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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4); 國立古宮博物館 상설전시실(3)
(151) 궁궐 침전 내부공간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寢殿은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左右에 온돌방이 배치되고
그 주변에는 퇴(退: 툇말/툇간)가 배치되었다.
내부의 방들은 장지문으로 연결되어 공간의 넓이와 형태를 可變的으로 融通性 있게
조정하여 사용하였다.
(152) 궁궐 寢殿 內部
반짇고리, 쇠뿔장식 실패와 밀대[華角線軸], 수방석(繡方席), 쇠뿔 장식 자[華角尺],
영친왕비 붉은 칠 바느질함[英親王妃 朱漆 函], 촛대[燭臺], 나전문갑(螺鈿文匣) (왼쪽부터)
(153) 궁궐 침전 내부
붉은 칠 서안[朱漆 書案]와 영친왕비 경대[英親王妃 朱漆 三段鏡臺]
(154) 수라상
(155) 수라상
*水刺床은 왕과 왕비의 평상시 밥상으로 수라는 고려 말과 조선시대에 왕에게 올린 밥을
敬語로 이르는 宮中用語로, 몽골어[蒙古語]라고 한다.
'밥'이라는 한국말은 <鷄林類事>에 飯을 '朴擧(박거)'로 음을 표시하였고,
<和産三才圖>에도 '바비(波備)'로 음표하여 밥으로 고정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수라는 고려 元宗 이후 몽골의 文物이 들어와 몽골어의 음식을 '슐라'라고 한 데서
궁중용어로 정착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수라상의 반찬은 12가지로 정해져 있고, 내용은 계절에 따라 바뀐다.
수라상은 왕과 왕비가 같은 온돌방에서 각각 받는데, 동쪽에 왕, 서쪽에 왕비가 앉으며
兼床은 없고 시중드는 水剌尙宮도 각각 3명씩 대령하며, 元盤(수라상)과 곁반·책상반 등
3개의 상이 들어온다.
(156) 여러 가지 상(床)
(157) 칠기합(漆器盒) –주칠 원형 소반(朱漆 圓形 小盤)
=칠기합: 왕실에서 사용하던 칠기합으로 뚜껑의 상단에는 왕을 상징하는 龍과 鳳凰 문양을,
옆면에는 꽃 문양과 나비, ‘囍’자 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 주칠 원형 소반: 전체적으로 흑칠을 하고 상판의 중앙에는 朱漆을 했다.
상판의 뒷면에는 ‘신사 큰젼 고간대듕 소십오듁(*아래 ‘아’로 표기)’이라고
새겨있어 辛巳年인 高宗 18년(1881) 大殿 곳간으로 납품된 대∙중∙소반
150벌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158) 주칠합(朱漆盒)
왕실에서 사용하던 목제 주칠합으로 朱漆을 하고 뚜껑 상단에는 금색의 龍으로 장식했다.
주칠은 일반 私家에서는 사용을 규제할 정도로 귀하게 여겼으며 주로 왕실에서 사용하였다.
(159) 은으로 만든 솥[銀釜]
뚜껑을 갖춘 銀으로 만든 솥으로 銀板을 두들겨 솥의 형태를 잡았는데 은으로 만든 器物은
주로 왕실에서 사용되었다.
‘盖具 四百八十二兩 重(개구 사백팔십이량 중)’이라는 銘文을 새겼다. (*盖: 덮을 개)
*냥(兩): 10돈이 1냥이며, 16냥이 1근(斤), 1돈쭝은 3.7301g임으로 1냥은 약
37.3g이다.
*銀은 毒劇物과 반응하면 색이 변하므로 毒殺 예방의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160) 궁중에서 사용한 여러 가지 그릇
(161) 궁중에서 사용한 여러 가지 그릇
(162) 궁중에서 사용한 여러 가지 그릇
(163) 왕실 문방구(文房具), 벼루-붓[毛筆]-필통-붓걸이-벼루-연적(硯滴) 들 사진
*‘문방(文房)’은 책을 일고 글을 쓰며 사색하는 공간인 書齋를 말하며 文房에 갖추어 놓는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연)] 등 필기구를 文房具[文房四友, 文房四寶]라고 했다.
學問을 崇尙하는 儒敎社會에서 문방구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였으며,
‘文房淸玩(문방청완)’이라 하여 문방에서 香을 피우고 밝은 창, 깨끗한 책상 앞에서는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든 좋은 문방구를 완상(玩賞)한다는 말과 같이 좋은 문방구는
鑑賞의 대상으로도 여겼다.
