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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5-24 우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곳 답사
▷답사코스 : 송시열유허비-정읍사-고암서원
▷위치 : 전북 정읍시 수성동 671-2
자유인 조동화의 신조는 삶의 여로에서 이세상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부질없다” 하면서 그냥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은 바람쐐러 정읍을 행차한 김에 쌍화차거리에 들러 쌍화차를 먹은후, 송시열의 유허비를 찾아 보았다.
유허비란 한 인물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우는 비(碑)로,
송시열 유허비가 서 있는 이 터는 우암 송시열선생이 사약을 받고 생을 마친 곳입니다.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이 1689년(숙종 15)에 한양(漢陽)으로 나문(拿問, 죄인을 잡아다가 그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해 조사를 하는 것)을 받기 위해 올라가다가 1689년 6월 8일 새벽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약(死藥)을 받고 83세의 나이로 죽게 되었다.
그 뒤 1695년(숙종 21)에 고암서원을 세웠고, 1731년(영조 7)에는 사약을 받은 이곳에 "송우암수명유허비(宋尤庵受命遺墟痺)"를 세웠다.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년)~1689(숙종 15년)은 어떤사람인가?
-호 : 우암
-시호 : 문정(文正)
-본관 : 은진(恩津)이며 조선 후기 서인(西人)의 영수(우두머리)
-주요저서 : 송자대전(宋子大全 총261권)
-살던곳 : 대전 옥천 괴산
-묘소장소 : 괴산(신도비 설치)
조선시대의 도학가(道學家)요 대 정치가인 송시열 선생은 이 고장에 많은 제자와 일화를 남기신 분이다. 선생은 선조 40년(1607년)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리(忠淸北道 沃川郡 九龍里)에서 송갑조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어머니 곽(郭)씨부인이 밝은 달과 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얻어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나기 전날 밤에는 그의 아버지 송갑조가 마침 종가에 제사를 모시러 청산(靑山)땅에 머물고 있었다. 한밤중에 홀연 공자님이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자기 집에 오는 꿈을 꾸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옥동자를 낳았다는 소식을 받았다 한다.
집에 온 그는「이 아이는 성인이 주신 아들이다.」 「하여 성뢰(聖賚)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덟 살 때부터 친척되는 송이창(宋爾昌)에게 글을 배웠다. 송이창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인데 그때부터 선생은 자기보다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생활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은 22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인조 8년(1630년)에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그는 연산에 은거하는 당대의 거유(巨儒)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사계(沙溪)는 율곡의 으뜸가는 제자로서 예학(禮學)의 일인자이다. 우암은 이로써 율곡의 학통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1년 뒤에는 사계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에게 다시 배워 학문을 대성했다. 이러한 당대 굴지의 학자 부자(父子)에게 정주(程朱)의 학을 배운 우암이 그것을 평생의 귀감으로 삼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인조11년(1633년) 선생은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시험의 문제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라는 철학적 문제였다.
선생은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와 천지근원의 조화를 논한 문답식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 시험관인 대제학 최명길(崔鳴吉)은 무릎을 치며 「일찍이 드물게 보던 선비가 생겼으니 이제 중국의 도학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 」하고 극구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선생의 명성은 사방에 펼치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경릉참봉(敬陵參奉)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떠나 먼 곳에 머물 수 없다고 하여 곧 돌아오고 말았다.
인조13(1635년)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니 봉림은 즉 후일의 효종으로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해서 맺어졌던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매(1636년) 남한산성으로 어가(御駕)를 모시고 갔다가 성이 함락된 후에는 이내 벼슬을 내놓고 향리 회덕으로 돌아왔다.
