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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흥 국 기 (安 興 國 記)
안흥국(安興國)을 세운 양홍(梁洪)은 본래 신국(神國) 51대 성하(聖下) 예장성하(禮長聖下)때 삭주땅 북쪽 중강현(中江縣)에서 태어났다. 본래 신국이 구려를 멸망케한뒤 수도를 옮기지않고 옛 경주(慶州)땅에 계속 도읍하니 옛 구려땅인 북쪽지역 백성들은 신국에 쉬이 승복하지 않아 변란이 자주 일어났다.
양홍이 본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중강땅 호족집에서 노비로 살았다. 한번은 삭주땅 일때에 크게 물난리가 나니 많은 민가가 침수되고 고을과 고을을 잇는 다리가 끊겼다. 이에 현령이 지역의 호족들에게 명해 집안 노비들을 차출하여 수해를 복구할 노역수(奴役囚)로 동원케 명했다. 애초 현령은 동원된 노역수들이 수해복구 작업이 끝나면 정당한 댓가를 지불할 것을 약조하고 동원하였다. 허나 복구일이 힘들고 위험해 많은 사상자가 낫고 물자와 양식 공급이 원활치 않아 노역수들은 주림에 시달렸다. 여기에 현령이 ‘조정의 지원이 원활치 않아 노역수들에게 약속한 봉급을 제대로 지불치 못할 것 같다’며 현의 관원들과 대책을 의논했다. 양홍이 본래 눈치가 빠른자라 함께 노역일을 하던 정욱과 이를 알아채고 의논하기를 ‘애초 현령이 정당한 댓가를 지불할 것을 약조하고 우리를 동원했거늘 어찌 신의를 배반하기가 이와같을수 있는가. 우린 노역일을 마치고 주인(主人)에게 돌아가도 다시 받아줄지 기약이 확실치 않으니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로다. 한번 일을 벌임이 어떠한가 ?’ 하니 정욱이 ‘옳다’ 여겼다. 애초 양홍은 정욱과 그리고 따르는 이들 십여무리와 함께 노역장의 책임자를 살해하고 현령을 찾아가 따질 생각이었으나 정욱은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현령 하나를 징벌한다 해도 조정에서 우릴 토벌하러 오면 어차피 죽은목숨이로다. 그보단 차라리 난(亂)을 일으키자’ 하였다. 허나 양홍은 ‘현령 하나를 징벌하는 것 정도로는 사정을 충분히 조정에 소(疏)를 올려 해명하면 사면받을수 있다. 허나 일이 너무 커지면 결국 역도(逆徒)가 되는 것이다.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잠시 망설였다. 이에 정욱이 벌떡 일어나 크게 절을하며 말하기를 ‘어찌 천명(天命)에 적서(嫡庶)의 차별이 있겠는가. 예부터 새 나라를 세우려 할때는 반드시 하늘이 응하여 그 상서로운 조짐이 있었으니 우리가 스스로 그 조짐을 만들면 되도다’ 하고 무리중 기술좋은이 하나를 불러 하루는 종이에 특별한 약품을 바른뒤 이곳저곳에 붙였다. 날이 개인뒤 보니 ‘양홍지천자(梁洪之天子), 천지개벽 묘득도리(天地開闢 妙得道里)’라 쓰여 있었다. 놀라고 어리둥절한 노역수들 앞에 정욱이 나서서 말하기를 ‘양홍이 천손으로 세상을 바꿀 천명을 타고난 자라고 하늘이 이미 계시하셨도다. 그대들은 무엇을 망설이는가. 백성을 핍박하고 신의를 저버리는 무도한 신국의 벼슬아치들을 모두 베어버리고 마땅히 새나라를 건설함이 어떠한가 !!!’하니 무리가 호응 곧 1백여인에 달했다.
양홍과 정욱이 무리에게 낫과 망치와 쇠스랑을 나누어주어 1백여인과 함께 현청(懸廳)을 습격하였다. 처음 양홍은 현령을 설득하며 말하기릴 ‘노역수에게 약조한 댓가만 지불해주면 물러나겠다’ 하니 현령이 벌벌떨며 ‘조정에서 지원키로한 예산이 당도하지 않았다’며 겨우 말했다. 정욱이 노하여 현령을 베어버리고 현청을 바로 ‘이곳에 새 나라를 일으킬 십승지(十乘地)로다’ 하며 바로 이곳에서 천하도모의 계책을 논하기 시작했다. 이후 주위 10여 군현(郡縣)을 습격하니 삭주일대는 물론이오 강건나 북방 일부지역까지가 양홍과 정욱의 세력이 되었다.
