서도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이 행복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생각이었고, 철학과 무관하게 시대의 변천을 넘어 지속되어 왔다.
물론 행복에 대한 철학의 개념적 이해는 널리 퍼져있는 이러한 일상적인 이해와 분명히 다르다. 철학에서 말하는 행복은 좋은 우연, 곧 행운도 아니고, 욕망 충족의 결과인 한 순간의 편안한 심정의 상태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행복의 개념은 인간의 활동성 자체에서 생겨나 긴 시간 동안 지속되는 어떤 종류의 만족감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최초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점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III.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1.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한 물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 복 있는 삶을 원한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서양문명의 탄생지였던 그리스 사회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으로 이해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NE, 1095a). 그런데 행복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그리스 사람들의 이러한 통속적인 견해와 달리 자기 나름의 철학적인 행복론을 전개하였다. 그의 행복론이 체계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 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인데, 그것은 특히 이 책의 제1권과 제10권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과 안녕을 실천철학의 중요한 연구과제로 삼았는데, 그에 따르면 행복한 삶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동체 속에서의 좋은 삶 혹은 성공적인 삶이다. 달리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공동체 속에서의 삶 전체에 대한 인간 자신의 만족과 연관시켜 파악하였고, 선하고 올바른 삶을 통하여 참된 행복을 얻는다고 보았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행위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목적들 중에서 최고의 선을 바로 행복(eudaemonia)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오늘날도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도 각기 달리 답변되었던 것으로 읽힌다.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모든 선 가운데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 명목상으로는 대체로 누구나 여기에 대해서 같은 답을 내린다. 즉 일반 사람들도 교양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하며, 또 잘 살며 잘 처세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이냐 하는데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같지 않으며, 또 일반 사람들의 설명은 학자들의 설명과 같지 않다. 전자는 그것이 쾌락이나 부나 명예와 같이 뻔하고 명백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 그리고 때로는 같은 사람마저 경우에 다라 그것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본다. 가령, 병들었을 때는 건강을 행복이라고 보고 가난한 때에는 부를 행복이라고 본다”. (NE, 제1권 제4장)
위 인용문이 잘 드러내고 있듯이, 배운 사람이건 배우지 않은 사람이건 행복이 인생의 최고의 선이라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답은 사람에 따라, 또 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쾌락, 부, 명예, 권력, 건강 등등 분명하고 뻔한 것을 행복이라 여기지만, 이처럼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행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떤 때는 건강이 행복이었다가, 또 어떤 때는 부유함이 행복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구체적인 무엇이 행복이라는 답변은 곧바로 반박될 소지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쾌락, 명예, 부 등이라고 여기는 대중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세 가지 삶의 형식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 편에서 유래한 것인데, 쾌락적인 삶, 정치적인 삶, 관조적인 삶이다. 대중들은 동물적인 본성에 합당한 쾌락적인 삶을 택하고, 교양 있고 능동적인 사람들은 명예를 행복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삶의 목적이다. 관조적인 삶은 자족적이며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한다. 아래에서 이야기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인 삶을 최고의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돈버는 생활은 부득이한 측면을 갖지만, 부는 분명히 우리가 찾는 최고의 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유용성의 가치를 가지며,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NE, 제1권 제5장).
