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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이나 저물녘이면 섬진강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내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날씨가 화창하거나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함박눈이 내려도 그는 언제나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형제봉과 구재봉에 오른다. 섬진강의 목격자이자 증언자다. 착한 초식동물인 고라니처럼 커다란 두 눈을 껌벅이며 꽃이 피면 꽃을 따라가고, 철새가 날아들면 철새들의 안부를 묻는다. 봄의 전령인 섬진강 황어와 보리은어에게도 말을 걸고, 온갖 야생화와 매화에게도 ‘꽃 앞에 무릎을 꿇고’ 말을 건다. 그리하여 마침내 화답하는 그들의 말씀을 또박또박 받아 적은 뒤 세상 사람들에게 사진과 시로 감동적인 ‘섬진강 편지’를 보낸다.
“백운산과 지리산이 섬진강에 발목을 적시고 환한 햇살이 그 강물에 내려 반짝이는 모습을 청매실농원 매화 그늘에 앉아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절로 눈이 감기고 마음이 순해져 꽃이 꽃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니 가만 들어보면 여기저기 봄소식을 전하는 꽃들의 소리가 들린다. 굳이 시인묵객이 아니라도 여기 오면 마음 깊이서 솟구치는 영혼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리라-.”
이처럼 한마디로 얘기하면 ‘앞산 꽃이 뒷산 꽃 부르는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시인이자 야생화 사진작가인 김인호(54)씨. 오십대 중반의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 잘 생긴 그는 가히 모델급 쾌남아다. 문단의 미남으로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과 시인 장석남씨가 자주 거론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들에게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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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생화가 있으면 전국 어디라도달려가는 김인호 섬진강 시인이 야생화 촬영을 하고 있다.
- 순천작가회의 회장으로 활동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시집 <땅끝에서 온 편지>와 <섬진강 편지>를 펴낸 바 있으며, 백두산과 한라산 등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찍은 야생화 사진에 자신의 창작시를 곁들여 펴낸 포토포엠 <꽃 앞에 무릎을 꿇다>(2008)로 눈길을 끌었다. 한국작가회의 소속 문인으로 순천작가회의 회장과 야생화클럽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다음 카페 ‘섬진강 편지’를 운영하고 있다.
그를 하동장터의 국밥집 ‘청학동’에서 만났다. 이미 오래전부터 문단 선후배로 지내왔지만 모두들 왁자지껄한 행사장 뒤풀이 등에서만 만나다 이렇게 오붓하게 선술집에 만나니 새로웠다. 사실 뭐 ‘같은 업자’끼리 인터뷰라는 형식도 어색했다. 서로 근황을 주고받으며 돼지국밥에 소주 한 잔을 걸치다 근처의 술집인 하동포커스 편집장 장성춘씨의 ‘두루애’로 자리를 옮겼다. ‘지리산 대장’ 김선주씨, ‘고알피엠 여사’와 더불어 2차를 했다.
그런데 김인호 시인의 안색이 내내 어두웠다. 구순의 어머님께서 많이 아프다는 것이다. 요즘 주말마다 서울의 집을 다녀오는데, 치매증상이 심해진 어머니를 두고 오는 게 마음 아프고 또 그런 어머니를 하루 종일 수발하는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의 어두운 얼굴에서 아주 오래된 청상과부 홀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 묻어났다.
“주말 내내 구순 어머니와 전쟁을 치렀어. 지난주부터 감기기운이 있더니 치매기도 심해지고 통 뭘 안 드시네. 뭘 드려도 맛만 보고 고개부터 외로 젓고, 평생 시골 산밭에서 엎드려 살아오신 어머니는 비린 것도, 고기 같은 것도 잘 안 드시지만, 그래도 닭을 푹 고아 드리면 좀 드실라나. 역시 몇 숟가락 뜨는 시늉만 하더니 상을 밀어내는 거야. 돼지갈비도 마찬가지.
