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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1편 1-6절
찬송 / 내 평생에 가는 길· 470장
성서 / 창세기 39장 1-5, 21-23절, 요한복음 6장 16-21절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끄시는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올려 드립니다.
지속되는 코로나 확산과 방역지침으로 인하여
오늘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이 예배를 통해 우리의 삶이 주님의 선하심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사랑이 필요한 곳에 사랑이, 기쁨이 필요한 곳에 기쁨이 있게 하시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 위로가, 소망이 필요한 곳에 소망이 넘치게 하옵소서.
주님,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가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자연스러움을 닮아 자연스럽게 가을이 되는 자연의 순리처럼
우리의 삶과 신앙, 눈빛, 들숨과 날숨, 내딛는 발걸음 모두
자연스러운 주님의 섭리와 순리를 품어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새롭게 맞이하는 9월에는
주님처럼 넉넉하고 풍성한 몸과 마음, 영혼을 지니게 하옵소서.
주님처럼 겸손하고 주님처럼 이웃을 품고 돌보는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주님이 바라보시는 곳이 우리가 바라보는 곳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향하도록 우리를 비춰주옵소서.
우리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형통의 사람으로 초대하시는
형통의 본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형통으로의 초대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주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창세기 39장 23절).
그들은 기뻐서 예수를 배 안으로 모셔 들였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요한복음 6장 21절).
송화재 전도사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한민교회 공동체와 하늘 말씀 나눌 수 있어 감사합니다.
전면 비대면 형태로 예배를 드린 지 언 8주가 되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지체 분들의 눈빛과 목소리, 어린 생명들의 활기와 웃음소리가 그립기만 합니다.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이렇게 떨어져서 예배를 드리지만, 더불어서 함께 축복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 한민 공동체 지체 한 분 한 분을 떠올리며, 또 가정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가족들과 이렇게 축복하고 사랑의 인사 나누어보면 어떨까요?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의 평강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오늘 성서의 첫 책,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로 구약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역동적이고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자랑하는 인물이 꿈의 사람 요셉이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셉의 스토리가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요셉의 드라마틱한 인생의 여정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받아 읽은 창세기 39장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요셉이 피를 나눈 형제들로부터 버림받고 인신매매로 팔려 애굽의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형국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창세기 39장 3절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지요.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주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서의 증언을 처음 읽는 것처럼, 그리고 두 번 다시 못 볼 것처럼 읽고 묵상하다 보면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처한 상황의 처절함과 절박함에 몰입하다 보면 요셉과 함께 계시고,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잘 되게 해주셨다는 본문의 증언은 쉬이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어떤 상황에 처해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야곱에게 총애를 받던 아들의 신분에서 형들에 의해 비참하게 버림받고 인신매매로 팔려 애굽이라는 낯선 타국의 노예로 전락한 상황이지요. 심지어 그토록 충성을 다해 일하던 보디발의 집안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오늘날 ‘성범죄자’라는 타이틀의 오해를 받고 기껏해야 옥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 아닙니까? 이런 요셉의 상황을 두고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잘 되게 해주셨다” 라고 하는 성서 기자의 증언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는 일마다 무엇이나 다 잘되는 사람을 일컬어 ‘형통한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개역개정 성서로 만나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의 증언을 두고 저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서와 성서가 증거 하는 하나님께 이렇게 되묻게 되지요.
“하나님! 피를 나눈 형들에게 버림받고 인신매매로 팔려 노예살이하는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요셉. 진짜 형통한 사람입니까?”
어떤 분들은 이런 저의 항변 아닌 항변을 두고 창세기 41장에 이르러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형통한 사람 아니냐며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쩌면 정말 요셉의 인생이 비로소 형통하다고 묘사할 만한 대반전의 순간에서 정작, 이 ‘형통’ 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이처럼 요셉의 인생에서 최악 혹은 나락이라고 불릴만한 처절한 상황을 ‘형통’으로 묘사하고, 요셉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형통’. 뭔가 묘한 긴장감과 오묘함, “왜그러지?” 하는 궁금함이 느껴지시는지요?