2. 지속적인 활동성으로서의 행복
행복을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을 얻거나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로 이해한 당시 대중들의 견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인간 고유의 능력이 탁월하게 발휘되는 활동성으로 이해하였다. 즉, 행복을 어떤 무엇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탁월함(덕)을 통로로 파악한 것이다. 탁월한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며, 선하고 고귀한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에서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자족의 행복을 인지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하기 위해 외적인 여러 가지 선들, 예를 들어 친구, 재물, 좋은 집, 혹은 외모나 건강 등이 필요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탁월함에 따른 정신적 활동’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선(좋음)의 본질 규정을 통해 밝히고 있는데, 그의 논의의 전개를 정리하면 이렇다(NE, 제1권 제7장). 의술이나 병술에 있어서 선이 각각 다르듯이, 선은 각각의 행위나 실천적인 기술에 있어서 다르다. 본래적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이 그것을 위해서 행해지는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예컨데 의학에서 건강이, 건축에서는 집이 본래적인 선인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행위에서 혹은 행위의 결정이나 선택에서 그 목적이 되는 것이 바로 선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은 돈, 명예, 건강, 부, 좋은 외모 등 수 없이 많지만, 이 모든 목적이 궁극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선이 궁극목적이 되는데, 말하자면 언제나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궁극적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행복 이상의 궁극목적이란 있을 수 없고, 또 행복을 수단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행복이 최고선인 이유는 우리가 언제나 행복을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최고선은 궁극적인 선이며, 궁극적인 선은 자족적인 것(自足 autarkeia)이다. 즉 단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다. 자족이란 말 자체가 암시하듯이, 그것은 삶을 바람직하게 만들며, 그리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NE, 1097b). 이러한 의미에서 행복은 자족적인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족은 물론 개인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로 채색된 개념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자족적이라 함은 어떤 한 개인만을 위하여 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부모나 자녀와 아내와 일반적으로 친구들과 동포들을 위해서도 족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정치적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NE, 제1권 제7장)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적‧공동체적인 행복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은 사회적 규정성과 깊은 연관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낸다고 하겠다.
행복은 궁극목적이요, 최고의 선이며, 또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자족적인 것이라는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NE, 1097b). 행복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최고선이라는 점이 분명하다면,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 밝혀야 점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일일 것이다. 행복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선택한 전략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의 본성과 기능에 대한 해명이고 이해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능력과 본질을 해명함으로써 행복의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행복이 인간의 본질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또 인간 본질의 탁월한 실현이 바로 행복임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이 식물처럼 생명의 기능인 영양과 성장을 가진다는 점에서 보면, 생명이 인간 고유의 기능과 본질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감각능력도 마찬가지로 인간만의 특수한 능력이 아니다. 인간이 식물, 동물과 공유하는 부분을 빼고 남는 부분이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고 그 본질이라는 점, 바로 이 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제시한 귀결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적인 정신(영혼)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인 정신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 하나는 이성적인 원리에 순종하는 의미에서의 능력이요, 그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원리를 소유하며 이성적으로 사유한다는 의미에서의 활동이다. 인간 고유의 능력은 한마디로 정신이 이성적 요소에 부합하는 활동성이다. 거문고 타는 사람의 능력은 거문고를 탁월하게 잘 타는 데 있듯이, 탁월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능력의 활동을 통해 행위를 탁월하게 수행한다. 따라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인 행복은 자기 활동의 참된 탁월함이라는 의미에서 정신의 활동성이다(NE, 1098a).
행복은 인간의 탁월함(덕)에 따른 활동성인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 탁월함은 신체의 탁월함이 아니라 정신의 탁월함이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인간에게만 본래적이고 고유한 정신의 활동인 것이다. 정신의 이성적 요소를 이론적인 지성과 실천적 지혜로 구별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함(덕)도 두 종류로 나눈다. 지적인 탁월함과 도덕적인 탁월함이 그것이다. 지혜, 지성, 도덕적 통찰은 지적인 탁월함이요, 관후나 절제는 도덕적인 성품의 탁월함이다. (NE, 제1권 13장)
이상의 논의에서 분명해진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어떤 무엇을 소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활동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부를 소유한 상태도, 권력을 소유한 상태도, 건강한 상태도, 비록 그것들이 행복을 위한 외적인 조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행복은 아니다. 행복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정신의 활동성이라는 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요체이다.
이런 행복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행복해하거나 아니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어떤 목적한 바를 이루면 행복하다고 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한다. 행복이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정말 좋은 것(선)이라면, 그것은 순간적인 만족이나 즐거움도, 또 어떤 외적인 선을 소유한 상태도 아닐 것이다. 행복은 순간이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마 그것을 인생의 궁극목적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전 생애를 통한 것이라는 점을 다음 같이 비유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것은 온 생애를 통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한 마리 제비가 날아온다고 봄이 오는 것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여름이 되는 것도 아니 것처럼, 인간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하루나 짧은 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NE, 제1권 7장)
행복이 한 순간, 하루, 혹은 생의 한 국면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통한 인간 본질을 발현하고 실현하는 지속적인 활동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거시적인 의미에서 행복을 생애 전체를 통한 성공적인 삶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잘라 말해서 “행복은 온전한 덕과 생애 전체를 통하여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NE, 1100a).