아이를 시켜 죽집에 가서 전복죽을 사왔는데도 안 먹으니, 결국 내가 다 먹고 말았네. 과자가 먹고 싶다는 말에 양파링과 바나나킥이 부드럽겠다 싶어 사다 드렸더니 ‘이런 것이 과자다냐!’하고 어린아이처럼 까탈을 부리는 거야. 결국 ‘이것이 과자가 아니면 뭣이다요!’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하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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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인호씨가 한라산에서 찍은 세복수초 군락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 휴우, 문득 아들의 얼굴도 못 알아보는 그런 어머니를 두고 버스를 타고 하동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무거운 마음에 덜컥 와 닿는 불효부모 사후회(不孝父母 死後悔)라는 스마트폰 속의 인터넷 그림 한 장이 가슴을 치더라구. 아무래도 하동으로 모셔야겠어. 마누라에게도 미안하고.”
그의 수척해진 얼굴에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쉽지 않았다. 문득 청상과부로 살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가 떠오르니 동병상련의 그늘이 더 짙어졌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불효막심한 막내였는지,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처럼 그는 사람에게나 꽃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김인호 시인은 지금 하동에서 4년째 홀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기러기아빠다. 그의 직업은 한국남부발전㈜의 홍보다. 33년 전에 한국전력에 입사해 사보 편집 등의 일을 해오다 1990년대 후반에 ‘하동화력발전소’로 자원해 근무하면서 섬진강에 깊이 빠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순천에 살며 ‘미쳐야 미친다’는 듯이 섬진강과 지리산을 들락거렸다. ‘섬진강 편지’ 연작시를 쓰고, 야생화에 조예가 깊던 김해화 시인과 오지의 산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2001년 다시 인천으로 발령이 났다. 생계의 무게에 짓눌려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쓴 ‘섬진강 편지 64- 섬진강을 떠나며’를 보면 그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낯선 발걸음 거두어 주던 사람들
마주칠 때면 눈빛 반짝여 주던 강물
흐르는 땀방울 적셔 주던 바람
철철이 피어 마음 뉘여 주던 꽃무리
낯선 도시 떠돌다 낀 때 씻어내 준
순천, 하동, 구례, 광양 사람들
데미샘에서 갈사포구까지 오백 리 물길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사철바람
산수국, 꽃무릇, 금낭화, 물봉선 꽃무리와
더불어 석삼년, 천백 날 있어
나 이제 어느 거리 떠돌더라도
마음에 난 물길 여울목
징검다리 건너 앞산에 올라
흰물봉선 만날 수 있겠네.
저물면서도
저물면서도
아,
환히 빛나는
그 강 노을빛으로 살아갈 수 있겠네.
이런 마음으로 떠났던 그가 9년 만에 다시 섬진강으로 돌아왔다. 떠나면서 “저물면서도 환히 빛나는 그 강 노을빛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던 그가 차마 못 견디고 마치 운명처럼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동안 주말마다 야생화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이미 몸 속 깊이 들어앉은 섬진강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하지만 섬진강을 떠나 있는 동안 그는 그리움을 달래는 하나의 방편으로 더 열심히 야생화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널리 알려진 야생화클럽에 가입해 백두산과 한라산 등 전국 곳곳으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사실 내가 야생화 사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지리산 물봉선 때문이었어. 물론 그 이전부터 김해화 시인 등과 많이 싸돌아다녔지만, 2000년인가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이라는 단체에서 제6회 풀꽃상을 지리산 물봉선에게 주는 것을 보고 내심 신선한 충격을 받았지. 물론 지리산 물봉선을 잘 지키라는 의미에서 실상사의 도법·수경·연관 스님과 공동수상을 했지.”