난리를 겪은 뒤로는 남한산성의 수치를 크게 분통히 여겨 황간땅에 은거했다. 이때의 선생을 묘사한 글 중에「……독서에만 전념하되 끼니가 간데없어도 태연하게 입을 열어 세상일을 말하지 않으며, 혹 종일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곤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어 비분강개한 중에서도 도학을 닦는데 게을리하지 않던 그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이러하기를 십여 수년에 조정에서 지평, 장령 등 대간의 요직으로 소명하였으나 때가 아님을 알고 있는 선생은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학문만을 연마하였다. 이때 인근에서 도학을 닦던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배움을 청하는 무리에게 사양하되,「황간땅에 큰 선생이 있는데도 그대들이 나를 찾아옴은 어인 까닭인가?」라 한 것은 다만 겸사의 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효종이 즉위하자(1649년) 다시 부름을 받아 진선(進善) 집의(執義) 등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책을 건의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그때부터 선생은 효종과 특히 정분이 두터웠다.
효종은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정부의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당시 김자점 일당을 몰아내고 학문과 행실이 맑고 깨끗한 학자들을 불러서 썼다. 조정에 나온 선생은 정치를 바로잡는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왕에게 아뢰었다. 이는 대략 임금의 덕을 함양하고 기강확립을 서둘러 국력을 기른 뒤에 북벌을 도모하자는 내용의 13개 항목이다.
이때 김자점은 파면을 당한 뒤로 불평을 품고 역관 이덕장을 시켜 청나라 조정에 무고를 하였다. 그리고 인조의 능지(陵誌)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아울러 고발하였다. 이 능지는 선생이 지으신 것이었다. 당시는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굴복시킨 때라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던 시대이다.
효종은 선생에게 내리는 교지(敎旨:사령장)에 청의 연호를 쓰지 않았고, 선생도 그와 같이 하였던 것이다. 이는 청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며 오랑캐를 정벌(북벌)하여 병자의 치욕을 씻고자 한 군신간의 맹약이며 주체의식의 발로였다. 이로 인하여 청의 압력이 가하여지자 선생은 자진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향리에 은거한 선생은 윤선거, 이유태, 유계 등 학우들과 서원에 모여 학술을 토론하고 돌아가신 옛 사계선생이 저술한 의례문해(疑禮問解)를 교정하며 혹은 율곡·조헌·사계등 선유들의 연보나 행장을 기술하여 학계의 공적을 추모하였다.
효종 9년(1658년) 다시 부름을 받은 선생은 찬선에서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어느 겨울날 효종은,「이조판서 송시열이 입시할 적에 입은 옥을 보니 너무 얇아서 이 추위에 질병이 생길까 근심되니 털옷 한 벌을 즉시 하사하라.」하였다. 선생은 이 말을 전해 듣고「지금 우리의 처지로서 누더기를 입더라도 참아 가면서 국력을 길러야 할 터이니 실오리 한 파람도 허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사양했지만 왕은,「경은 내가 옷을 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장차 요동평야의 눈보라치는 벌판에서 이 털옷을 입고 같이 달려 보자는 것이요.」라고 하였다 한다.
효종의 특별한 유시에 선생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 뜻깊은 털옷을 받아서 돌아와 깊이 간직해 두고 북벌할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는 북벌과 관계되는 임금과의 일화이지만 선생의 평소 생활은 검소하였다. 비단 의복은 몸에 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요를 깔지 않았다. 문인들이 혹 그 이유를 물으면「집안이 가난하여 우리 부모 내외께서는 요를 깔지 않고 지내셨는데 내가 어찌 요를 깔겠는가?」라고 하여 검소한 선생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일찍이 사계문하에 출입할 때 회덕(지금의 소제동)에서 연산가지 근 백리의 길을 매일같이 책과 도시락을 메고 수학하러 다녔다. 이 때 선생은 흔히 연산 못 미쳐 10리쯤에서 점심밥의 절반을 먹고 나머지는 싸서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가 오는 길에 먹곤 하였다. 선생의 걸음이 어찌나 빨랐던지 사계선생 생신 날 선생을 위하여 만든 수수팥떡을 가지고 연산 선생님댁에 왔을 때까지도 그 떡이 식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본래 말이 적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안부인사가 끝나면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학문적인 문제나 의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도도히 흘러서 그칠 줄을 몰랐다. 그래서 한번은 김익희가,
「말이 너무 적어서 할 말도 다 안 하는 것이 탓할 일인데 그대는 말이 너무 많으니 그것이 결점이다. 우(尤)자를 넣어서 호를 삼으라.」고 하였다. 선생이「좋은 호라면 내가 사양해야겠지만 좋지 못한 호를 어찌 사양하겠는가?」라고 하여 드디어 호를 우암이라 하였다.
