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의술]
6·25전쟁과 이동외과병원
 
“팔다리보다 생명 우선”
환자 분류체계에 큰 변화
 
6·25전쟁 당시 열 개의 이동외과병원이 미군 4개 사단 지원
구급·외상처치, 환자 이송, 혈액 저장, 환자 분류 등 발전 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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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중에는 1970년 도널드 서덜랜드 등이 주연하고 로버트 알트만이 감독한 ‘매쉬(MASH)’라는 영화와 1972년부터 1983년까지 같은 이름으로 방영된 TV 시리즈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이다. 이 영화는 6·25전쟁 중 경기도 의정부에 있었던 4077 이동외과병원이 무대로, 이곳에 근무하는 의료진의 이야기를 다룬 블랙 코미디다.
6·25전쟁에서 나타난 군 의료의 혁신적 변혁을 들라면 의료 후송 목적의 헬기 사용과 전장에서 가능한 한 가까이 있으면서 높은 수준의 외과적 치료를 제공했던 이동외과병원(MASH: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을 꼽을 수 있다.
열 개의 이동외과병원이 미군 4개 사단(각 사단 병력 1만5000~2만 명)을 지원했다. 6·25전쟁 중 이동외과병원에서 얻어진 경험들이 구급 처치, 외상 처치, 환자 이송, 혈액 저장과 분배, 환자 분류와 후송의 발전을 가져왔다.
 영화 이동외과병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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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에는 동북아의 미군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군의관이 매우 적었다. 미8군 군의관 도벨 대령(Colonel Chauncey Dovell)이 급히 이동외과병원을 파견했다. 이동외과병원들은 신속히 배치돼 험준한 한국 지형에 적응했다.
유명한 1기갑여단을 지원하는 8064 이동외과병원이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이어 8076 이동외과병원이 부산에 배치됐다. 이동외과병원은 밀려들어 오는 환자들 때문에 미 육군의 기본 ‘분류와 허용량 기준표(Table of Distribution and Allowances)’를 급히 고쳤다. 차량·천막·장비 등을 추가해 입원 병상을 60개에서 200개 이상으로 늘렸다.
1951년에 8063 이동외과병원이 처음으로 헬기를 이용해 전상자를 후송했다. 벨사(社)의 ‘H-13 수(Sioux)’가 의무후송용 기본 헬기였다. 헬기 밖의 활주부에 환자를 두 명 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동하는 중에는 치료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동외과병원 수술 모습 |
1953년에는 전상자를 운반하는 데 전문적인 조종사를 따로 배치했다. 헬기를 이용한 후송은 이전의 전쟁에서보다 6·25전쟁에서 사망률을 극적으로 낮췄다(제1차 세계대전 8.5%, 제2차 세계대전 4%, 6·25전쟁 2.5%).
환자 분류체계(Triage)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6·25전쟁에서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환자 분류는 대대 구호소(battalion aide station, 1개 대대는 1000명 이하)에서부터 시작됐다. 이곳에서 간호사나 일반 군의관이 부상병을 후송할 것인지, 치료 후 복귀시킬 것인지를 결정했다.
이동외과병원으로 후송된 환자는 부상의 정도와 혈 역학적 상태에 따라 다시 분류됐다. 결과적으로 경험 많은 인력이 대대 구호소에 배치돼 단순한 구급처치, 지혈대 사용, 가슴관 삽입(chest tube insertion)을 했다.
수술이 필요하거나 위급한 환자는 헬기를 이용해 이동외과병원으로 후송됐고, 이동외과병원에서 환자 분류 의무장교, 간호사, 군의관이 각 부상병을 평가해 가장 위급한 환자부터 수술을 시행했다.
부상병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중상을 입어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들은 보존적 치료만 시행하기도 했다. 신경외과·성형외과 처치가 필요하거나 혈액투석이 필요한 환자는 각 특수센터로 후송됐다.
이동외과병원의 환자 분류는 다음과 같은 격언의 정신을 존중해 만들어졌다. “팔다리보다 생명이 우선하며, 해부학적 결함보다 기능이 우선이다(Life takes precedence over limb, function over anatomical defects).
6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공감되는 격언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인술을 펼치기 위해 고군분투한 선배 군의관들에게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황건 인하대 성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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