문방구는 필기도구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工藝品이었다.
(164) 해돋이 목단무늬 붓걸이
(165) 모필(毛筆)-필통(筆筒)
(166) 벼루. 용연(龍硯) –동천연(冬天硯)-동학연(洞壑硯)
(167) 연적(硯滴).
백자(白磁) 해태모양 연적-백자 물고기모양 연적-백자 청화산수문 연적-
백자 사자모양 연적-백자 무릎모양 연적
(168) 왕실 문방구. 비단 바른 장-등잔-책상-붓-필통-주칠 벼루 함-사방탁자
(169) 책상[書案]
(170) 붓[毛筆]-필통(筆筒)-주칠 벼루 함[朱漆 硯函]
(171) 등잔(燈盞)
(172) 연 잎 모양 큰 벼루[荷葉 硯]
징니석(澄泥石)으로 제작한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연 잎 모양의 벼루로 몸체는 연 잎
모양으로 彫刻하고, 뚜껑은 나무로 제작하여 윗면에 자개를 붙여 龍 무늬와 구름무늬를
표현하였다.
*澄泥石: 平北 鴨綠江 邊 위원(渭原) 지방에서 나는 돌.
(173) 王室의 儀禮, 五禮
조선왕조 의식의 핵심을 이루는 五禮로 吉禮[祭祀], 嘉禮[婚姻 등], 凶禮[장례 등),
賓禮[使臣 접대 등), 軍禮[군사 훈련 등]이다.
(174) 왕실의 길례(吉禮)-가례(嘉禮)
(175) 왕실의 흉례(凶禮)-빈례(賓禮), 군례(軍禮)
(176) 조선왕실의 안태의식(安胎儀式)-태 항아리
조선 왕실은 아이가 태어나면 胎盤을 깨끗이 씻은 뒤 胎 항아리에 넣어 吉地에 묻는
안태의식을 지냈는데, 이를 통해 왕실의 존재감을 알리고 백성들을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胎室은 왕족의 태반을 묻은 石室을 말하며 胎封이라고도 하는데 왕실의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쳐 胎를 묻은 시설이다.
태실은 아기의 태를 최초로 설치한 아기 태실과 아기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기 태실에 추가로 화려한 석물을 치장하여 加封한 가봉 태실로 구분된다.
(177) 純祖의 태실을 그린 그림-태 항아리
*報恩 純祖 胎室 -충북유형문화재 제11호- 충북 報恩郡 俗離山面 寺內里
純祖의 胎를 항아리에 넣어두었던 것을 純祖가 왕위에 오른 후에
왕의 胎室로서 여러 石物을 갖추고 胎室碑를 세웠다.
태실의 형태는 8각의 浮屠 모양으로 주변에는 돌난간이 둘러 있고
앞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을 갖춘 胎室碑 앞면에는
‘主上殿下胎室(주상전하태실)’이라고 새겨 놓았다.
正祖 11년(1787)에 만들었으며 이 때부터 태실이 있는 산을
‘胎峰山’이라 하고 報恩縣을 郡으로 승격시켰다.
태항아리는 1927년 日帝가 昌慶宮으로 옮겨 현재는 碑와 石造物만 남아있다.
(178) 제13대왕 명종의 태실[明宗胎室]
明宗은 中宗의 둘째 아들로 胎는 中宗 33년(1538)에 安葬되고, 왕위에 오른 明宗 1년(1546)
胎室을 加封하고 비석을 세웠으나 碑가 훼손되어 肅宗 때 加封碑를 다시 세웠다.
명종의 태실은 가봉한 태실 중에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이 태실은
충남 瑞山에 있는 胎室을 3/4로 축소 複製한 것이다.
*明宗大王胎室 및 碑 -충남유형문화재 제121호-충남 瑞山市 雲山面 泰封里.
胎室은 받침돌 위에 태를 넣은 둥근 몸돌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바깥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碑는 3基로, 오른쪽 비는 태실을 만들 때 세운 것이며, 왼쪽의 비는
王子殿下의 胎室碑, 肅宗 31년(1711)에 세운 가운데 碑는 主上殿下의 태실비로,
거북받침 위에 碑身을 올리고 용을 새긴 螭首[머릿돌]를 얹었다.
(179) 명종의 태실 구조
(180) 조선왕실의 國葬節次
(181) 상장(喪葬). 1938년경.