그럼 우리는 언제 행복하다고 판단해야 하는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이렇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최후를 보고 나서 비로소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운수의 변화를 주목하게 되면, 우리는 가끔 동일한 사람을 두고 때로는 행복하다 하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전체적인 성공이나 실패는 운수에 달린 것이 아니다. 물론 인간의 삶은 많은 경우에 운수와 같은 우연적인 외적 조건을 강한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그런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우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부차적일 따름이다(NE, 1100b).
비록 여러모로 운이 따르지 않고 오히려 큰 불행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고귀한 성품을 지니 사람은 불행 속에서도 빛을 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운 변화와 불행을 정신의 위대함과 고귀함을 가지고 품위 있게 견디어 낼 것이며, 인간의 능력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지속성이라 할 도덕적인 탁월성(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의 생에 대하여 결정적인 힘을 가진 것이 활동이라고 한다면, 행복한 사람치고 비참하게 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행복한 사람은 가증하고 비열한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선하고 현명한 사람은 인생의 모든 변화를 훌륭하게 겪어나가며 또 언제나 그가 당한 처지를 가장 잘 이용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확실히 미래란 우리에게는 분명치 않은 것인데, 행복은 하나의 목적이요, 모든 점에서 궁극목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그리고 또 앞으로도 갖추게 될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NE, 제1권 제10장)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한 사람은 아주 심오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충족하는 사람이다. 잠깐 동안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통하여 온전한 덕을 따라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자기의 이성에 따라 활동하고, 또 그 이성을 가꾸고 성숙하게 하여 최선의 정신 상태를 가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연이어 다음과 같은 자신의 확신을 덧붙이고 있다. 행복한 사람은 또한 동시에 가능하다면 여러 가지의 외적인 선들도 충분히 가진 사람이 아닐까?(NE, 1101a)
3. 행복의 외적 조건과 획득방식
위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외적인 선들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예컨데 건강, 친구, 재물, 정치적 영향력, 좋은 집안, 좋은 자녀, 미모 등등의 외적인 선이 없으면 행복의 순전한 형태가 흐려지거나 행복에의 도달이 쉽지 않다는 점을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인 선이나 재화의 불가피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행복은 또한 외적인 여러 가지 선들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적당한 수단이 없으면 고귀한 행위를 하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행동에 있어서 우리는 친구나 재물이나 정치적 세력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 그것이 없으면 행복을 흐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행복은 이런 종류의 좋은 조건들을 구비해야만 될 것 같다. 이런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행복을 덕과 동일시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행운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NE, 제1권 제8장)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행복을 위해서는 비단 정신적인 선들뿐만 아니라, 신체적 선(건강, 외모)이나 외적인 선들(재산, 권력 등)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삶이란 원래 이런 여러 가지 외적인 제약조건과 결부된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생각에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획득방식에 대한 물음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학습이나 습관 혹은 훈련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는가, 아니면 행복은 신의 선물 혹은 우연에 의한 것인가? 그의 답변은 분명하다. 신이 준 선물이 있다면, 행복은 바로 신이 내린 최선의 선물이겠지만, 행복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탁월함(덕)의 학습과 훈련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덕에 대한 능력이 아예 없어진 사람을 예외로 한다면, 사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배우고 세심하게 노력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행복은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통해서, 곧 “학습이나 마음씀에 의하여”(NE, 1099b)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고귀한 것을 우연에 의한 것으로 봄은 매우 엉성한 생각이다”(NE, 1099b)고 단언한다. 한마디로 행복이 지속적인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은 또한 행복이 어떤 종류의 유덕한 활동이라는 행복의 정의로부터도 명백하다. 이렇게 보면 외적인 선들은 궁극목적인 행복의 수단이나 조건일 뿐이다.
