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화권 모형계는 때 아닌 영국군 전차 전쟁중인데요. 바로 냉전시절 최강의 전차로 불리던 FV 4201 Chieftain 때문에 각 메이커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신규 메이커 TaKOM 을 시작으로 멩모델이 치프텐 전차 전쟁에 뛰어들면서 동시에 치프텐 전차 만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2차대전중 독일군의 전차에 시달린 영국군은 대전후반에서야 제대로 된 중전차를 개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센추리온 전차 (Centurion tank) 이다]
기본적으로 센추리온 전차의 설계사상을 이어받아 장갑과 화력에 치중하고 상대적으로 기동능력은 경시된 설계하에 개발되었다. 또한 2차대전 후반 독일군의 전훈을 받아들여, 소련의 기갑웨이브를 원거리에서부터 저격하여 세력을 줄이고, 근접전에서도 강력한 장갑을 이용해서 적 전차의 사격을 씹어버리면서 계속 전차를 잡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다.[2] 여기에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얻은 노하우도 포함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이 치프틴이다.
[FV 4201 Chieftain 은 기본적으로 센추리온 전차의 설계사상을 이어받아 장갑과 화력에 치중하고 상대적으로 기동능력은 경시된 설계하에 개발되었다. 또한 2차대전 후반 독일군의 전훈을 받아들여, 소련의 기갑웨이브를 원거리에서부터 저격하여 세력을 줄이고, 근접전에서도 강력한 장갑을 이용해서 적 전차의 사격을 씹어버리면서 계속 전차를 잡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얻은 노하우도 포함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이 치프틴이다.]
[치프텐 전차의 주포로는 당시 서방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L11A1 55구경 120mm 강선포를 탑재되었다. 이는 당시 소련의 전차들이 115밀리 활강포를 탑재한것에 기인한것으로 당시 서방의 전차들이 90~105밀리 주포가 주력인것에 비해 120밀리 포는 확실한 우세에 있었다]
[치프텐에 장착된 L11A1 55구경 120mm 강선포는 현재에도 챌린저 전차에도 개량해서 사용중인 전차용 포이다 현재는 L30 으로 개량된 모델이 장착되고 있다. 이 포는 다양한 탄종을 사용할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대표적인게 High Explosive Squash Head (HESH) 고폭탄) 활강포에 비해 탄속이라던지 관통력이 떨어지고 최근에는 활강포에도 다양한 탄이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는지라 요즘에는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발상에 따라 당시 서방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L11A1 55구경 120mm 강선포를 탑재했고, 최대한 장갑을 강화한 덕에 초기 모델부터 55톤이라는 무거운 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엔진이 650마력(개량한 건 750마력)이어서 기동성은 별로 좋지 않아 느림보 전차가 되고 말았다.[3]
야지에서의 속도는 30km/h이고, 도로에서도 48km/h에 불과했다. 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레오파르트1이나 AMX-30등의 2세대 주력전차가 핵전쟁 상황에서 부대단위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 기동성에 치중하고 장갑 방어력은 별로 신경을 안쓰고 화력도 적당한 수준으로 맞추었던 것과는 상반되는 설계사상이었다. 즉, 전술핵이나 전략핵이 터지는 상황보다 당대 소련군 전차와 직접 교전에 더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서방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L11A1 55구경 120mm 강선포를 탑재했고, 최대한 장갑을 강화한 덕에 초기 모델부터 55톤이라는 무거운 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엔진이 650마력(개량한 건 750마력)이어서 기동성은 별로 좋지 않아 느림보 전차가 되고 말았다야지에서의 속도는 30km/h이고, 도로에서도 48km/h에 불과했다. 이는 독일과 프랑스의 레오파르트1이나 AMX-30등의 2세대 주력전차가 핵전쟁 상황에서 부대단위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 기동성에 치중하고 장갑 방어력은 별로 신경을 안쓰고 화력도 적당한 수준으로 맞추었던 것과는 상반되는 설계사상이었다. 즉, 전술핵이나 전략핵이 터지는 상황보다 당대 소련군 전차와 직접 교전에 더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방어력은 대단했다. 장갑 자체가 두꺼운 데다가, 조종수가 거의 누워서 조종하도록 한 설계덕분에 전차 차체를 조종수의 앉은 키만큼 높게 만들 필요가 없어져 차체를 낮게 만들수 있엇으며 당시엔 이런 낮은 차체에 장착할 수 있을 정도로 엔진과 동력 전달장치가 발달 하여 72도라는 극단적인 경사장갑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후로 개발된 전차들부턴 대부분 반쯤누운형태의 조종석을 가지게 되는데에 영향을 끼쳤다. 아무튼 이러한 구조 덕에 소련측도 치프틴을 매우 위협적인 적수로 평가했다.