저는 지금까지 나눈 이 ‘형통’에 대한 의구심과 항변, 그 역설의 한 가운데서, 오늘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형통’ 이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를 통해,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기억하고 살아가야 할 ‘형통’의 새로운 초대를 발견하기 원하는데요,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형통’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히브리어 ‘찰레아흐’는 기본적으로 ‘번성하다’, ‘번영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그런데 한 발자국 더 들어가서 좀 더 본질적이고 오늘 본문에 충실한 뜻은 ‘돌진하다’, ‘헤치고 나가다’ 라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차원의 극복 내지는 극기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극한 상황을 두고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요셉의 ‘형통’, 요셉의 ‘찰레아흐’는 무엇입니까? 그렇지요. 우리가 흔히 아는 형통의 세상적/맘몬적 의미, 즉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요셉의 ‘형통’은 함께 나고 자란 형제들로부터 비참하게 버림받고 팔리는 극한의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얻는 아들에서 애굽의 노예로 전락한 비참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이제는 옥살이를 해야 하는 비통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그 상황을 돌진해나가고 헤치고 나가는 불굴의 의지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삶과 신앙에 대한 묘사요 설명인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구약성서의 본문은 ‘형통’을 마냥 잘 되고 잘 풀리는 삶을 묘사하는 결과론적 의미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셔서 요셉이 비참하고 어려운 상황에 주저하고 넘어지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뚫고 돌진해 나아도록 이끄시는 그 과정 자체가 곧 ‘형통’ 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으로 하여금 고난과 역경을 뚫고 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형통’이 사랑하는 한민교회 공동체 모든 분들의 삶의 자리에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한편, 오늘 우리가 함께 받아 읽은 신약성서 본문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지요. 성서에 의하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예수께서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는 혼자서 산으로 올라가신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무슨 영문인지 제자들은 바다로 내려가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향합니다. 예수와 함께 간 것이 아니라 제자들만 노를 저어 건너간 간 것이지요. 제자 가운데 어부 출신들이 있기에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너가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와 함께 가지 아니하고 제자들만 갔을까요? 공관복음서인 마가와 마태의 고백과 증거를 반추해보면 보면 제자들만 바다로 나간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수께서 한데 모여 있는 무리들을 헤쳐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배를 저어 얼마를 갔을까요? 이미 밤이 캄캄해지고 어두워졌는데도 예수께서는 오시지 않으십니다. 설상가상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집니다. 아마 거센 파도도 일었을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마주한 인생의 모진 풍파처럼 말입니다. 생각건대, 아무리 유능한 어부라고 할지라도 바다 한가운데서 마주한 폭풍우는 반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는 커다란 두려움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제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가만히 있었습니까? 아니지요. 배를 저어서 십여 리쯤 나아갑니다. 1리가 도대체 몇 미터냐 하는 것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습니다만 대충 4-5km를 노를 저어서 가지 않았을까요?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운 상황에서 5km 남짓 노를 저어가기 위해서 제자들은 죽을힘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 배에 제자들이 총 몇 명이 탔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투입 가능한 인원들은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노를 저어 거센 파도를 뚫고 헤쳐나갔을 것입니다.
한참이 흘렀을까요? 금방이라도 배를 삼킬 것 같은 파도 저 너머로 누군가 바다를 걸어서 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가뜩이나 폭풍우와 싸우는 일도 버겁고 힘든데 설상가상 귀신이 곡할 일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는 예수를 유령으로 착각하고는 혼비백산하여 소리까지 질렀다고 하지요.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 말아라”
이내 제자들의 두려움은 안도감으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걸어서 온 예수를 배 위로 모시지요.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본문인 요한에는 바람이 그쳤다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그치고 말고의 여부나 설명이 초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요한 공동체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들이 가려던 땅은 어디였을까요? 성서의 기록대로 가버나움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조금 더 우리의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 우리 삶에 적용해서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작은 예수로서의 길, 정의와 생명의 길, 살림이 있는 길,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께서 바다를 걸어오신 기적 못지않게 우리 삶에서 만들어가야 할 소소하나 중요한 기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수의 제자들이건, 우리이건 가려던 땅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생의 배에 오르신 주님과 함께 우리의 배를 저어서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배를 저어 가다 보면 순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요셉의 인생처럼, 나아가 오늘 신약성서 본문의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또한 인생의 배, 신앙의 배를 저어가며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 물질의 축복받아 부자 되고, 자손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심지어 코로나도 걸리지 않는 건강하고 형통한 길이 열린다는 오늘의 여러 교회의 광고가 얼마나 잔혹하고 허무한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디 그뿐 입니까? 셀 수 없이 일렁이는 파도처럼 인생과 신앙의 자리에 드리워진 고난과 시험, 역경을 마주하며 허다한 탄식을 내뱉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 한민 공동체가 기억하고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초대하시는 형통은 하는 일마다 잘되고 잘 풀리게 하시는 수리수리 마수리와 같은 소원 수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한복판에 초대하시는 형통은 고난과 역경, 도전과 어려움의 상황 앞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돌진하고 뚫고 나아가는 삶과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렇게 험한 폭풍우와 파도를 뚫고 우리게 주어진 삶과 인생이라는 배를 저어갈 때 예수께서는 “나다 두려워 말아라”고 말씀하시며 거센 파도를 넘어 우리 인생의 배에 오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는 예수와 우리가 가려던 땅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세상이 말하는 형통과 격이 다른 하나님의 형통, 우리가 주목해야 할 형통입니다.
사랑하는 한민 공동체 지체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과 삶의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통을 초대하고 계십니까? 소망하기는 비록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폭풍 가운데 흔들리는 배와 같을지라도 그 인생과 더불어 함께 하시며,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그 폭풍을 뚫고 돌진하며 헤쳐나가도록 인도하시는 형통으로의 초대에 우리 삶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내어드린 우리의 삶의 자리에 주님께서 친히 오르십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배는 가려던 땅에 가기 마련입니다. 잠잠해질 줄 모르는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많이 지치고 소진되어있는 이때,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형통의 기쁨, 형통의 신비, 형통의 감사를 누리시는 한민 공동체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