섬진강에서 백두산·한라산으로 영역 넓혀가
그랬다. 나는 그 무렵 실상사 지혜방에 살고 있었다. 1999년 칠선계곡과 실상사 인근까지 수몰되는 ‘지리산 댐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지리산이 발칵 뒤집혔다. 그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아골에 한 마리 산짐승처럼 숨죽여 살던 나도 ‘징집’된 것이다. 실상사에 머물며 댐대책위를 꾸리자마자 낙동강 1,300리와 지리산 850리 등 도보순례를 시작하고 ‘지리산 위령제’를 지내는 등의 총괄팀장 역할을 맡고 있을 때였다. 그날의 시상식 장면이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김인호 시인처럼 나 또한 ‘꽃에게 상을 다 주다니?’ 생각하며 감동을 받았다. 말하자면 섣부른 생태주의자를 넘어서는 발상이었다.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을 깨고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뭇 생명의 생명평화’가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동격으로서의 상생과 공생, 이를 통한 생명평화론이 비로소 지리산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김인호 시인도 이때부터 우리나라 곳곳의 야생화를 보는 눈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미학의 자세가 상생의 눈높이로 더욱 더 낮아진 것이다. 그가 펴낸 포토포엠의 제목 <꽃 앞에 무릎을 꿇다>만 봐도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작가의 말’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자못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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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위부터)김인호씨가 찍은 눈 속에 피어난 복수초. / 김인호씨가 찍은 눈 속에 피어난 너도바람꽃. / 김인호씨가 찍은 변산바람꽃. / 김인호씨가 백두산 천지에서 담은 두메양귀비꽃.
- ‘꽃 속에 지나 온 길이 있다./ 꽃 속에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인다./ 꽃 속에 내가 있고 그대가 있다.// 지난 다섯 해,/ 이 산 저 들로 들꽃을 찾아다녔다./ 어떤 때는 일렀고 어떤 때는 늦었다./ 사는 일이 그러하듯 절정일 때를 딱 맞춘다는 일은 어렵다.// 때로는 설악산 십이폭포에 미끄러져 겨우 빠져 나온 적도 있었고/ 동강할미꽃을 만나기 위해서는 로프를 매고 수십 길 벼랑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꽃과 눈을 마주치는 환희의 한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보고자 했던 꽃의 자태보다는 늘 삶의 성찰이 앞선다.// 꽃처럼 맑다는 말, 싱그럽다는 말처럼 나의 삶도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렇게 맑아지고 싱그러워져 꽃의 향기,/ 꽃의 말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선연한 꽃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꽃 같은 그대의 향기,/ 꽃 같은 그대의 말 없는 말까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제 나의 시(詩) 또한 그대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겠다.’
이러한 그의 선언과 자세는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꽃의 눈’을 보고 ‘꽃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꽃의 눈높이’로 마주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명의 원형에 대한 경외감’으로 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보다 더 낮게 엎드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미학의 원리’요, ‘예술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복수초(福壽草)의 우리말은 얼음새꽃이라 하는데, 참 멋지지 않아. 얼음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 그런데 그냥 복수초를 찍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되겠어? 그야말로 엄동설한 눈 속에서 피어나는 상황을 찍어야 얼음새꽃 다운 것이지. 그런데 그게 쉽냐고. 나도 이 꽃을 찍으려고 수년간을 벼르다 변산반도 내소사에서 겨우 찍었어. 서해안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숨 걸고 그 눈길을 미친 듯이 달려갔지. 차암, 애인이 기다려도 그 정도는 아닐 거야. 눈 속에 핀 복수초를 찍겠다는 일념뿐이었지.
날 저무는 내소사의 눈밭 속에서 노란 복수초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야. 가슴이 마구 쾅쾅거리고 눈물이 핑 돌더라구. 그냥 철퍼덕 눈밭에 엎드려 카메라를 든 채 큰절을 한 셈이지. 그러니 야생화 하나하나 찍을 때마다 내게도 사연이 생기고 그 꽃과 나는 한 목숨, 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 그는 당시 찍은 사진에 ‘복수초-때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도 있다’ 라는 시를 한 편 썼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
해는 이울고 길은 멀어 목이 탄다.
눈보라가 다시 몰려오고 길이 희미해진다.
마음은 내처 달리는데 발걸음은
팍팍하기만 하다.