그러나 엔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차체를 낮추기위해 도입한 대향 피스톤 엔진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 그리고 치프틴은 Leyland L60 혼합연료를 사용했는데 성능은 나쁘지 않았으나 전직 조종수 말로는 푸른연기(...)가 폴폴 났다고... 소련에서 이 엔진을 베꼈다가 T-64에서 피를 봤다던가?
[치프텐 전차의 엔진은 Leyland L60 (750hp) 다연료 2행정 엔진 을 장착하였는데 그 성능은 별로 좋지 않았다. 차체를 낮추기위해 도입한 대향 피스톤 엔진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 그리고 치프틴은 Leyland L60 혼합연료를 사용했는데 성능은 나쁘지 않았으나 전직 조종수 말로는 푸른연기가 발생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차체 무게에 비해 엔진의 출력이 너무 낮았다는게 문제..]
그리고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치프틴에 달린 최신식 동력장치 썼다고 인도군이 좋다며 빅커스 MBT mk.1[4]을 샀다가 피똥을 싸기도 했다.팀킬 결국 mk.3를 설계하면서 디트로이트 디젤 엔진으로 바꿨다.근데 영국군은 L60엔진을 계속 썼다(...)
치프틴 P1~P6 원래 FV4201 프로젝트의 주개발사는 Leyland 사였으나, P 시리즈 제작 당시 겹쳐진 센츄리온 L7 환장 때문에 일을 나누기 위해 Vickers Amstrong 사가 함께 참여하게 된다 1959년 Leyland에서 시험 제작한 L60 실험 엔진을 단 첫번째 차량이 P1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기존 포탑의 -7.5/+15의 부앙각을 개선시켜 FV4202와 같은 -10/+20의 부앙각을 확보하며, 전면 장갑을 강화하고, 적외선 탐조장치를 장착한 새로운 포탑이 만들어졌다. 이후 새로운 포탑에, 실험 결과를 반영해 개선된 차체를 더해 14종류의 전차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중 군 실험에 쓰인 6종류의 전차가 P1~P6이었고, War Office 실험에 쓰인 6종류의 전차가 W1~W6이었다. 나머지 2대는 레오파드1과 비교실험을 위해 독일로 운송된다. 1960년 5월 치프틴 P3로 진행한 실험에서 몇 가지 문제들이 확인됐고, 개선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62년, 영국 육군은, 기동성에 문제가 있음에도, 적절한 화력을 갖춘 치프틴 프로토타입 2대(W1, W2)를 채택한 후, 독일 주둔 기갑 연대에 배치해 개선을 위한 실험을 계속 진행하게 한다.
당시 실험을 위해 독일에 배치된 치프틴 프로토타입 중 하나로 추정되는 전차를 센츄리온, 컨커러 전차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5][6]MBT인데도 중전차인 컨커러 뺨싸다구를 때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센츄리온의 등치에 눈이 먼저 간다면 진 거다
이후 독일에서 이뤄진 실험 결과들을 반영해 첫 치프틴 정규 버전인 mk.1이 생산되게 된다.
최초모델은 1965년부터 영국군에 도입되었으며 주로 독일 주둔 영국군인 라인군단에 배치되었다. 이후 이란, 요르단, 쿠웨이트 등 몇몇 중동국가에도 판매되었다. 이란은 이 치프틴을 대폭 개량한 전차를 주문했다가 혁명으로 취소되면서 영국 육군이 울며 겨자먹기로 대신 구입한 것이 바로 챌린저다.
챌린저 배치 이후에도 스틸브리치 증가 장갑을 장착한 모델이 한동안 운용되었으며 사실상 화력에서는 챌린저와 대등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보다 오랫동안 운용될 전망도 있었으나 냉전 종식과 함게 몰아닥친 군비 축소 바람에 영국군에서는 1995년까지만 운용되었다.
[치프텐의 최초모델은 1965년부터 영국군에 도입되었으며 주로 독일 주둔 영국군인 라인군단에 배치되었다. 이후 이란, 요르단, 쿠웨이트 등 몇몇 중동국가에도 판매되었다. 이란은 이 치프틴을 대폭 개량한 전차를 주문했다가 혁명으로 취소되면서 영국 육군이 울며 겨자먹기로 대신 구입한 것이 바로 챌린저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선 치프틴의 약점인 엔진등을 강화한 샤1이 스펙상 모든면에서 열등한 T-62와의 대규모 기갑전에서 참패하고 그나마 살아남은 나머지 샤들은 Mi-24에 쫒기기만 하다 결국 전쟁 후반부 T-72가 등장하면서 전장에서 모습을 감추고 오히려 이란쪽은 노획한 T-55을 선호했다는 안습한 상황을 연출했다.