조정이 놀라고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진압하려 하였으나 거리가 멀고 산세가 험해 결국 패하고 말았다. 신국 조정이 보낸 군사가 거듭 패퇴하니 양홍과 정욱이 다시금 무리들앞에 나와 말하기를 ‘이미 신국은 우리를 징벌할 힘이 없도다. 우리는 적고 관군은 다수임에도 이미 우리가 여러번 이기고 관군이 패퇴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애초의 천명대로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그대들의 뜻이 어떠한가 ?’ 하였다. 이에 한 백성이 나서서 말하기를 ‘신국이 오래전 옛 구려를 멸망케 하여 이곳 삭주에도 옛 구려의 자손으로 신국을 원망하며 사는 자손들이 많사옵니다. 허나 공(公)께선 마땅히 옛 구려를 승계하는 새 나라를 세우소서’ 하였다. 허나 또 다른이가 나서서 다른의견을 말하기를 ‘신국이 옛 구려를 무도하게 멸망시킨 것은 사실이나 구려 또한 백성을 핍박하고 간신들이 흉포하여 나라가 망한 것은 다르지 않으니 신국도 구려도 모두 우리가 계승할 법도가 못 되오이다. 공(公)께선 마땅히 신국도 구려도 아닌 새 세상을 여소서.’ 하였다. 무리중이 계원(癸原)이란 자가 있어 드물게 학문이 있는 자였다. 계원을 책사로 등용하여 의논하니 계흥이 말하기를 ‘신국은 이미 나라를 경영할 도리가 땅에 떨어져 우리가 받들만한 길이 되지 못하옵고, 구려 또한 말년에 태왕(太王)과 권문세가들이 십악(十惡)의 죄(罪)를 저질러 우리가 따를 도리가 못되옵니다. 이제 공께서 마땅히 천명을 받아 백성을 평안케하고 살림을 흥하게 할 새로운 나라를 세울 뜻을 밝히시니 백성을 평안케 하고 살림을 부흥케한다는 뜻으로 ’안흥국(安興國)‘이라 지으심이 어떠하오이까 ?’ 하였다. 양홍과 정욱이 곧 옳게여겨 나라이름을 그와같이 정하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적절한 벼슬을 내린뒤 양홍이 스스로 ‘태천자(太天子)’가 되었다.
양홍(梁洪)이 안흥국(安興國) 천자(天子)가 되자 정욱은 승상(丞相)이 되었다. 이때 정욱의 처는 어진(於眞)이라는 여인이었는데 정욱이 옛적 노예시절부터 교류하던 동네처자였다. 어진은 어린시절엔 동네 주막에서 부엌 허드렛일을 하던 여자였는데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종종 곁눈질로 주인의 음식 조리하는법을 익혔다.
