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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여는 말
벌써 한 이레가 지나고 있습니다. 배가 침몰한다는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곧 수습이 될 거라고 안일하게 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절이 지나고, 속보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심상찮은 일이구나 싶었고 이어 곳곳에서 갖가지 소문들이 무성했는데 이것이 엄청난 사고이고 수많은 인명의 피해가 발생한 사고라는 것을 느끼면서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안타까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고는 한 사람의 죽음 정도가 아니라 수백 명의 목숨들이 희생된 우리의 현대사 한 부분으로 기록될 만한 사고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고가 난 뒤 뒤숭숭해지는 여론과 사고의 원인이라든가, 그 수습에 대한 문제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의 본질에 우리가 정확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정황들이 느껴지는 것까지, 그야말로 상황은 오리무중인 채, 엿새가 지나고 이레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들을 잃었을 가족들의 슬픔과 아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그들과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들을 보면서는 우리 겨레의 따뜻한 정서를 읽었지만, 누군가를 필요 이상으로 매도하고, 때로 정치적인 성격까지 보이는 상황전개를 보면서는 견딜 수 없는 혐오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모르지 않으나, 이번 일을 보면서 갖가지 문제점들을 보았고, 그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싶어, 나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으로 이렇게 글머리를 꺼내들었습니다.
둘, 기술문명의 오류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고라고들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좋을 사고이기는 합니다만, 우리의 현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고라고 규정을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것은 현대의 기술문명이 지니고 있는 오류와 결함이 문명 전반에 자리잡고 있고, 그것이 구체적 현실이 될 때 크고 작은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게 된 이후, 모든 도구는 언제나 양날의 칼이었습니다. 효율성과 편리성을 추구하는 도구의 역사는 인간의 지능과 결합하면서 거듭해서 발전을 이루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도구는 효율적이고 편리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잘못 다루어졌을 때에는 언제나 효율성과 편리성보다 더 큰 아픔이나 비극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철기시대가 열려 노동이 보다 쉬워졌지만, 그것이 무기로 사용되었을 때 얼마나 큰 비극이 되었는지는 누구라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고, 이런 도구의 위험성은 처음 도구를 사용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의 사람들을 놓고 보면, 스물에 하나쯤은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보다 편리하게 풀을 썰 수 있는 작두를 사용한 결과였는데, 풀을 먹이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여 작두날에 잘린 것이었고, 예전 평화시장에서 재봉틀을 사용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재봉틀 바늘이 손톱 부분을 뚫는 끔찍한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도구의 오류는 곧 기술문명의 오류를 생각하게 합니다. 자동차를 만들어 먼 길을 보다 쉽게 갈 수 있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만큼 신중하게 운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일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동안 위험을 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편리하다는 사실마저도 잊은 채 운전을 하는 것이 인간 인식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배의 경우 위험은 더 큽니다. 비행기의 경우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여객선 침몰사고는 그 위험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니, 이것은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고가 그동안 안 일어나고 있다가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만큼 도구의 사용에 신중해야 하는데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도구를 다루는 과정에서 위험이 현실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 성찰과 분석의 필요성
사실 이런 사고가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살아온 길지 않은 삶에 있어서도 이 정도의 끔찍한 사고를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인재(人災)라고 하면서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의 끔찍한 일은 기억의 뒤쪽에 묻히고, 다시 안일함이 일상이 되어 타성에 젖은 도구의 사용이 이어집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누구도 그 안일함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사고가 생기면 다시 똑같은 말들을 되풀이하는 것을 누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은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먼저 우리는 기계문명의 오류와 위험에 대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명이라는 것이 언제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 문명의 발달이라는 것이 그만큼 위험한 것이기도 하며, 그렇기 때문에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활용하는 데에는 기능보다 더 중요한 품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기계 앞에서 ‘나는 이 기계를 다룰만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지’를 언제나 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기계를 통해 사업을 하는 이들은 이런 교육을 수시로 실시하여 기계를 정비하듯 사용자들의 긴장상태를 언제나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사고의 원인을 분명하게 분석하여, 그와 같은 사고는 다시 생기지 않도록 철저한 사후처리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사고의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긴장을 하고 조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데, 분석과 대처가 미흡하면 그만큼 사고의 위험성이 커진다는 것은 세살박이 어린 아이들이라도 다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이 문명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큰 틀에서 언제나 살필 줄 아는 인성의 함양이 기초교육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고, 각각의 세밀한 부분에서의 분석과 성찰이 이어질 때 사고의 위험성은 그만큼 적어지고, 사회는 안정될 것이며, 거기서 인간의 보편적 행복과 복지도 말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입니다.
