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종달리 마을 동쪽 현재의 갈대밭 자리
유형 ; 생산기술 유적(염전)
시대 ; 조선∼대한민국
종달염전(鹽田)은 제주도 제염의 효시인 동시에 소금생산의 주산지였다. 한국수산지 제3집(1910)에 의하면 '조선 중엽 1573년 강려 목사가 종달리 해안 모래판을 염전 적지로 지목하고 이 마을 유지를 육지부로 파견하여 제염술을 전수케 하여 제염을 장려한 것이 제주도 제염의 효시'라고 적혀 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2)은 '강려 목사가 종달 해변의 노지를 보고 도민들에게 해염 생산법을 가르쳐 소금을 만들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사록 소금 관련 기사 ; 내가 보니 별방에서 정의까지 사이에 염전이 몇 군데 있다. 일찍이 충암록에 ‘땅이 큰 바다로 둘러싸였으나 소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기에 여러 지방민에게 물어 보았다. 무오년부터 姜侶가 목사가 됐을 때 해변의 소금 나는 땅을 보아 잘 아는 사람을 가르쳐 육지 연해에서 바다소금 만드는 것을 시험해 보았다. 한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 겨우 4~5두였는데 맛이 매우 썼다. 지금은 온 섬에서 일곱 군데 소금가마가 있어 충분히 관가의 주찬을 이어 댈 만하다. 그러나 민가에서는 이것을 쓸 수 없으며 모두 육지에서 사 와야 한다고 했다.(2008년 刊 남사록 역주上 108쪽)
강려는 1555년 제주목사 김수문의 휘하 군관으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절의를 하사받았다. 이듬해에 또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목사 김수문은 加資되고 판관 이선원은 3품에 승직되었으며 姜侶는 東班으로 陞敍되어 대정현감에 임명되었다. 1573년 6월에는 제주목사로 임용되었다가 다음해 10월 파직되어 떠났다. 여기서 말하는 무오년은 1558년이므로 그가 목사로 임용되기 전이다.
1900년대 종달리 마을 3백53호 가운데 1백60명이 제염에 종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가 46개가 있었다고 한다. 염전지는 현재 종달 동(東)동의 논밭이다. 제염에 참여하려는 인구가 대거 유입됐던 동동은 당시 '큰 동네'로 불리웠다. 주민들은 '접'을 만들어 제염을 위한 가마 구입이나 사용을 공동으로 대처했다. 염전조성, 해수운반, 연료채취 및 운반, 전오(煎熬) 과정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소금 판매에 나섰는데 판매인들을 '소금바치'이라고 불렀다. 이 곳 사람들을 일컬었던‘소금바치'라는 말은 이처럼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한데서 연유했다. 이후 하도리와 성산읍 시흥리 염전도 생겨났다고 전한다. 종달 천연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은 조정에 진상은 물론 전라도 지역까지 보내졌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종달리에서 논농사를 지으려는 시도는 조선시대 말인 189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주인공은 채구석(蔡龜錫, 1850~1920, 한림)이다. 그는 속칭 신속곶 일대에 둑을 쌓아 논을 만들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해수(海水)가 땅 밑으로 솟아나면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물웅덩이가 생겨났고 그가 대정군수를 지낸 사람이기 때문에 대정놈의 소(沼)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대정놈의 소(沼)=2777번지(구좌읍역사문화지 421쪽)
이후 이 지역은 전 구례현감 송상순(宋祥淳, 1842~1921, 조천)이 매입하고 이중으로 둑을 쌓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바다 쪽은 양어장, 일주도로쪽은 수답을 완성하였다. 송상순은 함덕 사람에게 매각하였고 그 후 수리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자 관리 또한 소홀해지면서 논은 차츰 습지로 변했다. 현재는 갈대가 무성하여 철새들이 많이 찾는다.(현장의 안내표석)
하지만 종달 제염업은 해방후부터 육지부 천일염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수지를 맞추지 못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지금은 염전지가 수답(제2수답)으로 바뀌었다. 염전터를 수답으로 바꾸는 공사는 1957년부터 시작되어 격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 공사가 답보상태를 거듭한 끝에 1969년에야 32ha의 옥토가 만들어졌다. 이 사업은 제주도의 간척지 사업으로 성공된 첫 케이스다. 현장에 당시 도지사와 북제주군수에 대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한라일보 2003년 10월 24일 한라산 학술대탐사 169회)
당시 金仁和 북제주군수는 사업의 진두지휘를 위하여 날마다 종달리 현장에 나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기 때문에 '종달리군수'라는 애칭까지 얻었다고 한다.(지미의맥 79쪽)
마을 길에 있는 공덕비에는“바닷물 밀려들던 옛날 갯벌이 황금빛 물결치는 옥답이 되어 풍년송 하늘 높이 울려퍼지니 높으신 그 은덕의 보람이어라. 이 기쁨 잊지 않고 언제까지나 자손만대 길이길이 간직하리라. // 여기 버려졌던 넓은 갯벌에 영글은 벼이삭이 넘실거리고 보람찬 새 희망의 꿈을 이루니 높으신 그 은덕의 보람이어라. 이 희망 길이길이 언제까지나 자손과 더불어 간직하리라."라고 새겨져 있다.
갯벌-염전-논-갈대밭으로 변해온 종달리 염전터의 변화는 제주도 1차 산업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4·3 당시 학살터 ; 염전 터는 당시 갈대가 우거진 폐허로 남아 있었다. 1948년 12월 4일 종달리는 무장대와 토벌대 양쪽으로부터 피해를 당했다. 세화리를 습격했던 무장대가 종달리를 습격해 민보단원 10명을 살해했고, 세화지서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지서에 수용되어 있던 종달리 주민 20여명을 연두망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그런 다음 토벌대(응원경찰)는 다시 종달리로 들어와 도피자 가족을 끌어내어 이곳 염전밭과 그 인근에서 채두원(37)씨 등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찍어 죽이는 등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1949년 1월 19일에는 도피생활을 하던 종달리 주민 채두만(41,여)씨를 무장대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곳에서 총살했다. 채두만의 남편은 종달리장이었던 김석호인데 무장대에 납치되었다가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에 붙잡혀 총살당한 사람이다.(2020년 개정증보판 제주4·3유적Ⅰ) 염전터에는 점차 주택들이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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