이때에 아직 병사(兵士)들에게 군량(軍糧)을 조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출병할 때 보통 집에서 각자 식재료를 준비해와 행군도중 쉴 때 막사에서 서로 만들어 나눠먹거나 그 외에는 점령지에서의 약탈밖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때 어진이 하루는 승상 정욱에게 긴히 간했다. ‘옛적부터 많은 나라들이 전란을 치르매 출병할땐 병사들이 각자 먹을 것을 준비해오게 하고 힘들때는 전란지에서 백성들의 먹을 것을 약탈하였으니 전란이 거듭되면 백성들이 피폐해지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나으리께서 이제 나라를 경영하는 승상이 되었으니 백성들의 삶을 궁핍하게 하지 않는 지혜를 발휘하소서’ 하였다. 정욱이 의아해서 묻기를 ‘부인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소 ?’ 하니 어진이 답하기를 ‘제가 예전 OO고을에서 주인일을 도울 때 주인이 조리하는 것을 보니 종종 밀가루 반죽에 팥이나 양갱을 갈아 속으로 넣거나 혹은 야채같은 것을 볶아넣어 여행객들을 먹이면 여행객들이 적은양으로도 먼길을 갈 수 있어 기뻐하였나이다. 제가 비록 재주없으나 옛 주인이 일하던 것을 본 기억이 있으니 실험해 보겠나이다.’ 하고 실험삼아 한 부대의 막사에서 밀가루 반죽을 한뒤 김치나 야채 혹은 닭이나 돼지 잡은 고기등을 볶아 밀가루 속으로 넣어 병사 십여명을 먹이니 한두덩이만으로도 능히 배불러 하였다. 또한 조리하는 방법이 간단하고 쉬워 군대에 소수의 조리병만 배치하면 장거리 행군때도 능히 즉석에서 조리가 가능하였다. 정욱이 곧 양홍에게 보고하니 양홍이 놀라고 기뻐하야 ‘다른 병사들에게도 먹여보도록 하라’고 하니 역시 적은 밀가루 반죽에 야채나 김치,고기따위를 넣은 속으로 많은 군졸들을 배불리 먹일수 있어 다들 놀라워했다. 양홍과 정욱이 아내와 함께 손을 맞잡고 기뻐하며 말하길 ‘이제 더 이상 전란이 일어나면 약탈로 인해 인심을 잃을일을 두려워할일이 없도다’ 하였다. 양홍이 정욱의 처의 재주를 칭송하여 손수 ‘만포부인(滿飽婦人)’이라 칭하게 했다. 그리고 부인이 만든 군량용 음식을 ‘안흥땅에서 만든 음식이나 어찌 안흥군사만의 군량이 되겠는가. 마땅히 훗날 천지(天地)에 퍼져 만군(萬軍)을 먹일 귀한 군량(軍糧)이라 하여 ‘안흥땅에서 만들었으나 훗날 만군을 먹일수 있는 식량’이라 하여 ‘안흥만두(安興萬頭)’ 혹은 ‘안흥찐빵’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양홍이 승상 정욱의 추천을 받아 진수(晉守)와 무진(武辰)이라는 이를 등용했는데 둘 다 학문이 있는 자로 이들이 종종 시간을 내어 안흥국의 산세와 지형을 살피는가 하면 옛 대륙의 병서를 어렵사리 들여와 이를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안흥국만의 새로운 병서를 만드니 무진병법(武晉兵法)이라 불렀다. 이때 신국이 가면 갈수록 성하(聖下)들이 무력(無力)해지고 간신들이 날뛰니 수도에서 더 이상 지방을 통솔할 방법이 없어졌다. 특히 옛 구려땅이 정도가 심해 길주땅에만 약 20여 도적떼가 들고 일어났다. 도적떼의 우두머리는 저마다 하늘의 명을 받았다 하여 스스로를 상제(上帝)니 성현(聖賢)이니 선현(先賢)이니 천황(天皇)이니 천제(天帝)니 하며 일컬었다. 백성들을 핍박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차라리 신국(新國) 성하(聖下)의 뜻을 그대로 받드는게 낫겠다’ 하며 도적떼를 원망하였다. 이때 오로지 안흥국의 병사들만 더 이상 약탈을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놀라고 기뻐하며 ‘저들이야말로 도적떼가 아닌 신이 내린 신병(神兵)이로다’ 하며 앞다투어 안흥국에 투항해갔다.
이때 길주에 유준이라는 자가 있어 구려(句麗) 태왕(太王)의 자손이라 하며 길주의 20여 도적떼 대부분의 투항을 받고 신려(新麗)란 나라를 세웠다. 평주(平州) 부호 고상의 투항을 받으니 안흥국은 평주와 길주 사이에 둘러싸여 마치 두 손바닥 안의 커다란 공과 같은 형세가 되었다. 이후 유준이 서한을 보내 양홍에게 투항할 것을 권하니 양홍이 ‘내 스스로 천명을 받은 천제의 자손이거늘 어찌 한낱 도적떼에게 투항하겠느냐 ?’며 유준의 서한을 찢고 투항을 거부하였다. 격노한 유준이 여러차례 안흥국을 쳤으나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였다.