넷, 판단의 오류 가능성에 대하여
사고가 난 뒤 누가 잘못이고,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무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다지 온당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신중해야 하고, 그것을 맡은 이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잘못을 저지른 사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고, 틀림없이 있을 것이지만, 아무튼 그것은 그 일을 해야 할 이들의 몫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판단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이 끔찍한 사고를 현장에서 본 사람이 없습니다. 언론이 전해주는 정황들을 가지고 잘과 잘못을 말합니다.
살면서 보니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확률은 아주 낮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몇 가지 정황만을 가지고 어떤 일인가를 판단하고, 그들을 단죄하는 일은 상황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구나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은 단죄를 할 때 그 단죄를 받는 이들이 받을 상처는 이미 자명하지만, 섣부른 판단으로 그들을 단죄하는 이들은 그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사람은 일단 그 살아있음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살아난 사람들 가운데 선장과 승무원들이 있다는 것, 그들이 먼저 배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놓고는 그들을 두둔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그들이 여론의 단죄를 받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그 이기적 속성 때문에 생명이 연장되는데, 이타적 실천을 한 사람들의 영웅적 행동을 드높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이기적 속성을 포기하지 못하여 살아남은 이들의 비겁함이 영웅적 행동의 맞은편에 두는 것은 바람직한 인식의 배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고에 대해서는 사고를 낸 사람과 회사는 그에 대한 사법적 처리 과정이 남아있고, 국가는 이 사고를 수습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하며, 그 모든 것들을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민들이 올바르게 알 수 있도록 정리하여 조사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 남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 여론에 대하여
이번 사고에 있어서 여론의 흐름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론의 폭력적 성격이라든가, 어떤 정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부풀리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매도하는 식의 여론몰이는 위험한데, 다양한 여론의 형성들이 혼란을 더욱 부추기면서 사고 외적인 파장들이 급속하게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자신의 상식이나 이해로 해석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해석의 오류가 여론의 동의를 얻을 때 일어나는 문제들은 각양각색으로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하거나, 그야말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불행을 일으키는 불씨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비단 세월호 사고에서뿐 아니라, 이런 저런 문제들이 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여론의 형성이 단순하게 언론매체를 통한 정보를 기초로 하던 때와는 달리 다양한 정보들이 떠도는 인터넷과 문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휴대전화까지도 정보의 획득과 전달에 큰 몫을 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낳곤 했는데,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다양한 정보들을 개인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오류나, 감정 부풀리기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는 여론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계속해서 다양한 방법과 방향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하나의 사고가 정확한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 두 번째, 세 번째의 또 다른 크고 작은 문제를 만드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곳인지를 이번 사고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때로 영웅적인 희생자들을 추켜 올리는 경우도 있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이들을 매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특히 매도를 하는 경우에는 그 잔인함이 끔찍할 정도로 심했다는 것도 여론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아니겠는가 싶었습니다.
