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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2월2일(일)맑음
그대는 그 어떤 말로서도 규정될 수 없는 X이다. 시간이란 맷돌이 우주를 갈아서 먼지로 만든다 해도 X는 절멸하지 않는다. X는 緣生緣滅연생연멸하기 때문이다. 연생연멸은 무효화될 수 없는 正理다. X는 생과 사, 유와 무를 왔다 갔다 하는 자유자재이다. 그것은 가장 크고 넓고 깊은 놀이, 우주적인 유희다. 절대적으로 무규정적인 空解脫(텅 빈 자유)이 바로 이 세계 속으로, 이 역사 속으로 들어온 X가 바로 그대이다. 그대는 X다. 그것은 미지수이지만 경우에 따라 解가 되었다가, 다시 미지로 돌아간다. 당신은 미지수이면서 답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살아 있는 이것을 대체 무엇이라 해야 할까? 존재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존재할 이유 없이도 살 수 있다. 돌은 돌대로 풀은 풀대로 자기 존재의 이유나 변명을 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에 주어진 대로 있을 뿐이다. 인간도 그렇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재주껏 우주를 굴리고 있을 뿐이다. 당신은 우주가 낳은 아이다. 당신은 우주의 꽃이다.
2020년2월3일(월)맑음
<불국기> 다정 김규현 역주-를 완독하다.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권오민 지음-을 읽다.
보살은 사바세계라는 전쟁터에서 ‘서원의 갑옷(誓鎧)’ 으로 무장한 전사이다. 사바세계에서 보살행을 닦을 때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오로지 서원이라는 갑옷뿐이기 때문이다.
2020년2월4일(화)맑음
하산거사, 연경보살과 함께 부산 대변항, 일광을 거쳐 진주로 돌아오다.
우한에 계신 밍센선사에게서 입춘 카톡이 오다.
黃梅花已開, 勇士盼歸來.
今日立春
在爲武漢祈福的鐘聲中,
寺中黃梅如是地盛開了;
黃梅旣已開放, 櫻花還會遠嗎!
황매(시절인연)는 이미 피었으니, 용감한(勇) 보살(士)은 (본래의 자리로)돌아가길 바란다.
오늘은 입춘
종소리 울리며 우한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노라
사중에 황매는 여느 때처럼 가득히 피었구나,
황매가 이미 피었으니, 벚꽃은 멀지 않으리!
초당, 리화, 은하와 함께 공양하며 환담 나누다.
2020년2월5일(수)맑음
인간은 타고난 탐구열과 모험심 덕분에 태양계를 탐색하고 태양계 너머 은하계, 은하계 그 너머까지 탐사선을 보내고, 수퍼 수퍼 최신 전파망원경으로 우주의 깊은 곳에서 오는, 혹은 올지도 모르는 정보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러나 혹자는 지구가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지구인의 문제를 해결해도 모자랄 판인데 당장에 유용하지도 않은 외계탐사에 자원을 유용할 필요가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류는 지구에 갇혀 지구자원을 서로 얼마나 더 빨리 더 많이 써버리고 황폐하게 만들까라는 치킨게임을 벌이는 셈이다.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산다하더라도 눈은 우주 그 너머를 바라보며 꿈의 날개를 달고 날아가야 한다. 인간은 지구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로 열려있다. 인간의 고향은 지구이기도 하지만 지구의 모태는 우주이다.
교육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학생에 대한 친절이듯 설법자에게 필요한 덕목 역시 친절이다.
2020년2월6일(목)맑음
어제 밤 권오민 교수에게 이메일 보내다.
권교수님, <불교학의 고향, 카수미르와 간다라를 가다> 잘 읽었습니다. 정독하던 중 수정할 부분을 발견하였기에 알려드립니다. 참고해주세요.
218p 조주종념(趙州從念)---------→조주종심(趙州從諗)
234p 밑에서 3째줄...행동거지나 뿐만 아니라--→행동거지뿐만 아니라
247p 위에서 6째줄...험결------------------→흠결
16째줄...험결------------------→흠결
336p 위에서13째줄...증상(增上)-------------→증장(增長)
465p 15 Jeffrey Hopkinns----------------→Jeffrey Hopkins
470p Jeffrey Hopkinns-------------------→Jeffrey Hopkins
아침에 감사하다는 답을 받았다.
