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 대구의 순교 터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老萊山,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동), 진보 머루산(영양군 석포면 포산동), 안동 우련밭(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교우촌 등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주로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 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피해 경상도 산간 지역으로 숨어든 초기의 교우들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은거지를 찾던 중에 교우들을 만나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그 안에서 교리를 외워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그러다가 탐욕스런 밀고자 때문에 체포되었고, 신앙을 끝까지 지킨 김종한(안드레아) 등 7명은 대구로 이송되어 형벌을 받은 뒤 관덕정 앞에서 칼날 아래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관덕정'(觀德亭,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245번지) 앞은 본래 무과를 치르던 연병장으로, 아미산에서 내려오는 산자락 끈이 냇물과 맞닿는 곳에 자리잡은 넓은 공터였다. 그 때문에 이 곳은 일찍부터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이 곳과 함께 대구의 형장으로는 장대벌(현 봉덕동)에 있던 군사 훈련장과 날뫼(현 비산동) 등이 있었는데,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은 주로 관덕정 앞이었다고 한다. 관덕정(본래의 이름은 관덕당)은 1749년(영조 25년)에 관찰사 민백상이 세웠다.
1816년 11월 1일 이 곳에서 순교한 7명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관덕정 인근에 정성스럽게 매장되고 무덤마다 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살아남은 교우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그대로 형장에 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듬해 봄에 주민들 몰래 그곳으로 가서 시신들을 찾아다가 더 적당한 곳으로 옮겨 무덤 네 개에 안장하였다. 바로 이때 다음과 같이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교우들은 시신을 옮기는 일을 인근 주민들에게 들킬까봐 걱정을 하였다. 그 때 천주의 특별한 보호로 시체들이 묻혀 있는 읍내 쪽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다. 하늘은 내려앉은 듯하였고,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겨우 일꾼들이 일할 수 있을 만큼만 빛을 발하였다. 최성렬(바르바라)의 시체만 짐승이 파먹은 듯하였으며, 나머지 6구의 시신은 조금도 썩지 않아 숨을 거둔 지 얼마 안되는 것 같이 보였다. 무덤을 파헤쳤을 때 나던 냄새도 땅 밖으로 시신을 끌어내자 이내 없어졌다. 옷가지도 잘 보존되어 있었고, 습기는 차 있지 않았다. 이를 본 모든 교우들은 감탄하였다("한국 천주교회사" 중, 82-83면).
1827년의 정해박해 때 경상도의 교우촌은 다시 한 번 약탈당했다. 이 때 상주 멍애목(문경군 동로면 명전리)과 앵무당(상주군 화부면 평온리) 교우촌에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상주와 안동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도중에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보록(바오로) 등 6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다른 박해 때와는 달리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판결을 받지 못한 채 옥에 갇혀 있다가 바오로의 아들 박사의(안드레아), 김사건(안드레아), 이재행(안드레아) 등 3명만이 기해박해가 진행 중이던 1839년 5월 26일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로부터 27년이 지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경상도 여러 곳에서 또 다른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이들 가운데 우리는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를 당한 성 이윤일(요한) 회장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충청도 홍주 출신의 유명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난 요한은 혼인한 뒤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문경 여우목(문경읍 증평리)으로 옮겨 와 다른 교우들과 함께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던 중 여우목 교우촌에도 박해 소식이 들려오게 되었지만, 요한의 가족은 순교할 원의를 품은 채 오로지 포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866년 10월, 문경 관아에서는 여우목 교우촌의 실상을 알아내고는 포졸들을 보내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포졸들이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요한은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하였고,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문경을 거쳐 상주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던 중에 수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요한의 마음은 오히려 굳어져만 갔으며, 상주 목사는 그를 천주교의 두목으로 지목하여 대구 감영에 보고한 뒤 그곳으로 압송하였다. 이 때 그는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날 것이다.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런 다음 나의 뒤를 따라오너라." 하고 당부하였다.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다시 형벌을 받고 관덕정 형장으로 이송되어 1866년 12월 26일(양력 1867년 1월 21일)에 휘광이의 칼날을 받았다. 이 때 그의 가족들은 우선 급한대로 요한의 시신을 거두어 날뫼(비산동)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훗날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인척이 살고 있던 용인 먹뱅이(용인군 이동면 묵리)의 심방골로 이장되었으며, 1976년에는 다시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먹뱅이 심방골에 있을 당시 인근의 교우들은 그의 무덤을 '거꾸로 된 무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훗날 그 무덤을 찾기 쉽도록 시신을 거꾸로 안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한의 유해는 1984년 시성식이 있은 지 2년 만인 1986년 12월 22일 미리내에서 발굴되어 대구대교구청 옆의 성모당에 안치되었다가 1990년 관덕정 기념관이 완공되면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사목, 2000년 1월호, pp.88-90, 차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