이후 유준이 고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30인의 결사대’라는 특수부대를 조성 맹훈련을 시킨뒤 안흥국의 궁궐을 습격 유준을 시해하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결사대가 궁궐로 숨어든지 얼마되지 않아 궁궐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살해당하고 다만 몇몇이 끝내 궁궐 깊숙이 들어가 양홍을 시해하려 하였다. 이때 애영(愛影)이라는 양홍의 애첩이 있었는데 신려 특수부대의 습격소식을 듣고 급히 양홍에게 가서 ‘마땅히 소첩과 옷을 바꿔입고 달아나 생령을 보존하소서. 소녀는 미천하여 죽어도 상관없사오나 천자폐하(天子陛下)께선 마땅히 억조창생의 생령을 보존키 위해 사셔야 하나이다’ 하였다. 양홍은 차마 그럴수 없었으나 상황이 급박하여 머뭇거리거나 더 말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애영이 시키는대로 옷을 바꿔입고 비밀 지하로를 통해 달아나고 애영이 양홍의 침소에서 태연하게 천자(天子)의 침수복(寢睡服)을 입고 기다리니 특수부대는 애영을 양홍으로 오인하고 살해하였다. 뒤늦게 습격한 군사들에 의해 특수부대원은 진압되었다. 양홍이 애영의 죽음을 알고 슬피울며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명하였다.
양홍이 신려가 계속 자신을 도모하는것에 격노하였고 특히 애첩 애영까지 잃게 한것에 격노하여 마침내 대군을 일으켜 신려를 치니 40여 고을이 안흥국에 함락되었다. 이때 양홍에겐 본래 안흥국을 세울 때 정욱의 추천을 받아 맞아들은 오씨(吳氏)란 여인이 있었다. 양홍은 오씨를 황후로 세우고 네명의 딸을 보았으니 안흥국의 명장 이도선,정순덕,태원익,신태성 네 장수에게 모두 딸을주어 사위로 삼았더. 이도선,정순덕,태원익,신태성 네 장수가 모두 무용과 지략이 뛰어나 이때 백성들은 이들 넷을 ‘안흥국 사대장(安興國 四大長)’이라 불렀다.
안흥국이 원래 옛 신국의 삭주 시절부터 척박한 지역이었으나 평주와 길주 사이에 반원형태의 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어 천혜의 요새가 되어 있었고 북쪽에는 중강(中江)이라는 큰 강이 있어 북쪽 오랑캐도 안흥을 쉬이 도모하진 못하였다. 원래 신국이 구려를 멸망시킨후 반도 북쪽 옛 구려(句麗)땅에도 서주(徐州),명주(明主),흑주(黑主),동주(東主) 4개주를 세웠으나 신국의 정세가 어지러워지면서 북쪽 지역에 차츰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이들 4개주는 차츰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갔다. 차츰 거란,여진등의 북방 유목민이 내려와 이들 지역을 차지하였는데 안흥국이 세워진후 신료들은 중강(中江) 북쪽의 명주와 흑주를 도모하자고 권해 일시적으로 안흥국이 이 지역 일대를 차지하기도 했다. 허나 거란,여진등과 자주 부딪히니 마침내 이들과는 화친을 맺었다.
이후 안흥국이 신려와는 산맥을 경계로한 천혜요새가 되어 신려가 안흥을 차마 도모하지 못하였고 거란,여진과는 초기엔 부딪혔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화친하였다. 안흥은 ‘안흥만두(혹은 안흥찐빵)’라는 신묘한 군량자원을 개발하여 더 이상 병사들이 굶주리지 않고 먼길을 행군할때도 소수의 조리병만으로도 간단하게 군량을 조달할수 있게 하여 점령지의 민가를 약탈하지도 않으니 차츰 민심을 얻어갔다. 또한 안흥의 산지(山地)에서 나는 철과 구리로 거란,여진과 교역하니 백성들의 삶이 차츰 윤택하게 되어 ‘최소한 안흥땅에선 굶주리는 백성이 없다더라’는 소문이 돌아 차츰 그곳에 투항하려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허나 양홍은 정부인 오씨와의 사이에 딸 넷만을 낳았고 애첩 애영은 신려 특공대의 습격때 양홍을 보호하려다 젊은 나이에 죽어 후사를 볼수 없었다. 이에 양홍은 5촌조카뻘 양수를 후계자로 삼으로 했다. 원래 양홍이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해서 친척간의 왕래가 없었는데 양홍이 안흥국을 세우자 양홍의 먼 친척을 자처하는 이들이 속속 찾아왔다. 양홍이 초창기엔 철저하게 검증하여 친족이 맞는지 진위여부를 가리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양수의 아비 양원은 양홍의 아버지 사촌형이라 하였는데 역시 검증할 방도가 없어 하는수없이 어린 양수를 거두었다.