<모름의 싱싱함을 음미하라>
1. 알면 안다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른 앎이다. 그런데 ‘안다’는 말과 ‘모른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앎과 모름은 서로 절대모순인가, 아니면 상보적인가? 일단 ‘안다’고 하는 정신적 현상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임의의 대상 X에 대한 앎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살펴보자. 여섯 가지 감각기관(6根)과 여섯 종류의 감각대상(6境)이 접촉하면 대상에 대한 정보(識앎)가 생겨난다. 대상과 접촉한(대상에 반응한) 감각기관의 수용기receptacle에 전기적 신호가 발생하면 그것이 뇌신경회로를 따라 전송되어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를 활성화시켜 거기에 저장된다. 언어(名句)와 이미지(相)로 분류되어 정보로 저장된다. 따라서 다른 때에 임의의 대상 X가 인식될 경우 그전에 저장되었던 기억이 활성화되면서 ‘아, X로구나’라고서 이름과 함께 ‘안다’는 생각이 든다. 즉 과거에 경험된 기억에 비추어 목전의 대상을 확인한다. 눈앞에 있다고 모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것도 주목을 하지 않으면, 주목을 했다하더라도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눈앞에 있지만 그것에 대한 이름도 모르고 기억도 없다면 그것은 있어도 있는 게 아니다. 임의의 대상 X를 ‘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그것이 직접경험이든 간접경험이든 간에-그것을 이전에 경험한 기억이 있어야만 된다. . 눈앞에 나타나 있는 임의의 대상 X는 기억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러면 기억되지 않은 것, 기억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알려질 수 없는가?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도 모르고 그에 대한 기억도 없다면 앎이 일어나지 않는가? 기억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앎을 과연 앎이라 할 수 있는가? 기억이란 안경을 쓰고 보는 현재는 과거의 재구성일 뿐인데, 무슨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것인가? 기억으로 대상을 완전히 포착할 수는 없다. 이미 알았던 것에 비추어 새것을 짐작, 예단할 수는 있어도 새것을 완전히 포착할 수는 없다.
2. 대상에 대한 앎이란 기억된 것과 기억되지 않는 것이 중첩된 것이다. 기억된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온고지신溫故知新-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알고, 법고창신法古創新-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말이 있다.
기억에서 나온 것이 아닌 앎, 싱싱한 앎, 날 것 그대로의 대상에 대한 앎은 가능하다.
만해스님은 이렇게 노래한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희랍인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쩌면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눈을 떠서 볼 수 있을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기억에서 나오는 말, 관습으로 굳어져 박제된 말, 금기와 억압으로 왜곡된 말이 아닌 싱싱한 말, 가슴으로 느끼는 살아있는 말, 마음을 깨어나게 하는 말을 창조하는 언어의 달인들이 있다. 그들은 시인이며 문학가이다. 그리고 언어와 사유가 끊어진 심해에서 ‘살아있는 말(活句)’를 건져 올리는 선사와 선지식들이 있다. 그들이 정교하게 세공한 언어로 말미암아 우리는 기성의 세계를 뚫고 무한한 영역으로 나가며, 예리한 칼날 같고 번쩍이는 번개 같은 그들의 말은 우리의 의식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사다리가 된다. 말과 글의 길이 끊어질 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선사는 言語道斷언어도단 以心傳心이심전심이라 하고, 크리슈나무르티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3. 기억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기억이란 장치는 생존에 필요한 방어기제이다.