선생이 효종의 부름을 받은 때는 50세였다. 이때 그는 평생 배운 바를 국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을 총애하던 효종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예송논쟁으로 시끄러워졌다. 이 예송문제는 처음에는 예설 즉 복제의 시비요, 학설의 시비논쟁인 듯하던 것이 뒤에 우암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그 어느 한 사람의 공과보다도 그 시대가 안고 있었던 정치제도 및 제반제도와 사회, 경제적 모순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겠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주도되었던 것 같이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보인다.
효종 승하후 벼슬을 물러난 선생은 그 뒤 다시 부름을 받아 조정의 중요관직을 거쳐 우상, 좌상에까지 이르렀으나 뜻은 항상 산천에 있었다.
푸른 물은 성낸 듯 말이 없구나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을 살피니
내 세파에 인연함을 싫어하노라
선생은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숙종 15년(1689년) 선생 83세에 왕세자(경종)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으니, 일세를 풍미하던 큰 별이 떨어졌다.
선생의 학문은 대체로 율곡선생의 이론을 계승하였으나 견해를 달리 한 점도 적지 않았다. 선생은 궁극적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사학의종사(宗師)가 되었다.
선생은 28세부터 82세까지 50년간에 걸쳐 소명과 임명을 받은 것이 무려 109회이고 이에 응한 것은 26회밖에 되지 않는다. 또 888책으로 된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삼천번 이상 나오는 것은 선생 한 사람뿐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당시의 큰 사건이든 작은 일이든, 아니면 좋은 일이었든 나쁜 일이었든 간에 선생이 관여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당대에 선생이 차지했던 위치가 중요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행동한 바와 생애 자체가 기복이 심하고 파란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나 뒷날에 선생의 언행을 적어 비평한 많은 글이 그를 찬양하기도 하고 헐뜯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이 너무나 양극을 이루어 선생의 참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1689년(숙종 15) 1월 송시열은 장희빈(張禧嬪)이 낳은 아들의 원자 책봉을 미룰 것을 건의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숙종은 조정의 요직을 남인들로 채우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조정에서 대거 축출하였다. 이것이 두 번째 환국인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이때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를 사사하라는 남인들의 빗발치는 요청으로 1689년6월8일 서울로 압송 되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분명한 퇴진은「대의 성취」와「대의의 지킴」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숙종 20년(1694년)에 신원이 되었고, 문묘를 비롯해 많은 서원에 배향되어 후세 학자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대전시동구 문화관광과 가져옮===
송우암수명유허비 [宋尤庵受命遺墟碑]
1974年9月27日 全羅北道 有形文化財 第50號로 指定된 宋尤庵受命遺墟碑는 全羅北道 井邑市 水城洞 671-2番地(尤庵路 54-1)에 位置해 있다. 長方形 碑座위에 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불 形態의 屋蓋石을 갖추었다. 1731年(英祖 7年)에 建立된 宋尤庵受命遺墟碑에는「尤麓宋先生受命遺墟碑』라는 篆額이 새겨져 있다. 碑文은 陶谷 李宜顯이 글을 짓고 三和府使를 歷任한 李亮臣이 글씨를 썼으며 丹巖 閔鎮遠이 篆書를 썼다.
