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선과 화엄, 그리고 대승 사상
대승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반야중관사상, 유식 사상, 그리고 여래장 사상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셋을 어우르는 큰 사상이 있으니, 선과 화엄입니다. 선과 화엄 사상에는 대승의 세 가지 큰 흐름이 모두 들어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세 가지 사상을 하나로 모으는 사상, 즉 '본래성불'이란 가르침으로 회귀됩니다. 선과 화엄은 모두 '본래성불'을 극명하게 강조합니다.
너희들은 본래 부처다! 따라서 그 사실을 알기만 하면 그대로 너희는 부처가 된다! 그 사실을 모르니까 자꾸 어리석은 범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 그 사실을 알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로 바뀐다! 그러니 이 사실을 어서 빨리 알아라! 그래서 어두운 범부의 삶을 버리고 부처로 살아가라! 이 사실만 알면 되는 거지 더 닦을 필요도 없다! 바로 이 자리, 지금 부처로 당장 살아가라! 선과 화엄은 모두 이렇게 가르칩니다
따라서 선과 화엄은 모두 돈교(頓敎)입니다. 또 선과 화엄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화엄 학자들은 곧잘 선과 화엄의 관계를 강조하였고, 또한 선사들 역시 화엄경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특히 육조선은 선과 화엄이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육조선은 마음 자리를 바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화엄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통해 마음 자리로 들어가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을 일관하는 특징인데, 화엄은 언제나 '구체적 현실'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들어가게 합니다.
그 반면 선은 그런 것조차 없이 바로 우리 마음을 드러내게 합니다. 그러니 직지인심이요, 언하변오인 것입니다.
정리하면, 선이 말없음으로 말 없는 자리를 들어가는 것이라면, 화엄은 말 있음으로 말 없는 자리를 들어갑니다. 또 선은 무형상(無形象)으로 몰형상(沒形象)의 자리를 가르치는 것이라면, 화엄은 형상으로 몰형상의 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은 진리 세계를 ‘보는데(見性)’ 주력하고 화엄은 이러한 세계를 ‘묘사’하는데 치중하는 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선은 실천적 면이 강하고, 화엄은 어찌 보면 이론적 면이 강하다 할 것입니다.
선은 체계적인 이론이나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진리 세계와 대면(頓悟)하게 하는 반면, 화엄은 직접적 대면 대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자세한 이론과 설명을 통해 진리를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곧바로 체험하는 데는 선이 뛰어나지만 이론이 부족한 문제가 있고, 화엄은 이론은 뛰어나지만 실천적 면이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이론에 비해 실천적 측면이 부족한 화엄의 문제점은 나중에 보현의 행원이 ‘보현행원품’에서 열 가지 형태(십종행원)로 정리됨으로써 완벽히 해결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선과 화엄은 둘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선종의 승찬대사나 임제, 벽안 선사 같은 분들의 법문에는 화엄경의 인용을 자주 볼 수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도 보조국사나 설잠 김 시습 같은 선사들의 경우 화엄과 선을 불이의 경지에서 다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물론 원오극근같이 화엄을 비판한 선사도 계십니다).
선과 화엄이 이렇게 근본적으로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선은 그 발달 과정에서 약간의 변형을 겪게 됩니다. 전통적인 달마 이래의 육조선은 ‘바로 깨우쳐 주는 선’의 형태를 가집니다. 즉 스승이 제자에게 진리 세계를 바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하변오요 언하대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송나라 시대에 와서는 그렇지 못하게 됩니다. 즉 진리 세계를 바로 보여 주지 못하고 중간에 하나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것이 ‘화두’입니다. 육조선이 바로 진리와 대면하게 하는데 반해, 간화선은 화두를 강력히 참구함으로써 비로서 진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시대 배경 때문으로 보이는데, 송대에 와서는 선이 점점 희론으로 흐르고 문자선으로 변하게 된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선지식이신 대혜선사께서 하나의 방편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화두입니다. 꽉 막힌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희론을 방지하며 수행자들의 큰 발심이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진리 세계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간화선에서는 예기치 못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에게나 전개되던 진리 세계가, 이제는 화두 타파를 하지 못하면 가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즉 조건이 생긴 것입니다.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화두 자체를 간절히 들기가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이유로 말 한 마디에 바로 깨닫던(言下大悟)하던 육조선과 달리,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제대로 들지 못하면 진리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의심하고 믿고 분발하여 화두를 타파해야만 진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과 보현행원이 갈라집니다.
보현행원은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보현행원에서는 공경하고 찬탄할 때, 우리는 누구든 바로 부처님 무량공덕 세계로 들어갑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부처님 진리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보현행원입니다. 잘났든 못 났든 의심이 일든 일지 않든 믿음이 있든 없든 보현행원을 할 때 진리 세계는 그대로 열려 버리고 우리는 그 속으로 힘차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과 화엄, 그리고 보현행원이 같으면서도 다른 점입니다.
普賢合掌
첫댓글 큰 가르침 고맙고 고맙습니다. 다시 공부하고 갑니다...오늘도 밝은 마음으로 맑은 몸씀, 마음씀, 말씀으로 고잘미섬공....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선과 화엄, 보현행원 진제스님께서 계시는 해운정사가 가까이 있어 가끔 예불을 다녀옵니다. 아직 스님 법문을 들을 기회를 얻지 못해 아쉬운데, 남 진제 라고 하시니 대단한 법문을 하시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선으로 다져진 보살님들의 모습에 보현행원이 더해 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