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곱의 사다리 2022.12 경향잡지 p94-98
또다시 젊은이들이 죽어 갔으니
글_김형태 요한 변호사.
꼭두새벽부터 누가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창을 열어 보니 ‘김영임의 회심곡’입니다. 조선 시대 서산대사가 지었다는 가사에 곡을 붙인 경기민요인데 애절하게 꺾이는 대목이 서도소리 같기도 합니다.
엊그제 소년이던 이가 어느새 백발이 되어 병들어 죽었습니다. 무서운 저승사자가 “팔뚝 같은 쇠사슬로 실낱같은 이 내 목을 한번 잡아 끌어내니 혼비백산 나 죽겠네.” 망자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절로 나옵니다. 망자는 애걸합니다. “사자님아 내 말 듣소 시장한데 점심 잡수 신발이나 고쳐 신고 노잣돈 가져가세.” 만단개유 애걸한들 사자가 들어줄 리 없습니다. 망자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애고 답답 설운지고 이를 어찌하잔 말고...… 옛 노인의 말 들으니 저승길이 머다더니 오늘 내가 당하여는 대문 밖이 저승이다...… 애욕하고 고생하며 알뜰살뜰 모은 전량 먹고 가며 쓰고 가나 세상일은 다 허사다.”
이윽고 열나흘 만에 저승에 도달하여 심판대에 섰습니다. 판관이 문서 잡고 묻습니다. “배고픈 이 밥을 주어 기사제 하였느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선심 하였느냐. 좋은 터에 원을 지어 행인구제 하였느냐.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 하였느냐.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공덕 하였느냐,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 하였느냐.”
나는 이 대목을 들으며 성경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심판 날 사람의 아들 오른쪽에 서게 된 이들이 판관이신 임금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임금께서 이리 답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7-40).
회심곡과 성경의 최후 심판 대목이 어쩌면 이리 똑같을까요. 서산대사가 성경책을 보았을 리 만무하고 하지만 옳은 가르침은 하나이지 둘일 수가 없겠지요.
실낱같은 목이 팔뚝 같은 쇠사슬에 매여 끌려가며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이라 한탄하는 백발노인도 아니고,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또 150여 명이나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저승까지 갈 것도 없이 이승이 바로 지옥입니다.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공군의 날 곡예비행을 보려고 한강 옆 언덕에 엄마 손잡고 올라갔습니다. 엄마 등에는 젖먹이 여동생이 업혀 있었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그냥 떠밀려 다녔습니다. 사람 틈에 꽉 끼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다가 그만 엄마 손을 놓치고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왕왕 우는 나를 어떤 아저씨가 번쩍 들어 가까스로 엄마 곁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그 무서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열나흘 걸린다는 저승길을 지금 우리 청춘들이 허위허위 가고 있을까. ‘저승’이나 ‘심판’은 하나의 비유이니 회심곡의 생생한 사후 묘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그래도 참 슬픕니다.
철학자 칸트는 ‘사후 세계의 존재가 정의를 위한 실천이성의 요청’이라는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만 그런 거창한 저승 심판말고 바로 여기 이승에서의 심판이 꼭 필요해 보입니다. 이 참사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일 말입니다. 대통령이며 법무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정부의 요직에 있는 이들이 판검사 출신이니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 헌법 제10조는 헌법의 고갱이입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가치를 지닙니다. 이 선언을 그냥 듣기 좋은 말, 뻔한 소리로 넘겨서는 안 됩니다. 이 선언은 그저 선언에 그치는 게 아니고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최고 지도 원리이자 하위법들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이에 어긋나는 구석이 있으면 무효가 되는 객관적 강제규범입니다. 모든 헌법 교과서에 그렇게 씌어 있습니다.
그리고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엄숙한 선언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해당합니다. 흉악한 성폭행범이 출소할 때마다 영원히 잡아 가두라는 식으로 온통 난리법석이지만, 그 나쁜 놈도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헌법은 분명히 합니다. 헌법이 예수님, 부처님 소리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 부처님 말씀은 안 따라도 누가 잡아가지 않지만, 헌법은 명백하게 우리더러 따르라고 법적 강제를 합니다. 존엄과 가치를 지닌 그 '나쁜 놈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사회시스템을 고민하는 것과 그를 영원히 감옥에 처넣으라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젊은이 십 수만 명을 그 좁은 동네 골목길에 모이게 한 핼러윈 축제는 사실 우리 전통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 소통을 그린 영국 켈트족 문화가 가톨릭 위령 성월 첫날인 ‘모든 성인의 날’과 만나면서 생긴 서양 축제이지요. 일부 기성세대는 부화뇌동한다며 우리 젊은이들을 뭐라 하지만 핼러윈축제를 상술로 이용하는 사람들 탓이고, 기성세대 또한 젊었을적에는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난리였지 않나요. 그리스도인도 아닌 우리 아버지도 해마다 이브날에는 고주망태가 되어서 집에 오셨죠. 문제는 거기 모인 젊은이들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권과 행복추구권 보장'이라는 헌법 제10조가 부여한 의무를 소홀히 한 국가입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은 그 의무를 명확히 합니다. 제2조는 “경찰관은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 보호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5조는 “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극도의 혼잡, 그 밖의 위험한 사태가 있을 때에는 필요한 경고를 하고 피난시키고 그 밖의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의무를 부과합니다”. 하지만 용산경찰서장은 당시 십만이 모인 현장의 ‘극도의 혼잡’에는 눈을 감고 관내로 이전해 온 대통령실 앞 시위를 막는 데에 집중했답니다. 경찰청장, 행정안전부장관, 대통령도 경찰을 제대로 지휘·감독하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청춘이 겪었을 고통과 죽음, 그 가족과 온 국민이 감당해야 할 슬픔에 대해 국가는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할 때 율사로서도 신앙인으로서도 그 답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에 책임을 묻는 나 스스로에게도 물어봅니다. 내 마지막 날에 회심곡과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판관께서 나에게 물으실 말씀을.
“너는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아픈이와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가 보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