碑文에 따르면 尤庵 宋時烈은 1689年(肅宗 15年),己巳換局으로 濟州에 流配 가 있던 中肅宗의 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이곳 井邑縣에 到着했을 때 死藥을 받고, 이곳 碑石이 서 있는 자리에서 83歲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宋時烈은 죽은 지 6年 後에 官爵이 回復되고 文正이란 諡號가 내려졌다.
後 井邑縣에는 宋時烈의 院宇가 있는 곳이기도 하며 巨儒의 垂命處를 標示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뒤 1695年(肅宗 21年)에 考巖書院을 세웠고, 1731年(英祖 7年)에 이 地方 선비들이 宋尤庵受命遺墟碑를 세웠다. 現在의 碑閣 建物은 1925年 李東漢 井邑郡守가 새 丹粧을 한 것으로 1973年 金三柱 井邑郡守가 앞면의 토담을 헐고 鐵柵을 둘렀다. 宋尤庵受命遺墟碑의 크기는 높이 170cm, 너비 81cm, 두께 37cm의 規模이다.
송시열 수명유허비 전문 [宋時烈 受命遺墟碑 全文]
尤庵宋先生受命遺墟碑
嗚呼是爲尤庵宋先生受命之地也歲己已羣兇将行大事以先生道徳為世宗師先逞毒手是年二月謫濟州已又交章請拿至是縣而後命至六月八日也鳴呼在昔孔朱之不幸猶脫拎魋嘉之禍今先生不免焉豈斯道之厄有甚於反袂筮遯之世而然歟嗚呼痛先生在途闻坤極之傾痛哭絶食告訣權遂庵尚夏日學问當主朱子事業遵孝廟遺志而忍痛含迫不得已八字傳授勿失可也朱子臨終詔門人一直字吾言亦不外此時先生不食已累日氣漸微愈自整飭屢促宣藥日一息垂絶恐未及受 命前一日白氣經天是夜奎星隕赤光貫屋越六年甲戌 上大悟特復先生爵賜謚文正先生諱時烈字英甫思津人萬暦丁未生孝廟有大志延登儒碩先生首膺旋招契合昭融至 顯宗朝拜左相 肅宗初元以壬人言竄于海及還導禮益至已而世道壊亂百性駢作而先生卒被大禍嗚呼尚忍言是縣有先生院宇以遺躅之在也南之人士謂此舊址亦不可無識遂合謀具石而要宜顯文以叙之識昧文拙不敢曼衍爲說謹記先生臨命時事以奉告後之過此地者縣人李厚真始終先生事甚勤其義可尚記下方俾不至泯滅云
大匡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李宜顯 撰
通訓大前行弘文館修撰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李亮臣書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閔鎮遠 篆
崇禎紀元後百四年辛亥六月八日立
송시열 수명유허비 한글번역해설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 수명(受命) 유허비(遺墟碑)
아, 이곳은 우암 송선생께서 명을 받으신 곳이다. 기사년(숙종 15, 1689년)에 흉악한 무리들이 장차 큰일(기사환국(己巳換局)을 가리킴)을 저지르려고 하였는데, 선생께서 도덕(道德)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먼저 선생에게 독수(毒手)를 뻗쳤다.
이해 2월 선생은 제주(濟州)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저 무리들이 번갈아 소장(疏章)을 올려 나문(拿問: 죄인을 잡아서 심문함)할 것을 청하였다. 선생께서 이 현(縣: 정읍현(井邑縣)을 말함)에 도착했을 때 성상의 명이 이르렀으니, 6월 8일이다. 아, 옛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 같은 성인께서는 소인이 해치려 하였던 화를 면하셨거늘 오늘날 선생께서는 화를 면치 못하셨으니 어찌 사도(斯道: 유학(儒學)을 가리킴)의 곤액(困厄)이 아니겠는가.
