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회] 들사람 함석헌을 ‘발굴’하다
장준하 평전/[10장] <사상계> 정론지로 자리잡아 2008/12/14 08:00 김삼웅<사상계>가 들사람 함석헌을 필자로 ‘발굴’한 것은 성공 요인 중의 하나였다.
장준하와 함석헌은 <사상계>를 통해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이후 한국 사상계와 정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언론사(言論史)와 반독재 민권운동사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장준하가 존재하므로 <사상계>가 있었고, 함석헌의 존재로 인해 <사상계>는 그 존재의 빛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사상계>를 매체로 하여 함석헌과 장준하의 가치와 역량은 상승적 효과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사상계>가 사라진 뒤에도 반독재 투쟁을 함께 하면서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함석헌을 처음으로 ‘발굴’한 사람은 안병욱이다.
연세대학의 전임강사로 철학을 가르치면서 <사상계> 교양란의 편집을 맡고 있던 안병욱에 의해서였다. 장준하에게 함석헌은 선천의 신성중학 시절부터 ‘함 도깨비’로 각인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안병욱이 장준하에게 함석헌 선생의 글을 받아오고 싶다고 제안하여 승낙을 얻었다. 안병욱은 함석헌을 ‘발굴’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잡지의 사명을 하나는 훌륭한 필자를 발굴하여 천하의 정론을 펴게 하는 일이다. 내가 <사상계>에 관계하는 동안에 <사상계>를 위해서, 또 한국의 문필계를 위해서 조그만 기여가 있다고 하면 두 분의 문필인을 발굴하여 글을 쓰게끔 귀찮게 군 일이다. 그 한 분이 함석헌 선생이요, 또 한 분이 류달영씨다. <사상계>의 집필을 통하여 오산의 도깨비는 한국의 도깨비가 되었고, 그의 예리한 필봉은 독재정권의 아성을 겨누게 되었다. 의를 위하여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 함선생의 글은 언제나 피의 맥박과 생명의 리듬이 약동한다. (주석 6)
안병욱이 처음 받아 온 함석헌의 글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200자 원고지 80매 분량의 원고이다. 이 글은 1956년 1월호에 전문이 실렸다. 함석헌이 처음으로 국민을 향하여 말하기 시작한 것이고 <사상계>와 인연을 맺게되는 단초가 되었다. 몇 대목을 인용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종교가 있다면 기독교다. 즉 국민의 양심 위에 결정적인 권위를 가지는 진리의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세계관 인생관이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기독교가 내 부치는 교리와 실제가 다르고 겉으로 뵈는 것과 속과 같지 않은 듯 하고 살았나 죽었나 의심이 나게 하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사회가 정신적 혼란에 빠져 구원을 위해 두 손을 내미는 데 교회는 왜 아무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지 않는가?
이 나라의 기독교가 종파싸움이 심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나라를 위해 하늘나라를 임하게 하려는 의욕이 적고 목적은 현세적인 권력에 두려는 증거다. 그래가지고는 저들은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기도할 때는 눈물을 흘리며 남북통일을 구하고 머리를 들고는 폭력을 써서 교회당 쟁탈전을 하고 그런 통일주의는 썩 잘한대도 자기 교파가 독재적 통일을 원하는 것 밖에 될 것 없다.
장준하는 처음에 이 원고를 받아 “종교잡지가 아닌 데 어떨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원고를 읽고는 <사상계>에 싣기로 결정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함석헌의 글은 내용과 문장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당시 기독교계의 문제점을 적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반응도 대단히 좋았다. 이 글로 인하여 <사상계>는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리게 되었다. 주간 안병욱의 회상이다.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은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글이다. 이 글 때문에 <사상계>가 일약 수천 부가 증가했다. 저마다 다투어서 사 읽었고,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읽은 뒤에 소감도 여러가지였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신랄한 경고요, 또 선생님 자신의 기독교관을 적은 것이다. 무교회주의자인 함선생은 이 글에서 프로테스탄트도 공격했고 가톨릭도 내리쳤다. 기독교인들은 분개했고, 비 기독교인들은 쾌재를 외쳤다. (주석 7)
장준하는 이 글이 발표된 뒤 안병욱과 함께 전셋집으로 함석헌을 찾아가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대현동에서 내가 만난 함선생님은 ‘퍽 수줍어하는 잘생긴 노인’이라는 인상이다. 그렇게 겸허한 노인이 그렇게 격렬하고 날카롭고 무서운 글을 쓰시나 하는 놀라움을 곁들게 하였다. 별로 말씀은 아니 하시고 곁에서 안병욱 형이 이것저것 묻는 말에도, “글쎄, 그럴까, 하기는” 등 비교적 모호한 말 한 두 마디씩을 남기실 뿐이었다. 내가 <사상계>의 발간 취지를 대강 말씀드리고 나서, 앞으로는 <사상계>를 선생님이 직접 하시는 잡지라고 생각하시고 계속하여 글을 써 주십사 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글쎄요”라는 말씀만 남기실 뿐이었다. (주석 8)
이렇게 <사상계>와 인연을 맺게 된 함석헌은 같은 해 4월호와 5월호에 '새윤리'를 상하에 걸쳐 발표하고, 9월호에는 '건전한 사회는 어떻게 건설될 것인가'라는 좌담회에 백낙준ㆍ유진오ㆍ김팔봉ㆍ윤일선과 함께 참석했다. 이어서 10월호에 '진리에의 향수', 12월호에 '사상과 실천'을 썼다. 그때마다 독자들의 반응은 대단했고, 그 만큼 <사상계>의 지면은 충실해지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주석
6) 안병욱, '나와 함석헌 선생', <사상계>, 1963년 4월호, 270~271쪽.
7) 안병욱, '옆에서 지켜본 사상계 12년', <사상계>, 1965년 4월호, 265쪽.
8) 장준하, 앞의 글, 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