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월급은 쌀 두 가마니가 채 안되었다. 신입 공무원 교육을 하러 온 강사님이 강의 도중 '공무원 월급은 쌀 두 가마니'가 원칙이라고 말했다. 쌀 두가마니의 정체를 모르는채 인천의 ㅇㅇ동사무소에 발령받았다. 출근 첫날 사무장님은 나에게 재형저축을 들어놓으라고 권했다. 말씀대로 쌀 한 가마니를 저축하고 쌀 한가마니로 생활했다.
3년간 저축한 300만원 남짓으로 혼수를 장만하여 1988년에 결혼했다. 장롱 하나에 냉장고, 티브이 외에는 변변한 세간살이도 없이 이불 한 채랑 밥상 하나 달랑 들고 시집을 갔다. 신혼집인 도림동은 당시만 해도 인천의 변두리여서 집값이 쌌다.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4만원인 단칸방이었으니 호화혼수가 뭐 필요했겠는가.
남편도 공무원이어서, 결혼하니 쌀이 네 가마니가 되었다. 앞마당에 감나무가 있던 파란 기와지붕 아래 단칸방을 얻어 이듬해 큰 딸을 낳았다. 눈이 큰 아이는 큰 눈처럼 울기도 잘 울어서 낮이고 밤이고 울었다. 젖도 못 물리고 두 달도 안 되어 출근하니, 기안용지에도 주민등록 색인부에도 아이 생각에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딸아이는 무엇이 서러운지 눈만 뜨면 울었다. 낮에는 외할머니의 품에서, 밤에는 내 품에서 울었다. 소아과 의사의 말로는 '애기가 심장이 약하고 겁이 많다' 고 했다. 바람에 닫히는 문소리에 깨고, 컹컹 짖는 개소리에 울어서, 늘 아기의 가슴을 토닥이거나 업고 재웠다.
어느 날 주인아주머니가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파출소에 다니는 주인아저씨가 밤을 새고 이튿날 귀가하여 잠을 자려면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거다.
얼마 전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 주소 이력 사항을 보았더니, 결혼하고 이사를 한 게 무려 열한 번이었다. 요즘에야 이사업체가 있어서 짐을 싸는 것부터 정리하는 것까지 전부 해결이 되어 그다지 이사에 대한 부담이 덜해지긴 했다. 그래도 한 번 이사를 하게 되면 한 달이고 두 달 전부터 손이 가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30년 전에는 어떠했겠는가.
이사 날짜가 정해지면 한 달 전부터 책이며 세간살이를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책이나 옷은 종이 상자에 차곡차곡 넣으면 되지만,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게 문제였다. 어려운 살림에 장만하여 애지중지하던 액자나 화병을 비롯해서 접시 같은 그릇은 신문지로 싸고 수건으로 싸고도 행여나 흠집이라도 생길까봐 애면글면 이삿짐을 쌌었다. 퇴근 후 아이들을 재우고 혼자서 짐을 꾸리며 밤을 새웠다. 열 하나의 주소들을 들여다보니 사연이 없는 주소가 없다.
단칸방 설움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2년 뒤에 대출을 받아서 작은 아파트를 장만할 때까지 네 번을 이사했다. 그 이후로도 참 많이 이사를 했다. 시골에 계시던 시부모님을 모셔 오고, 둘째 아기도 낳았다. 집이 좁으니 좀 더 큰 아파트를 전세로 살다가, 또 집을 마련하기도 하면서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은 계속 발생했다.
부모의 살아온 내력을 닮아서인지 작년에 큰 아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고, 올해 둘째 아이도 합격을 하여 공무원 가족이 되었다.
친정 엄마는 두 손녀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였다고 동네에서 자랑을 많이 하신다. 어느 날 엄마랑 공원에 갔더니, 할머니들이 '공무원이 네 명이라는 큰 딸이유?'하고 물으신다. 얼떨결에 '네' 하고 대답하는 나에게 할머니들은 '취업이 그렇게 어렵다는데 얼마나 좋수?' 하고 물으시고, 엄마는 옆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손가락 넷을 펼쳐 보이신다.
아이들은 공무원 급여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며 블만이다. 공무원은 노동자가 아니라며 최저 임금 보장도 받지 못한단다. 아이들의 초봉을 따지고 보니 쌀 두가마니의 법칙이 깨졌다. 1985년 쌀 한가마니는 80kg에 약 74,000원으로 두 가마니이면 148,000원이었다. 내가 받은 첫 월급은 134,000이었으니 두 가마니가 채 안 되었다.
30년이 지난 2018년 공무원 초봉은 144만원이다. 쌀 두 가마니에서 일곱 가마니로 늘어났으니 처우가 향상된 건 사실이지만 요즘에야 어디 밥만 먹고 사는 시대인가. 밥값 보다 커피 값이 더 들어가는, 오늘 벌어서 오늘 쓰자는 욜로(You only live once)족들인 걸.
옛날 이야기하면 꼰대 소리 듣지만 가끔 넋두리처럼 말한다. 쌀 네 가마니로 한 달을 살았다. 아이 둘에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택시를 타려면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서 있었다. 또 그 시절엔 두 달 출산 휴가가 끝나면 바로 출근을 해야 해서 아이들에겐 분유를 먹일 수밖에 없었다. 월급봉투를 받으면 쌀은 못 사도 분유부터 사두어야 안심이 되는 애닯은 삶이었다.
주위에서 공무원 부부를 걸아다니는 중소기업이라며 부러워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억장이 무너진다. 사실 아이들의 양육비와 직장생활에 들어가는 경비나 애환을 생각하면 남의 속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다.
아이들 키우며 직장생활 하면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들이었다. 정말 다시 돌아가라하면 나는 못 간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쌀 두 가마니 인생이 일곱 가마니 인생이 되었으니 곳간이 넘치고 넘칠 일이다. 물론 물가 상승이나 쌀의 가치환산이 달라진 요즘이라 차마 아이들에게 말하진 못한다. 다만 내가 살아온 쌀 두가마니의 내력으로 아이들은 조금 더 나은 살림을 꾸려가길 바랄 뿐이다.
첫댓글 요즘 애들 쌀 한 가마니를 20kg으로 알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되네요.
옛날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요즘 공무원 시험은 사법시험 같다는 얘기가 있던데 딸들 잘 키웠어요.
올해가 결혼 30주년이네요. 지났는지 멀었는지 모르지만 축하합니다~
결혼 30주년은 진주혼이라고 합니다.
스님이 사리를 만들 듯..
조개가 진주를 품 듯..
살아온 내력..
감동적인 한 편에 흑백영화네요.. 덕분에 잊고만 있던 그 시절을 떠올려 볼 수 있어 흐뭇합니다...
누구나 돌아보면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영화이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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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에서 벗어나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쌀이 넘쳐나는데 밥을 안 먹어요 ㅎㅎㅎ
숙연~~ 글 앞에서 저는 마냥 부끄러워 집니다.
그리 말씀하시면 저도 부끄럽습니다.
이제 따님 둘다 공무원 ~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