IV. 행복주의 윤리학에 대한 칸트의 비판
이상의 논의에서 드러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eudaimonia)은 인생의 최고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의 최종적인 척도이며, 도덕적 원칙이다. 말하자면 행복은 삶의 궁극목적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으로 설명된다. 또한 행복은 우리가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해야 할 근거이다. 이처럼 행복을 인간 행위의 최고의 원칙으로 삼는 윤리학을 흔히 행복주의 윤리학이라 부르는데, 그 누구보다도 이러한 행복주의 윤리학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경계한 사람이 칸트일 것이다. 칸트는 행복의 원리를 도덕성의 토대로 삼음으로써 발생할 폐해를 단호하게 경고하면서, 행복이 도덕성의 원천이 될 수 없음을 다음처럼 지적한다.
“자기 행복의 원리는 가장 혐오스런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 원리가 틀렸기 때문만도 아니고 잘사는 것이 언제나 선량한 태도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 경험과 상치되기 때문만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선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다른 문제이고, 또한 그 사람을 영리하고 자신의 이익에 밝게 만드는 것과 그를 덕스럽게 만드는 것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 행복의 원리가 도덕성을 확립하는 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원리가 배척되어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도덕성의 토대를 허물어뜨리고 도덕성의 모든 숭고함을 무화(無化)시키는 그런 동기를 도덕성의 기초에 놓기 때문이다. 그 동기는 덕을 향한 동인(動因)을 악덕을 향한 동인과 같은 줄에 놓고 오로지 계산을 더 잘하는 것만을 가르치며, 둘[=덕과 악덕] 사이의 종류상의 차이를 아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GMS, BA 90)
사실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도덕성의 원천을 행복이나 공동체의 질서, 신의 의지, 혹은 인간의 도덕감 등 여러 가지 심급(Instanz)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심급에 기대어서는 도덕의 객관적 타당성을 근거 지울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 도덕원리의 안전한 토대 닦기를 위해서 칸트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도덕적 행위의 원리와 기준을 정초 함에 있어서 다름 아닌 이성 개념이 최고의 심급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말하자면 도덕의 원리를 ‘순수한 실천 이성의 개념’ 속에서 선험적으로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어떤 법칙이 도덕적인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그것이 구속력의 근거로서 타당하려면, 절대적인 필연성을 수반해야 한다. (‧‧‧) 구속력의 근거는 여기서 인간의 본성이나 아니면 인간이 처한 환경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순수 이성의 개념들 안에서 선험적(a priori)으로 찾아져야 한다. 단순한 경험의 원리들에 바탕을 둔 다른 모든 규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점에서 보아 보편적인 규정조차도 그것이 극히 일부분일지라도, 혹 그 동기에 있어서 경험적인 근거들에 의존하는 한, 그것들은 실천적인 규칙이라 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도덕적 법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GMS BA VIII).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논지가 어느 지점으로 귀결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도덕법칙은 경험 개념이나 원리들이 아닌, 순수한 이성 개념에 선험적(a priori)으로 근거해야 한다. 도덕법칙이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지려면 그것의 근거는 경험적이어서는 안되고, 선험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모든 도덕적인 개념들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이성 안에 자신의 거처(Sitz)와 원천(Ursprung)을 가져야 한다”(GMS BA 34). 말하자면 도덕적 개념들이 이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발견되어야 하고, 또 순전히 이성적인 심사숙고를 바탕으로 근거 지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칸트가 행복이 도덕, 곧 올바른 행위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본 이유는 이렇다. 행복이란 개념은 너무 불명료한 것이며, 또 그 개념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은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개념은 보편타당성을 담보한 도덕성의 기초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의 요구나 가치가 행복에 의존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행복에 촛점을 맞추는 대신에 도덕법이 의지의 유일한 규정 근거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복이 도덕법칙을 부여하는 원칙으로 적합하지 않지 않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도덕의 기준도, 도덕적인 동기도 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적인 의지는 행복의 목적과 욕망과 무관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칸트는 행복론(Glückseligkeitslehre)와 도덕론(Sittenlehre)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설정한 것이다. 한마디로 행복론은 경험적 원리를 그 근간으로 하며, 도덕론은 경험적 원리를 눈곱만큼도 갖지 않는 것이다(KpV, A 165). 물론 행복의 원리를 도덕성의 토대 닦기에서 전적으로 배제하긴 하지만, 그렇지만 칸트는 행복의 추구를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거나, 또 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원리와 정면으로 대립한 것으로 간주한 것은 아니다. 양자를 구별하는 칸트의 진정한 의도는 도덕성이 문제일 경우에도 자기 행복의 원리를 따르는 것을 경계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행복의 원리와 도덕의 원리를 구별된다고 곧바로 양자가 대립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사람들이 행복에의 요구를 포기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지켜야 할 때에는 결코 행복을 고려해서는 안 됨을 말한다”(KpV, A 166).