풍속이 저급해지고 성인이 숨어 살아야 하는 시대보다 더 못하여서 그런 것인가. 아, 슬프다. 선생께서 올라오실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위태로운 처지를 전해 듣고 통곡하고 식음을 전폐하셨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에게 작별하며 일러 말씀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중시하고 사업은 효종(孝宗)의 유지(遺志)를 준수하라. 고통을 견디며 원통함을 품은 채 절박하여 부득이 여덟 자(學問主朱事業遵孝)를 전해 주니 잃어버리지 말도록 하라. 주자가 임종할 때 문인을 불러 '곧을 직(直)' 자 하나를 말씀하셨으니, 내말도 역시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때 선생께서 식음을 전폐한 지 여러 날이 흐른지라 기력이 점차 쇠잔하였으나 정신은 더욱 또렷하고 맑았다. 여러 차례 사약을 가져올 것을 재촉하며 말하기를, "한번 숨 쉬는 사이에 숨이 떨어져야 하는데 명을 받지 못할까 걱정이다." 하였다. 돌아가시기 전날에 흰색 기운이 하늘을 가로질렀으며 돌아가시던 날 밤에는 규성(奎로)이 떨어지고 붉은색 광선이 지붕에 꽂혔다. 6년 후인 갑술년(숙종 20, 1694년)에 상이 크게 뉘우치고 특별히 명하여 관작을 회복시키고 문정(文
正)이란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휘(諱)는 시열(時烈)이고 자(字)는 영보(英甫)이며 은진(恩津) 사람이다. 만력(萬曆) 정미년(선조 40, 1607년)에 출생했다. 효종이 큰 뜻을 품고 거유(巨儒)를 연이어 등용함에 맨 먼저 선생을 특별히 성대하게 초빙하였으니 임금과 신하의 뜻이 합치하여 정사가 크게 빛났다. 효종이 서거하자 물러났다. 여러 차례 재상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숙종이 즉위하던 해 소인배의 말로 인해 바닷가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와서 예(禮)를 높임이 더욱 지극하였다. 얼마 안 있어 세도(世道)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져 온갖 괴이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더니 선생께서 끝내
큰 화를 당하신 것이다. 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이 현은 선생의 원우(院宇)가 있는 곳이고 마지막 숨을 거두신 곳이다. 남쪽 지방의 인사들이 이곳이 선생께서 명을 받았던 옛터인지라 역시 표지(標識)를 세우지 않을 수가 없다고 여기고 마침내 회합하여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의현(宜顯)에게 비문을 써 달라고 요구해 옴에 이 글을 썼으니, 식견이 어둡고 문장이 졸렬하나 감히 없는 일을 덧붙여서 말을 만들지는 않았다. 삼가 선생이 명을 받을 당시의 일을 기록하여 뒷날 이곳을 지나는 자들에게 받들어 알려주는 바이다. 현인(縣人) 임한일(任漢一)과 이후진(李厚眞)이 선생의 일에 대해 한결같이 부지런하였으니, 그 의리가 둘 다 가상하여 아래에 함께 기록하여 사라져 없어지는 일이 없게 하였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의현(李宜顯)이 글을짓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전(前) 행 홍문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行弘文館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이양신(李亮臣)이 글씨를 쓰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민진원(閔鎭遠)이 전서(篆書)를 쓰다.