한 구비만 돌아서면 너에게 닿을 것 같은데
길을 가로 막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
생의 길,
붉은 팻말의 길에 몇 번이나 넘나들었을까
주춤대는 마음은 뒤를 돌아보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아니,
때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도 있다.
김인호 시인은 이 시에서처럼 야생화를 찾아다니다 때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 해도 후회하지 않을 세월을 살아왔다. 야생화 사진과 시가 날마다 ‘생명의 운우지정’을 나누는 경지에 깊이 빠진 것이다. 어쩌면 평생 빠져나오지 못할 ‘행복한 고행’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그가 야생화만을 노래한 것은 아니다. 지난해 10월의 마지막 밤에 하동군 금남면의 일자르디노 펜션(구 골망태)에서 열린 ‘힐링 콘서트’의 낭송시 ‘참게 이야기’는 참석자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했다. - 섬진강 매운탕 집 뒤뜰에/ 큰 항아리 가득 참게가 들어 있는데/ 그 항아리 뚜껑이 없어/ 다 도망가지 않을까 물으니/ 걱정 없지요/ 참게란 놈들 참 이상한 동물이어서/ 한 놈이 도망을 가려고 기어오르면/ 밑에 다른 놈들이/ 꼭 그놈 다리를 붙잡아/ 끄집어내려 놓고 말지요/ 아무리/ 뚜껑을 열어놓아도/ 결국 한 놈도 지척인 강으로/ 못 돌아간다는/ 참게 이야기를 듣다가/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그만 섬뜩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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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부터) 1 2001년 범국민적 호응 속에 열린 지리산위령제에 참가한 김인호 시인과 함께 이원규 시인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2 야생화 촬영준비를 하고 있는 김인호 시인. 야생화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바로 달려간다. 3 백두산지까지 야생화 촬영하러 갔다가 천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직장인·작가·남편·아버지 1인4역 거뜬히 해내
마치 아무런 멋도 부리지 않은 야생화처럼 무기교의 시지만, 탐진치 삼독에 빠진 현대인들의 어깨를 내려치는 ‘죽비’가 아닐 수 없다. 소위 문창과 출신들의 현란한 수사의 시가 ‘비닐하우스 속의 향기가 거세된 개량종 장미’라면, 그의 담백한 시는 ‘토종 야생화’로서 단도직입적인 향기를 섬뜩할 정도로 내뿜고 있다. 이는 예술과 생활의 접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떠돌면서도 홀어머니의 효자 아들이자 한 여자의 지아비로서, 그리고 다섯 자식들의 아비이자 33년째 직장인으로서의 역할을 저버리지 않는 건강한 삶의 태도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사실 그는 동년배들보다 많은 자식들이 있다. 1남4녀의 가장이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맏딸과 막내아들 사이에 세쌍둥이 딸이 있다. 직장인으로서 이 자식들을 키우며 작품활동까지 하는 1인3역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크게 내색은 하지 않지만 베이비부머 중에서도 자식부자로서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한때는 직장의 월급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그의 아내와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우유배달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나마 다행이자 자랑스러운 것은 자식들이 모두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란 것이다. 제대로 과외 한 번 안 시켰는데 모두들 공부도 잘했다. 일찍 결혼했으니 어느새 맏딸은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고, 세쌍둥이 딸은 서울대와 연세대를 졸업해 로스쿨과 취업준비 중이고, 막내아들은 항공대에 들어가 ROTC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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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년 10월 31일 하동의 일자르디노 펜션에서 열린 힐링 콘서트에서 김인호 시인이 시낭송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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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이 힘들기는 하지 뭐. 애들 다 취직하고 자리 잡으려면 최소한 3년은 더 죽어라 일해야 해. 그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직장에서 짤리면 안 돼. 그래도 나는 행복해. 애들이 저렇게 잘 자라 주고, 늘 고마운 아내와 많이 아프지만 살아계신 어머니가 있잖아. 그리고 틈틈이 사진기를 들고 섬진강에 나가보고 야생화를 만나니 더 바랄 게 없어. 기러기아빠로 홀아비 생활을 해야 하지만 날마다 이렇게 섬진강을 볼 수 있으니 더없이 좋아. 이제 아이들도 거의 다 컸으니 어머님과 아내를 하동으로 오게 할 생각이야.”