喪葬은 李王職 禮式課에서 齋官들을 講習하면서 작성한 강의록으로 喪事와 葬事에 관한
절차와 필요한 물품 등을 기록한 책이다.
(182) 고종 비 명성황후 금책(高宗 妃 明成皇后 金冊)
光武 1년(1897) 大韓帝國을 선포하면서 이미 昇遐한 明王成后를 皇后로 追尊하면서
金寶와 함께 황제국의 格에 맞추어 金으로 제작하였다.
(183)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조선시대에 王과 王妃의 國葬을 치른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奎章閣 藏書閣과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84) 朝鮮王陵
(185) 명성황후 홍릉 석의 중수 도감의궤 -보물 제1901-3호-
明成皇后 洪陵 石儀 重修 都監儀軌는 명성황후의 홍릉 石物을 수리한 과정을 기록한
儀軌로 光武 2년(1898) 2월 都監 설치부터 광무 4년(1900) 5월 준공 때까지 2년동안의
과정을 기록하였다.
(186) 온릉지(溫陵誌)
中宗 妃 端敬王后 愼氏와 그의 능인 溫陵에 대한 陵誌를 20세기 전반 李王職에서 옮겨적은
책으로 陵寢의 관리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端敬王后: 1506년 中宗反正으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그의 아버지 愼守勤이 反正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廢黜되었다가 英祖 15년(1739)에 復位되었다.
(187) 소령원에 대한 원지[昭寧園誌], 20세기
肅宗의 後宮이며 英祖의 生母 淑嬪 崔氏의 묘지인 昭寧園에 대한 기록으로 숙빈 최씨의
追崇 과정과 연혁, 소령원의 부속건물, 英祖의 傳敎, 祭享 別 祭儀와 祭文 등
공식적인 기사를 담고 있다.
*坡州 昭寧園 -사적 제358호-
1718년 49세로 타계하여 英祖 원년1724) 漢陽 宮井洞 七宮에 모친 祠堂을 지어
淑嬪廟라 하고, 영조 20년(1744) 毓祥廟로, 영조 29년(1753) 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
(*毓: 기를 육)
묘소는1744년 昭寧墓라고 했다가 1753년 昭寧園으로 승격시키고, 墓碑는 1744년
영조가 친히 썼다.
祠堂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和敬의 시호를 올렸으며,
후에 徽德安純綏福의 존호를 더하였다.
(188) 淑嬪 崔氏의 묘소 소령원 어막에 걸었던 현판
英祖가 직접 짓고 써서 昭寧園 御幕에 걸었던 현판이다.
*御幕: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치는 장막.
(189) 근정전에서 열린 잔치의 즐거움을 쓴 현판[勤政殿 進餐日 識喜懸板]
경복궁 勤政殿에서 열렸던 高宗의 41세 생신과 卽位 30주년 축하잔치 때 당시
王世子 純宗이 잔치의 즐거움을 쓴 詩로 만든 현판이다.
*임금의 글씨는 ‘御筆’이라 하고 왕세자가 쓴 글씨는 ‘睿筆’이라고 한다. (*睿: 슬기 예)
(190) 尊號를 올리는 의식
(191) 기로소(耆老所) 관리들의 명단을 적은 현판
*耆老所: 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文臣을 禮遇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192) 나라의 安危를 책임지다. 조선의 軍禮
(193) 조선시대의 軍事制度
(194) <壯禦營> 현판
壯禦營은 조선 후기 首都方位를 담당하던 中央軍으로 高宗 18년(1881) 12월 중앙의
5軍營 체제를 2군영 체제로 개편하면서 摠戎廳·禁衛營·御營廳을 통합하여 설치하였다.
編制는 전통적 방법대로 대장·中軍·左右別軍·哨軍으로 했으며 고종 19년(1882)
5군영 체제가 회복되면서 폐지되었다.
(195) 부츠의 조선의 무기와 갑옷-병학지남(兵學指南)
=1934년 미국 宣敎師 존 레슬리 부츠(J.L. Boots)가 쓴 <조선시대 武器類에 대한 연구서
(Korean arms and armor)>로 우리나라의 박물관에 소장된 전통 군사유물은
부츠 개인의 소장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어디에도 조선시대의 군사 유물을
연구하는 학자는 없었다고 한다.
=兵學指南: 1787년에 간행된 조선 시대의 軍人 敎鍊書.