숭정기원후백사년신해륙월팔일립
기사환국(己巳換局)
기사환국(己巳換局)이란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
기사환국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쉽게 이야기 하면 드라마의 소재로 많이 나오는 장희빈 이야기로 생각하면 쉬울듯하다! 여기에서 원자는 훗날의 경종(景宗) 조선 제20대왕(재위:1720~1724)이다. 그래도 이왕 공부할 겸 기사환국의 구체적 이야기를 알아보고자한다.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은 1680년 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서거하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았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즉,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榨),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宗社)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희빈으로 높였다. 이에 대하여 노론측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봉조하(奉朝賀)로서 옛날 송나라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번왕(藩王)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태자로 책봉하여 그 뒤를 잇게 한 고사를 들어 반대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는 노론이 축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즉, 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黜送)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으며, 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민종도(閔宗道)·민암(閔黯)·목창명(睦昌明)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론계는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李頤命)·김만중(金萬重)·김수흥·김수항(金壽恒) 등이 복주(伏誅) 또는 유배당하였다. 그 해 4월에 이르러 숙종이 중전 민씨를 폐비할 뜻을 비추자, 이에 노론측은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그주동자인 박태보(朴泰輔)·이세화(李世華)·오두인 등이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 갔으며, 5월 2일에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후궁 장씨가 1686년에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淑媛)으로 봉해진 이듬해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으로 올랐는데, 이는 장씨로 인한 정국변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조사석은 장씨의 외가와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무렵 동평군 항(東平君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제조로서 궁중을 무상 출입 하였는데, 숙원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그와 연결을 맺고 있었다. 후궁 장씨의 이러한 주위 인물들이 마침내 그녀의 생남을 계기로 남인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원자 정호 때는 민암·민종도·이의징(李義徵) 등의 남인이 동평군·장희재 등과 직접 연락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장씨의 집안은 작은아버지가 역관으로 중인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신분으로 왕비에까지 책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경제상의 변동으로 상인·역관 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이 일로 1683년 경신환국 이래 집권해 온 서인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크게 진출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읍사공원
정읍사공원은 정읍시 시기동 아양산아래에 위치하며, 백제가요 정읍사를 주제로 조성된 공원이다.
주변경치가 푸른녹음으로 둘러 쌓여있어 숲속경치가 아름답고,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린 정읍사 여인의 망부상과 정읍사 노래비, 제례를 지내는 사당, 정읍사 이야기 벽, 사모정, 사랑의 계단, 야외공연장 등이 있다.
☞파리장서비(巴里長書碑)
파리장서비(巴里長書碑)는 1919년 3·1운동 직후 전국의 유림 대표 137인이 파리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린 '독립청원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각지에 세운 현충시설입니다. 산청, 봉화, 진주, 정읍 등 전국 각지의 유림과 시민사회가 주축이 된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세워졌습니다.
1905년 최익현(崔益鉉) 의진을 결성하기 위한 모의에 참가하였으며,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이 동지 규합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고 있을 때, 김양수는 고예진(高禮鎭)과 고석진(高石鎭), 그리고 고제만(高濟万) 등의 청년들과 정산(定山)에서 최익현에 호응하여 거사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여 8도에 배포하고, 12월 충남 노성(魯城)에서 각지로부터 소모(召募)된 7백여 명과 함께 거의하였다. 또한 김양수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 작성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독립청원서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이중업(李中業) 등의 영남유림과 김복한·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 등의 호서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이때 김양수도 유림대표 13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고암서원