[이란은 왕정시절 치프틴 전차를 개량한 샤(Char) 전차를 대량도입하여 운용하였으나 이란-이라크전에서 많은수를 이라크군에게 격파당했다. 이는 전차의 성능보다는 훈련이 덜되었고 운용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치프틴이 패배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전투는 1981년 1월 실시된 이란군의 공세 '나스르 작전'으로, 혼란스런 상황의 이란군과 잘 훈련된 이라크군이 맞붙으면서 생긴 일이었다. 당시 이란군의 상황은 독소전쟁 초기의 소련군과 비견할만한 것으로, 혁명에 뒤이은 숙청으로 잘 훈련된 지휘관이 대부분 날아간데다가 서방의 제재로 수리 부속을 보급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규군 보병은 혁명 이후 대부분 해산돼 보병전력도 부족한 상황. 이것뿐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새로 창설된 혁명수비대와 이란 정규군 사이에 정치적 알력까지 벌어졌다.
[치프틴이 패배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전투는 1981년 1월 실시된 이란군의 공세 '나스르 작전'으로, 혼란스런 상황의 이란군과 잘 훈련된 이라크군이 맞붙으면서 생긴 일이었다. 당시 이란군의 상황은 독소전쟁 초기의 소련군과 비견할만한 것으로, 혁명에 뒤이은 숙청으로 잘 훈련된 지휘관이 대부분 날아간데다가 서방의 제재로 수리 부속을 보급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규군 보병은 혁명 이후 대부분 해산돼 보병전력도 부족한 상황. 이것뿐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새로 창설된 혁명수비대와 이란 정규군 사이에 정치적 알력까지 벌어졌다.]
이 개판에서 이라크군 공세가 주춤한 틈을 타 이란 정규군은 이라크군에게 포위공격받던 아바단 시를 구원하기 위해 제16기갑사단 예하 3개 여단을 동원, 대규모 공세를 실시한다. 하지만 이란군 공격축선은 지반이 무른데다가 매년 홍수로 야지가 진창으로 변하는, 전차를 굴리기에는 최악의 지형이었다. 이런 지형에서는 보병의 지원이 아주 중요한데, 정작 보병전력의 대부분을 보유중인 혁명수비대와는 정치적으로 대립중이라 미운 놈들 전공을 만들어줄 수는 없다는 이유로 작전에서 제외해 버린다. 여기에 이란군은 수색정찰부대도 태부족이었고, 공세를 실시하면서도 전투력 비율을 3:1은 커녕 2:1 정도밖에 맞추지 못했다.
짧은 포병 공격준비사격으로 나스르 작전이 시작됐다. 이란군은 강을 도하해 300대의 전차를 전개시켰지만 야지의 진흙탕 때문에 포장도로 위에서 종대로 길게 늘어선 채 느릿느릿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데려온 제55공수여단의 보병들이 대열 맨 뒤에 위치해 적시에 전차를 지원할 수 없게 된 건 덤. 공격기도는 당연히 노출됐고, 이라크군은 제10기갑여단을 기동시켜 이란군 공격축선 정면과 측면에 호구(虎口)형 매복진지를 구축하고 전차를 차체차폐진지에 숨긴다. 정찰능력이 엉망이던 이란군은 다음 날 매복을 눈치채지 못한 채 호랑이 아가리로 뛰어들었는데, 이라크군은 이를 전차와 대전차헬기에서 쏟아지는 십자포화로 성대하게 맞이했다. 이란군 선두 여단은 정면돌파를 시도하다가 심각한 손실을 입고 야지에서 기동해 이라크군에 맞서려고 시도했지만, 무거운 치프틴 전차가 진창에 빠지는 바람에 대실패. 선두 여단은 몰살당한다.
포기하지 못한 이란군은 후속 여단을 투입해 다시 공격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상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격한 코브라 공격헬기도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라크군의 대공포화로 코브라 몇 대가 격추당하기까지 했으니. 여기에 대전차화기로 무장한 이라크군 기계화보병이 꼼짝 못하고 앉아있는 이란군 전차 사냥에 참가하면서 전투를 사실상 도살극으로 만들었다. 전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이란군 도하지점의 부교를 파괴한 이라크군 공습. 이로써 이란군은 퇴로까지 끊겨버린다. 제16기갑사단은 갇힌 채 3일 동안 복날 개 맞듯 신나게 두들겨 맞다가 마지막 순간에 수리된 부교를 통해 간신히 후위 여단만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그나마 후위 여단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훈련 수준이 낮은 이라크군이 전면 역습으로 전환할 생각은 안 하고 대부분의 전차를 계속 진지 안에 박아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스르 작전에서 이란군은 88대(이란군 주장)에서 214대(이라크군 주장)의 전차를 손실했다. 이는 공세 전까지 이란군이 보유한 전차의 10-20%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란군의 손실에는 이것 말고도 장갑차 100여대, 수 문의 자주포와 코브라 공격헬기가 더해진다. 이라크군의 피해도 45대의 전차와 50여대의 장갑차량으로 상당했지만, 그럼에도 잃은 전차보다 노획한 샤1 전차가 많을 정도였다.]