明 나라 장군 戚繼光의 <紀效新書> (18) 중에서 군대의 調練에 필요한 것만을
간추린 것으로, 正祖 11년(1787) 王命으로 편찬하였다.
내용은 기고정법(旗鼓定法)·기고총결(旗鼓摠決)·영진정구(營陣正彀)·영진총도(營陣摠圖)·
장조정식(場操程式)·성조정식(城操程式)·수조정식(水操程式) 등으로 권1∼2는
한글로 번역되어 있으며, 옛 군대 훈련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96) 휴대용 화기[小銃筒]-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소총통(小銃筒) -보물 제856호- 국립고궁박물관 所藏.
소총통은 導火線에 손으로 불을 붙이는 휴대용 火器의 일종으로 전체 길이 75.5㎝,
지름 1.6㎝로 조선 선조 때 만들었다.
勝字銃筒에서 進展된 형식으로 승자총통보다 길고 대나무와 같은 마디가 고르게
연결되어 있으며 총신은 약간 구부러져 있어 발사과정에서 탄환이 힘을 받아 더 멀리
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총신이 길어 火氣가 새지 않고 彈丸이 명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제작 연대와 화약의 용량, 製作者를 알 수 있으며, 보존상태도
완전하여 火砲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보물 제860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선 宣祖 때 軍器寺의 火砲匠 李長孫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는 人馬殺傷用 폭탄으로
조선 중기에 사용되었으며, 지름 21㎝, 둘레 68㎝로 導火線을 감는 木谷, 목곡이
들어가는 竹筒, 얇은 철 조각, 뚜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면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고 내부는 화약과 얇은 철 조각들로 裝塡하게 되어 있으며,
火砲 의 일종인 완구(碗口)를 이용하여 발사되며 임진왜란 때 慶州 府尹 朴毅長이
사용하여 慶州城을 탈환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비격진천뢰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아 문헌과
비교 연구할 수 있는 國防科學技術 문화재로 평가되며, 火砲 연구와 彈丸 發展史에 대한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다.
(197) 총구가 3개인 연발총[三穴銃]
조선 후기에 길이가 짧은 3개의 銃열을 한데 묶어 연속 발사할 수 있도록 만든
소형화기로 三眼銃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人馬殺傷用으로 사용되었으나 命中率이 낮은데다 鳥銃이 보급되어 주로
信號用으로 사용되었다.
(198) 불랑기(佛狼機) 5호,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불랑기(佛狼機)’ 는 화포의 명칭이 아니라 '포르투갈'이란 나라 이름이다.
중국 명나라 武宗 때(1506-1521) 廣東省에 출현했던 포르투갈 艦船에 비치되었던
이 화포는 銅으로 鑄造되었으며, 길이 5~6척(1.5-1.8m), 무게는 큰 것은 천여 근,
작은 것은 50여근, 射距離는 약 3km에 달하였다.
구조상의 가장 큰 특징은, 火砲[母銃)에 큰 구멍이 있고, 그 속에 小銃[子銃] 다섯 개를
번갈아 가면서 한 개씩 삽입하여 돌아가면서 사격할 수 있게 제조 되었다.
(199) 작은 포[小砲],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소장-
興宣大院君 李昰應이 丙寅洋擾(1866년)와 辛未洋擾(1871년)를 겪은 뒤 火砲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小砲∙中砲∙大砲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 포는 두개 의 바퀴 달린 砲架 위에 설치하여 목표물을 자유롭게 照準하여
발사 할 수 있었다.
小砲二百八十斤 火藥一斤(소포이백팔십근 화약일근)/同治十三年五月日 雲峴宮別鑄
(동치십삼년오월일 운현관별주)"라는 銘文이 있어 高宗 11년(1874) 雲峴宮에서 주조된
청동제 전장식 화포임을 알 수 있다.
(200) 금영의 네 문과 중앙에 세운 군기
*금위영[禁衛營]/금영(禁營)
조선후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하여 중앙에 설치되었던 軍營이다.
五軍營 가운데 하나로 訓鍊都監, 御營廳과 함께 국왕의 호위와 수도 방어의 핵심
軍營으로 초기에는 병조판서가 금위영 대장을 겸직하다가 英祖 30년(1754)독립된
군영이 되었다.
금위영은 高宗 18년(1861) 壯禦營으로 통합되었다가 고종 32년(1895)에 革罷되었다.
-景福34회 제57차 문화답사(5); 國立古宮博物館 상설전시실(4)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