양홍이 늙으매 마침내 양수를 후계로 세우려 하자 양홍의 딸들과 결혼한 사위 이도선,정순덕등이 반발하였다. 이때 양홍이 혜경이라는 또 다른 젊은 첩을 들였는데 품행이 문란하여 이도선,정순덕등과 사통하였다. 이때 신려에선 고원이 유준의 뒤를 이어 태왕이 된 유선을 몰아내고 ‘화려(華麗)’왕조를 세웠다. 혜경은 양홍이 5촌조카뻘 양수에게 후사를 물려주려하자 반발하여 이도선,정순덕등과 함께 내란을 꾀하였다.
혜경이 원래 성정이 문란하여 양홍의 사위인 이도선,정순덕등과 사통하였는데 하루는 이 둘을 은밀이 불러 말하기를 ‘안흥국이 오늘까지 오는데는 오직 경들의 무용과 지략이 있었는데 이제 천제(天帝 : 양홍을 말함)가 늙고 망령이 나서 근본도 모르는 아이를 조카라 하여 후사를 물려주려 하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오 ? 경들이 나를 도와준다면 나 역시 경들의 대업을 돕겠소’ 하였다. 이도선이 의심하며 또 한편으로는 의아하여 묻기를 ‘좋은 계책이 있소 ?’하니 화려의 고원이 원래 신려를 무너뜨리고 새나라를 세웠는데 현재 안흥의 남동쪽 40여 고을은 우리 천자가 유준의 신려 시절에 빼앗은 땅이오. 이제 은밀히 사자를 보내 협상을 하여 우리의 일을 도와주면 옛 신려의 땅 40여 고을중 절반을 돌려주겠다고 하고 그 대신 우리가 양수를 몰아내고 안흥의 새 천자가 되는 것을 도와달라 하면 고원도 거절하진 않을것이오‘ 하니 이윽고 이도선,정순덕이 옳다 여기고 고원과 내통하여 양홍을 몰아내려 하였다. 고원이 혜경이 보낸 밀사를 받고 ’안흥을 무너뜨릴 좋은 기회로다‘ 하며 손뼉을 쳤다. 원래 유준의 신려시절부터 여러번 안흥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사 그 뜻을 이룰수 있게 되어 화려의 고원이 기뻐한 것이다.
OO년 OO월 OO일. 마침내 고원이 장군 김태원을 시켜 안흥을 정벌하도록 하니 이도선,정순덕이 내응하여 길을 열어주었다. 이도선이 양홍과 양수를 죽이고 그 수급을 보이니 오히려 김태원은 ’옛 주군을 배반한 패역한 자들이로다‘ 하며 오히려 이도선,정순덕은 물론 혜경까지 모두 목베게 하니 이로서 안흥땅은 마침내 고원의 수중에 들어갔다.
후세의 사가가 평한다. 안흥국이 원래 삭주의 양홍이 노역수생활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천명을 받았다 속여 나라를 일으켰다. 이후 30년을 이어갔으니 ’안흥만두(혹은 안흥찐빵)‘같은 현묘한 병영식량을 개발 군사들이 굶주리지 않게했고 안흥의 병사들은 이로인해 스스로 군량을 만들 수 있어 전란때 약탈을 하지 않으니 민심이 이에 부응한 것이다. 또한 척박한 환경에서도 교역으로 오히려 나라를 부강케 했으니 이 모든게 후대에 귀감이 될만한 현묘한 도리라 여겨 기록으로 남긴다. 허나 안흥은 결국 양홍의 후대가 확실치 않아 간교하고 음란한 무리들이 난을 일으켜 오히려 적을 성중(城中)에 들어오게 했으니 후대의 어리석음이 이와같았다. 안흥국이 멸망한 것은 후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이 원인이니 나라를 세우는 것 못지않게 후사를 바로 정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임을 보이는 것이 곧 안흥국의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