그 부정적 여론의 형성에 언론의 한계들도 한 몫을 했고, 언론사들 또한 그 여론에 떠밀려 부정적 여론이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보거나 듣지 않은 것에 대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 중 하나인데, 오히려 혼란을 불러일으킬 여지를 둔 수많은 여론들이 형성된 데에는 언론이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지 못한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결과가 이미 절망적인데도 희망을 갖게 하는 식의 보도는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부질없는 희망을 갖고 있다가 그것마저 무너졌을 때 언론이 그 책임을 지지는 않을 것이고, 당사자들이 겪어야 할 후유증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그저 국민의 정서에 기대어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게 한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여섯, 사후처리에 대하여
이번 사고에 있어서 책임의 문제를 말할 때 크게 두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고 선박의 선장을 비롯하여 책임있는 이들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고 후 사고에 대처한 정부 기관이 이 문제를 얼마나 정확하고 정직하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책임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의 문제가 바로 이 책임에 대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일어난 사고를 보면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이후 사고 처리의 과정은 단순하지는 않겠지만 신중을 기해 접근하여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능한 수습의 과정과 결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고라는 것이 안 일어날 수는 없지만, 그런 사고가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고, 이미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모두가 만족할만한 방식으로 수습을 할 수는 없지만, 사고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혼란에 빠졌던 국민정서까지도 아울러 어루만질 수 있도록 되는 것이 국가적 차원의 사고처리 방법일 것입니다.
국민의 대부분은 이번 사고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초현대사회라는 이 시대에 일어난 지극히 후진적인 형태의 사고 앞에서 혼란을 겪으면서도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사후처리는 적어도 이런 정서들을 안고 그런 성숙한 국민적 정서를 담을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정직하게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꼭 하나 짚어야 할 것은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이해(利害) 문제가 사고를 처리, 수습하는 데 작용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사건이나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런 식의 일처리가 적지 않았고, 때로 그런 사고나 사건들을 통해 반사적 이익을 누린 야비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우리가 하나의 거울로 삼아야 할 일이라는 점도 여기서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 새로운 미래를 위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했지만, 딱 꼬집어 사안별로 짚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내가 이 문제를 좀 멀찍이서 관망하는 태도로 보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었다는 점과, 너무도 민감한 문제라서 또 다른 불씨를 남기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아, 지극히 원론적인 문제들만을 다루었습니다.
이번 사고는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것이었습니다. 사고로 죽은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들의 절망적 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 한 부분은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결코 짧지 않은 사고의 처리 과정에서 고통과 함께 혼란스러웠던 깔끔하지 못한 사고처리의 과정들로 또 한 번 아파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나날을 다시 준비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사고를 통해 겪은 아픔과 죽은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보다 성숙한 태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대응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것이 편리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 좋음과 편리의 크기가 큰 것만큼 위험도 크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여 일상적인 순간순간들에서 위기를 읽어낼 줄 아는 기계문명의 관리자들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갖춰야 할 일입니다.
작은 이익을 위해 큰 위험의 여지를 남기는 식의 운영이나 경영은 이제 끝이 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관리감독체계 또한 이쯤에서 새롭게 정비를 하고, 그런 관리감독체계를 제대로 운영하여 다음 사고에서는 안일한 인간의 태도 때문에 안 일어나도 될 사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죽음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아 새로운 미래를 여는 데 한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아있음이 또한 존중받아야 하는 것도 자신이 왜 여기 살아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성찰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 순간의 즐거움이나, 티끌 같은 이익을 위해 성찰의 자리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내일 아침이면 또 해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떠오르는 해의 이름을 ‘새 아침’라고 부를 것입니다. 새 아침에 어울리는 하루를 살아갈 줄 알기 위해서는 오늘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자신의 하루 산 것을 어떤 형식으로든 돌아볼 줄 알 때에 가능하지 않겠는가 싶은데, 세월호의 사고와 그 사고 처리가 오늘 어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더불어 물으며, 길고 어수선한 이야기를 이쯤에서 접고자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첫댓글 사람사는 세상에서
"날마다 좋은 날"일 수 없음이 아프고 슬프네요.
"시티오브 조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릅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결국은 '날마다 좋은 날'일 거예요. 오늘도 새로움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길... 날마다 좋은 날!!! - 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