나스르 작전에서 이란군은 88대(이란군 주장)에서 214대(이라크군 주장)의 전차를 손실했다. 이는 공세 전까지 이란군이 보유한 전차의 10-20%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란군의 손실에는 이것 말고도 장갑차 100여대, 수 문의 자주포와 코브라 공격헬기가 더해진다. 이라크군의 피해도 45대의 전차와 50여대의 장갑차량으로 상당했지만, 그럼에도 잃은 전차보다 노획한 샤1 전차가 많을 정도였다.
전투 경과에서 알 수 있듯이, 나스르 작전의 실패는 치프틴 성능의 문제는 아니었다. 비슷한 예로 중동전쟁에서 셔먼등에 격파당한 T-55 등이 있다. 무기의 성능만 중요한게 아니라 지휘관과 승무원도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운 예인 것이다. 이런 참패 와중에서도 이라크군은 당시 자국이 보유한 소련제 전차 중 최강의 화력이었던 T-62 전차의 115mm 활강포를 갖고서도 치프틴을 격파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니 방어력만큼은 당대 수준급임이 사실이었던 듯. 치프틴의 주포와 사격통제장치도 헐다운 진지 안에 숨어있는 이라크군 전차를 정확하게 격파하면서 이라크군에 손실을 강요했다고 한다.
치프틴의 다른 실전으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당시 벌어진 "다리의 전투"가 있다. 멋 모르고 종대 대형으로 굴러들어오는 이라크군 T-72에 쿠웨이트군 치프틴 대대가 한 방 먹였지만, 탄약 부족과 포위 우려 때문에 사우디 국경으로 탈출한 전투다. 이쯤되면 이라크는 거의 치프틴의 원수 수준(…).
칼리드/샤1 치프틴의 최종 개량형. 사실 거의 다른 전차에 가깝다. 치프틴 Mk.5를 기초로 유압식 현가장치의 도입, 1200마력 엔진 및 새로운 변속기의 도입으로 치프틴의 단점인 기동성부족을 개량하고, 분리형 장약의 도입으로 탑재탄약의 증가, 레이저 거리 측정기 및 열영상장비 및 광증폭 야시장비의 도입과 사격통제장치의 개량으로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원래 이렇게 개량된 버전을 샤1이라는 이름으로 수출하려 했다. 이란 혁명후 재고로 남은 이 버전을 요르단이 칼리드로 도입한다.
샤2 위의 샤1에서 변속기가 문제가 되어 변속기를 다른 변속기로 교체한 것이다. 이란에 판매직전 혁명으로 나라가 뒤집히는 바람에 이 버전을 영국이 도입해서 챌린저가 된다.
모바레즈 이란이 혁명 전 인도받은 구형 치프틴을 독자적으로 개량한 것이다. 연료탱크, 변속기와 엔진의 교체 및 레이저 거리측정장비와 야시장비를 장착했다.
아머드 워페어에서 Mk. 5가 5티어 MBT로 등장한다. 장비 업그레이드를 완료할 경우 Mk.11 사양이 된다.
월드 오브 탱크에서 Mk.6외양에 mk.1+mk.3의 성능과 부품을 가진 혼종(?)이 영국10티어 중전차로 등장할 예정이다.
[1] 이는 장갑이 개량된 후기형의 경우이고, 초기형은 차체 전면 80~85mm 72도 경사이다.[2] 아래에서 소개할 사이트에 따르면 한국전쟁에서의 경험도 반영했다고 한다.[3] 사실 이렇게 된데는 1957년의 나토 엔진 규정에선 다연료 엔진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시험 모델에선 450마력이라는 위엄찬 힘을 보여주었다[4] 치프틴의 L60 엔진과 동력 시스템을 가져다 썼다.[5] 치프틴 배치 이후 컨커러와 센츄리온은 퇴역하게 된다.[6] 운전수를 눕게 만드는 등의 새로운 설계로 치프틴의 차고는 센츄리온이나 컨커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아졌다.[7] 이전 버전들은 전량 mk.5로 개수됐으며, 이후 치프틴 개량은 mk.5를 베이스로 이뤄졌다.[8] 예를 들자면 mk.5/3는 IFCS(향상된 사통 시스템)가 달렸고, mk.5/5는 APFSDS 탄을 사용 가능하게 개량됐다
첫댓글 치프텐은 수출 않한 줄 알았는데... 좋은 정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