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석상진
사각지대 외
몸에 손이 닿지 않는 곳들이 많다
눈 속에 떨어뜨린 인공눈물 한 방울이 그곳까지 닿는 속도가 아찔할 것이다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불고 수피댄스를 춘다
속이 빈 철봉에 부딪칠까 난 조마조마하고
계절의 긴 의자 옆에서 핑그르르 회전하며 추락하는 것들이 많다
그들에겐 서늘한 중력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닿으려 할 때마다 빨려가고 없는 블랙홀이 곳곳에 도사리고
아직까지 그 반대편 화이트홀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한다고 한다
어느덧 기다림을 추스르는 풍경에 익숙해지고
기우제를 올리기 전 마지막으로 비 온 날을 기억하고
왠지 손의 가장 가까운 곳이 무릎인 듯싶어
무릎은 손이 닿는 곳이기에 손이 쉽게 더 자주 간다
사람들의 가장 시린 곳을 떠올리려 애쓰는 중이다
해가 쨍쨍한 평일 오후의 공원을 걸어 나와
무엇을 사야겠다고 고민할 때는
나도 모르게 길거리 사람들의 그것만을 쳐다보게 된다
문득 잊고 있었다
지갑을 잃어버려서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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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나무
나는 게을러서 지루하다 (그 반대의 순서일까)
다행히 부지런하지 않고도
지루하지 않는 법을 고민 중이다
짧은 혀를 입천장에 대곤 한다
앞니 뒤쪽에는 직립의 공간이 남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몰래, 상상한다)
훨씬 더 많은 동물이
앞발을 쓰지 않고
고개 숙인 채 핥아 먹으며 살고 있단 사실을 흔히 놓친다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시즌2 제1편, 2012)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화면에 등장한다 셜록은 그녀가 벌거벗었기 때문에 그녀의 정체에 대해 그 어떤 단서조차 찾아내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한 사람의 나체를 꽁꽁 숨긴 비밀의 전부라 여긴다, 상상한다)
줄기에 매달린 방울토마토는 쓸데없이 횡설수설하지 않는다
뿌리의 수관이 태양까지 죽 이어져 있다
수직은 무죄다
쉽게 부러진다는 혐의로부터
(우리가 공식을 아무 데나 적용한 탓이다
물풀을 보라)
바람을 등지거나 안고 걷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사냥 당하지 않거나
사냥에 성공하기 위해
바람을 선점해야 한다
초식동물은 무리의 이동을 따라잡지 못하면 죽는다
사자는 가젤보다 빠르지 못하면 죽는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속도가 반드시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
추월하지 않아도
(심지어 절대고독이어도)
인간은 살 수 있다
그러나 거울 속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인간은 죽는다
천천히 죽는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다는 말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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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진 경남 밀양 출생으로 2022년 《사이펀》 신인상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