김인호 시인은 지난 몇 년간 열심히 섬진강 사진을 찍었다. 그동안 섬진강은 외로운 기러기아빠의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딸이었다.
그는 “아직 멀었다”며 겸손해하지만 이제 곧 그 결실을 볼 때가 되었다. 덕분에 다음 카페 <섬진강 편지>나 <지리산 학교 & 지리산행복학교>, 그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그의 섬진강 사진과 시와 글을 엿보며 날마다 감동하는 나 또한 더없이 행복하다. 그가 흰얼레지에게 붙여준 ‘내 마음의 발전기, 그대’가 바로 김인호 시인이 아닌가. 섬진강에 물을 마시러 내려온 한 마리 고라니 같은 시인, 이제 누구나 부러워하는 진정한 ‘섬진강 시인’이 되었다.
그가 문득 백수한량의 내게 ‘L 시인에게’라는 시로 쉼표(,)의 안부를 묻는다. 이렇게.
부재중인 그대
휑하니 어느 길 나서셨는가,
바람처럼 내달리다 어느 언덕에서 땀을 닦으시는가,
어둠 속에서 그대 준마의 눈빛으로
꽃을 담고 계시는가,
바람처럼 떠나는 것이야 늘 그대의 몫이지만
너무 오래는 기다리게 하지 말게,
내일은 바람처럼 19번국도 구례 화개 지나와
지리산 자락에 기대어 그댈 기다리는 마음들에게도
선한 웃음 한번 지어주시게나,
첫댓글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이 글을 통해 사생활 일부를 엿볼 수 있어서인지
한층 더 친근감이 드네요.
맑고 조용 하시던 모습뒤에
그런 가족사가 있군요.
감동입니다
고라니 같은 시인....
정말 딱 맞는 표현입니다.
조직사회에서 당신 몫을 다하지만
감히 범접해 쉽게 순화되지 않은 고고함을 가끔 같이 일하며 엿봅니다.
작고 여린 것들에게 주는 눈길,
그게 시인님 정스런 마음인 것도요.
그런 분과 함께 하는 지리산학교에 있다는 게
우리 학교 자랑이지요.^^
네. 정말
감성 풍부한분의 표현이라
아주 적절하게 표현 하시는군요.
감성은 감성돔을 많이
묵으모 저절로 생긴답니다.
역시 감성돔이군요,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감성돔 효과!!
'모델급 쾌남아'에 항의가 많네요. 쾌남아가 다 죽었냐고,,, 가볍게 막걸리 한잔 하자는 이시인 꼬드김에 넘어가 이런 급찬을 받다니 황송합니다. 고라니 같다라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ㅎㅎㅎ 쾌남아는 사실 중의 사실... 고라니 같은 모습이 좀 더 정겨울 뿐입니다, 형.
본문과 덧글들을 쭈~욱 읽다보니 웬지 설레고 벅차고 기분이 묘하네요..
모두들 감동을 조금씩 나눠 가지신 아름다운 공범자 같은 분위기이자 기분인 거 같습니다.
역시 막걸리는 가벼운게 좋은 건가봅니다. ㅎㅎㅎ
매서운 칼바람과 동행하며 출근해서 살짜기 들어와 아침부터 감동이네요^6^
감성풍부 감성돔??? 저도 구경해본지 10년은 된 그 감성돔의 추억^^ 동서가 투병중인 제 아내를 위해 낚아왔었지요...
이시인과 김시인님 덕분에 시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 것 같아요.. 그리고 김시인님 순수미남 맞습니다^^
2012년시월의 마지막 밤에 감성이 아름다운 분들과의 만남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