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을 예측하고 그 위험을 대비하여,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관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고자 한다. 그런 과정에서 집단의 기억공유와 과거의 경험에서 습득되고 전승된 지식에서 사회질서와 도덕 관습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집단의 안전과 유지를 위한 제도가 갖춰진다. 또한 인간자신과 대상세계에 대한 지식이 발전하고 축적되어 기술혁신이 일어난다. 이에 인간생활은 더 편리해지고 풍요로워진다. 이것은 기억이 인간생활에 가져온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기억에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 기억은 경험된 것을 기호와 이미지, 언어와 문자로 저장된다. 지금 현재 경험하는 X가 기억된다는 말은 과거에 이미 이전에 경험했던 것의 틀 안에 넣어 X를 짜 맞춘다(이것이 소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는 말이다. 즉 현재경험을 말로 표현하는 즉시 기억이 재현된다. 이는 현재경험이 과거로 번역되는 것이어서 싱싱한 현재는 박제된다. 활발발하고 펄떡이는 잉어를 문자와 언어라는 낚시로 낚아 올리면 이미 죽은 생선이 되어버린다. 싱싱한 맛이 나는 새로운 경험이 문자화, 언어화 되면 그 맛이 상해버린다. 그리고 매사에 그런 식으로 사물을 경험하면 식상해지고 삶이 진부해진다. 그래서 새로움을 찾는 탐험가들은 이미 알려진 세계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탈주한다. 마르코폴로와 마젤란의 후예들은 우주탐사를 위해 보이저를 태양계 밖으로 날려 보냈다. 시인들은 기존의 말이 아닌 말, 아직 말이 되지 않은 말, 새로운 말을 찾는다. 전대미문의 노래와 소리를 찾는 사람이 있다. 언어와 문자의 옷을 입지 않은 새로운 견문각지를 찾는 사람도 있다. 그는 철학자이며 구도자이다.
4. 모름을 존중하라.
‘알았다!’는 오만으로 미지의 바다에서 이제 막 올라온 싱싱한 현재순간을 더럽히지 말라.
미지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라. 그러면 미지가 저절로 제 모습을 드러내리라. 미지에 대한 무지를 허용하라. 함부로 안다고 하지 말라. 예단하지 말라. 안다고 단정하는 것은 미지에 대한 폭력이다. 미지를 존중하라. 무지를 겸허히 수용하라.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아는 것으로 모르는 것을 덮지 말라.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존중하고 모르는 채로 남겨두라.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거기에서 살 길이 열린다. 안다고 할 때 앎에 사로잡혀 앎에 갇힌다. 그러면 앎의 범위를 넘어선 대상과 영역에 대해서 불안과 공포, 무관심과 냉담, 부인과 혐오가 일어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왜 불안해하는가? 왜 모르는 채로 두지 못하는가? 에고는 미지를 미지로 내버려두지 못한다. 에고에겐 미지의 대상은 불안하며 불편하다. 그러기에 에고의 旣知기지 속으로 미지를 빨리 집어넣으려 한다. 앎에 대한 에고의 욕망은 세상을 다 삼키고도 남는다. 에고의 앎은 욕망에 기인한 앎이기에 끊임없는 욕구불만에 시달린다. 에고의 앎은 불완전하기에 불안하다. 에고의 앎은 무명(빛이 없음, 어둠)이며 소지장(앎이라는 장애)이다. 에고여, 앎에 욕망을 내려놓고, 말이 흘러가는 강에서 헤엄쳐 나오라. 에고여, 모른다고 고백하고 겸손 하라. 기지로 미지를 호도하지 말라. 아는 것을 주장하는 자는 누구인가? 앎을 주장하는 그 놈이 바로 에고이다. 모든 앎은 에고의 조작이며 견해의 집착이다. 기억과 旣知기지, 기존과 기성에 대한 집착이 에고이다.
모름을 존중하라. 그대는 누구냐? 모른다. 불식不識. 나도 나를 알지 못하노라고 달마대사가 말했다. 단지불회但知不會면, 시즉견성是卽見性이라. 다만 모를 줄만 알면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고 보조선사가 말씀하셨다. 모름을 존중하라. 미지를 앎의 울타리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말라. 독수리를 닭장 안으로 끌고 들어와 길들이려는 짓이다. 학의 다리 길다고 자르지 말고, 거북이 목이 짧다고 잡아당겨 늘어뜨리려 하지 말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봄이 오면 풀은 절로 푸르고, 물 흘러 꽃이 핀다.