▷전라북도 정읍시 모촌길 48-17 (하모동 378)
조선후기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송시열(宋時烈)이 배향되었다.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국문(鞠問)을 받기 위하여 1689년 6월 8일 상경 도중에 정읍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는데, 그 후 죄 없음이 밝혀져 그의 유적을 기리기 위해 이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된 원향유허비각(院享遺墟碑閣)이 있으며 이재(李縡)가 찬(撰)한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考巖書院廟庭碑
肅廟己巳。尤菴宋先生自耽羅被拿命。至此縣而受後命。至今五十有餘年。而學士大夫過此地者。莫不齎咨涕洟而不忍去。嗚呼。是孰使之然哉。
蓋天生大賢。爲吾道也爲生民也。先生際遇寧陵。身任天下之大義。及夫中道泣弓。事無可爲。則遂乃卷而懷之。猶惓惓不忘於世。以明天理正人心爲己責。閑先聖之道。闢異端之說。實孟朱以後一人。執此義理。雖明知大禍在前而不之顧。以至羣凶交煽。壼極垂傾。而先生首及於禍矣。文谷墓銘。先生絶筆。而其詩曰死有榮時。殆亦先生自道也。先生雖禍於一時。若其天經地義。終是殄滅他不得。反是道者。非邪則逆也。使我東方一域。知君臣父子之倫。免夷狄禽獸之歸者。皆先生賜也。嗚呼盛矣。
先生諱時烈字英甫。恩津人。萬曆丁未生。孝宗初服。盡禮聘召。官至左議政致仕。禍作後六年。上大悔悟。壼位重正。於是復先生爵賜祭。又贈諡文正。遺澤所曁。幷設祠以享之。考巖卽其一也。
章甫倡議。將立碑於廟庭。屬縡爲文。略叙其本末志業如此云。
☛고암서원묘정비(考巖書院廟庭碑) 한글해설
숙종 기사년(숙종 15, 1689년)에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이 제주(濟州)에서 나문(拿問)하라는 명을 받고서 서울로 올라가다가 이 현(縣)에 도착한 후 명을 받았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학사(學士)나 대부(大夫)로서 이곳을 지나는 자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다. 아, 이것이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겠는가?
대저 하늘이 대현(大賢)을 내신 것은 오도(吾道 : 유학을 말함)를 위해서이고 생민(生民)을 위해서이다. 선생께서 효종을 보필할 때 몸소 천하의 대의(大義)를 수립할 것을 자임하셨는데, 중도에 효종이 승하하시어 일을 성사시킬 수가 없었은즉 마침내 계획을 거두어들이고 가슴속에 담아두셨다. 그러면서도 간절하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잊지 못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삼으셨다. 선성(先聖)의 도(道)를 수호하고 이단(異端)의 학설을 물리쳤으니 실로 맹자(孟子)와 주자(朱子) 이후의 한 분이셨다. 이런 의리를 견지하였기에 비록 커다란 화가 목전에 닥친 것을 환히 알면서도 일신의 안위(安危)를 돌아보지 않으셨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번갈아 선동함에 삼공(三公)의 권위가 위태해지더니 선생이 맨 먼저 화를 입게 된 것이다. 문곡(文谷 : 김수항(金壽恒)의 호)의 묘지명(墓誌銘)을 짓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생은 절필하셨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죽음이 영예로울 때가 있다.’하였으니 자못 선생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라 하겠다. 선생은 비록 한때에 화를 입었지만 천지와 같은 의리는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말하는 자는 삿된 무리가 아니면 역적(逆賊)이다. 우리나라 동방의 한 강토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를 알고 오랑캐나 금수로 떨어짐을 면한 것은 모두가 선생 덕분이다. 아, 선생의 덕이 성대하도다.
선생의 휘는 시열(時烈)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은진(恩津) 사람이다. 만력(萬曆) 정미년(선조 40, 1607년)에 출생하셨다. 효종이 막 즉위하시어 선생께 예를 다하여 초빙하였으며 관직이 좌의정일 때에 치사(致仕 : 벼슬을 그만둠)하였다.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난 다음 성상(숙종을 가리킴)이 크게 뉘우치고 대위(臺位 : 삼공(三公)의 지위)가 권위가 서고 바로잡히게 되었다. 이에 선생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선생의 유택(遺澤)이 함께 미쳐 사당을 지어 향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고암서원이 바로 그 한 가지이다.
장보(章甫)가 발의(發議)하여 묘정(廟廷)에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재(縡)에게 비문을 써 주기를 부탁하여 그 본말과 지업(志業)을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한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 겸 지경연사 세자우빈객(議政府左參贊兼知經筵事世子右賓客) 이재(李縡)가 기록하다. 조봉대부(朝奉大夫) 전(前)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쓰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전서(篆書)를 쓰다.
숭정갑신년 후 104년 정묘년(영조 23, 1747년) 2월 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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