유한하지만 합리적인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피할 수 없는 욕구능력의 규정근거이다(KpV, A 46). 이 점을 잘 간파한 것으로 보이는 칸트 문제삼는 대목은 행복의 원리에 따라 혹은 자기 이익을 위해 의무가 소홀히 되거나 태만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칸트가 도달한 귀결점은 분명하다. 즉 비록 인간 각자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임은 물론이고, 나아가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인간의 보편적인 관심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보편적인 실천의 도덕법의 근간이 될 수 없다(KpV, A 50). 따라서 칸트의 생각은 인간의 삶은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성을 토대로 중심이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도덕법칙에 따라 행위 한다면, 인간은 행복할 가치를 누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최상선은 행복이 아니라 도덕성으로서의 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덕성은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다. 도덕적 인간은 행복할 가치가 있으나, 실제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결국 행복이 행복할 가치(Glückwürdigkeit)와 필연적으로 비례하는 것이 아니기에, 덕은 최상선을 의미할 뿐 최고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행복은 반드시 덕에 비례한 것은 아니며, 또 도덕성은 행복의 수단이 아니다. 이 점에서 칸트는 인생의 궁극목적을 행복으로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와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칸트에게 행복은 인생의 궁극목적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오히려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의 도덕성의 문제이다.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은 행복할 가치가 있으며, 또한 자신의 행복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고려할 도덕적인 의무를 갖는다.
V. 맺음말
우리는 위에서 서양인들은 전통적으로 행복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 하는 문제의식 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집중적으로 조망해 보고, 그에 대한 칸트가 행한 비판의 관점을 논의해 보았다. 이상의 논의를 다시 한번 정리하여 요약해 보자. 오늘날도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당시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부,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으로 이해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중들의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면서 행복을 인간 고유의 능력이 탁월하게 발휘되는 활동성으로 파악하였다. 즉, 행복을 어떤 추구할 만한 무엇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본 것이 아니라, 탁월함(덕)에 따른 정신의 활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한 자신의 이러한 견해를 선(좋음)의 본질 규정을 통해 밝힌다. 최고선은 궁극적인 선이며, 궁극적인 선은 자족적인 것(自足 autarkeia)인데, 바로 이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행복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과 본성을 해명한다. 인간이 식물, 동물과 공유하는 부분을 빼고 남는 부분이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고 본질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적인 정신이다. 따라서 마치 탁월한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능력의 활동을 통해 행위를 탁월하게 수행하듯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인 행복은 자기 활동의 참된 탁월함이라는 의미에서 정신의 활동성이다. 행복은 인간에게만 본래적이고 고유한 정신의 활동성이라 본 것이다. 말하자면 행복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활동성이라는 점에서 행복은 결국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통한 성공적인 삶이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행복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탁월함(덕)의 학습과 훈련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도덕의 원리로 보았다면, 칸트는 행복의 원리와 도덕의 원리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칸트는 행복이 도덕법칙을 부여하는 원칙으로 적합하지 않지 않다는 점에서 그것은 도덕의 기준도, 도덕적인 동기도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물론 칸트는 행복의 추구를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또 행복과 도덕을 정면으로 대립시킨 것은 아니다. 칸트의 진정한 의도는 행복의 추구로 도덕성이 훼손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며, 그것이 보편적인 실천법칙인 도덕법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과 그에 대한 칸트적 비판점을 검토한 이상의 논의를 통해 필자가 얻은 귀결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성공적으로 잘 살 것인가’라는 행복의 문제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라는 도덕성의 문제 사이의 긴장을 통해 행복과 도덕성의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루지 못한 한국인과 서양인의 행복에 대한 이해를 비교‧검토하는 작업은 필자의 차후의 과제로 미루어 둘 수밖에 없음을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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