2020년2월8일(토)맑음
오늘 정월대보름날. 독송법회하고 선학산 산책하다.
<안도현 시와 바라밀>
1. 보시바라밀-<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고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인욕바라밀-<안도현, 나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뺨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리저리 머리채를 잡힌 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는 것을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훗날 이 세상을 나무의 퍼덕거림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 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 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쳐주며
나무는 버틴다.
인생을 살아가는 힘은 견딤에서 온다. -정호승
2020년2월9일(일)맑음
하산거사, 연경, 현정과 함께 마산 소극장에서 영화 <카잔차키스>를 보다.
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것이 크레타 섬에 있는 그의 묘비명이다.
그러나 그는 소위 ‘자유’라는 관념에 갇혔다. 그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는 것이지 진정 자유를 찾은 것은 아니다. 왜? 세상에 대한 여한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2020년2월11일(화)흐림
앎과 모름은 절대모순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다. ‘안다’와 ‘모른다.’는 연기적 관계이다. ‘안다’와 ‘모른다.’는 동시에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정신적 현상이다. ‘안다’고 할 때 그 ‘안다’는 것 이외는 모른다는 말을 의미한다. 아는 것만 알 뿐, 그 아는 것의 밖에 대하여는 모른다는 말이다. 꽃을 꽃이라 할 때 ‘꽃’이란 말의 주술에 걸려 꽃 밖에는 어떤 것도 아니게 제한된다. 우리가 꽃을 꽃이라고만 한다면 꽃은 꽃이 아닐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고 꽃으로만 있어야 한다. 이것은 꽃을 꽃으로만 있게 하려는 강압적 구속이다. 왜 꽃을 꼭 꽃이라고 해야 하는가? 사회적 약속으로서 꽃을 꽃이라 이름 붙이면 다른 것과 구별하여 꽃을 꽃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색깔이 바래지고 모양이 허물어져 관상용이나 장식용으로서 효용이 떨어진 꽃은 버려져서 쓰레기로 변한다. 꽃은 꽃으로 쓰이다가 꽃이 아니게 변한다. 본래 꽃이 아니었던 것이 어느 순간 꽃으로 나타나 꽃이라 이름 붙여졌다가 이내 꽃의 구실을 못하게 되면서 ‘꽃-아닌 것’으로 돌아간다. 본래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어떤 것이 되었다가 이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간다. 조건에 의한 발생과 소멸의 법칙 즉, 緣起法연기법이다. 인간의 생사거래와 우주의 생성소멸이 그렇다. 앎을 받아드릴 때 모름도 함께 한 쌍으로 딸려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 相隨來상수래-서로 따라온다. 삶을 즐거워 할 때 삶속에 이미 죽음이 끼어있음을 잊지 말라. 탄생은 사망과 함께 발생한다.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고통과 쾌락은 共命鳥공명조이다. 한 몸에 머리가 둘 달린 새가 날아간다.
대혜종고 선사가 어느 날 무구거사(無垢居士) 장구성(張九成)의 아버지 재를 경산사에서 지낼 때 하신 영가 법문-
신비궁일발 神臂弓一發,
사파천중갑 射破千重甲;
자세염래간 仔細拈來看,
당심취피말 當甚臭皮襪.
신비한 팔로 잡은 화살 하나
천 겹의 갑옷을 뚫나니
영가여, 자세히 살피소서.
다만 냄새나는 버선 같음을
선사 나이 75세(1163년) 조금 앓다가 8월 9일 대중을 모아놓고 “나는 오늘 가리라.” 하고 다음과 같이 마지막 법문을 하였다.
생야지임마 生也只任麽,
사야지임마 死也只任麽;
유게여무게 有偈與無偈,
시심마숙대 是甚麽熟大.
生이란 다만 이와 같고
死란 다만 이와 같다,
말 있음과 말 없음이여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첫댓글 진리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구분없음, 분별없음, 경계의 무의미..그래서 모두는 그냥 x 입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지는 순간순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