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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의 진실을 다룬 영화! ??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 극장상영 ㅡ 왜곡을 다룬 영화??
■ 기획 :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 제공 : 대한역사문화원
제주4·3의 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이하 ‘탐라의 봄’)이 2022년 9월 극장에서 개봉, 상영된다.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직전,
남한 내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주도로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남로당은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을 뽑는 선거를 방해하여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을 막고, 북한과 공산통일을 이루려했다.
남로당은 제주도에서 경찰, 우익인사, 선거위원, 기독교인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약탈, 학살과 방화를 저질렀다.
그러나 제주4·3의 정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왜곡되었다.
요즘은 제주4·3사건이 1947년 제주도 3·1 기념행사에서 일어난 불상사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 기념행사가 평화시위가 아닌 ‘불법집회’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 1946년 10월,
좌익들의 선동에 의해 발생한 ‘대구폭동’은 전국적으로 번지며 두 달 가량 이어졌고
, 좌익의 잔인성을 경험한 미군정은
곧이어 좌익 주도로 기획된 제주도 3·1 기념행사를 불허했다.
특히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는 가두행렬은 원천 불허했으나
좌익들은 이를 무시하고 강행하여 불상사를 유도한 측면이 있다.
영화의 포스터
<영화 '탐라의 봄'을 기획한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전민정 대표>
영화제작을 기획한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의 전민정 대표는
왜곡되어 온 제주4·3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민정 대표는 “남로당에 의해 일어난 제주 4·3 사건이
오히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과 군인들에 의한
‘국가폭력’,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왜곡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면 남로당을 그대로 두고
, 제주도에 이어 남한 땅이 공산화되도록 놔두는 게 맞았느냐?”고 반문하며,
기획취지를 설명했다.
전 대표의 말대로 요즘은 오히려 남로당을 진압한 군경이
마치 큰 잘못이나 저지른 ‘죄인’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고,
4·3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희생자로 인정되어
보상까지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대한역사문화원의 김재동 원장>
영화 제작에 힘을 보탠 대한역사문화원 김재동 원장은
지난해 제주4·3사건 당시 남로당에 의해
생매장 당해 순교한 이도종 목사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기획한 바 있다.
전 대표의 기획취지에 크게 공감한 그는 이번 작품 제작을 위해
물심양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마침내 영화 극장개봉을 가능케 하였다.
김재동 원장은 “역사 왜곡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북한정권을 추종하며 공산통일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
. 또 그러한 이들이 명분을 과거에서 끌어 오기 위해 역사 왜곡을 하는 것이다”라며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이 자유 대한민국의 존속
그리고 후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다.
현재 제주4·3사건에 관해 흔히 접할 수 있는 영상자료들은
매우 좌편향적인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탐라의 봄’은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1947년 제주 3·1 기념행사 배경부터
진실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이들의 유가족들을 수소문해서
수차례 현지를 방문해 생생한 인터뷰로 담았다.
관객들은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에 놀라게 될 것이다.
<제주 4·3 사건 초기에 좌익들에 의해 생매장, 순교당한 이도종 목사의 사연을 설명 중인 손자 이동해 선생>
<제주 4·3 사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 중인 김영중 (전)제주경찰서장>
<제주 4·3 사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 중인 이승학 제주4·3진실규명을위한도민연대 사무총장>
<제주 4·3 사건 당시 좌익들에게 부친을 잃었던 상황을 설명 중인 강재문 선생>
<좌익 남로당이 주민들을 선동하는 장면을 생동감 있는 연기로 재연>
<좌익 남로당에게 선동당하는 주민들 모습을 재연하기 위해 다수의 출연자 동원>
<남로당이 제주도에서 1947년 3.1 기념행사를 하려 하자 이를 불허하는 미군정 장교>
<약탈, 방화, 살상을 모의하는 남로당원들>
<남로당원에 의해 산속으로 납치되어 가는 여인>
<제주도 주민들을 강제로 산으로 끌고 가는 남로당원들>
<어린 시절 좌익들이 이웃 마을 이장(구장)의 임신한 아내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죽인 것을 직접 본 김성석 선생이 당시 참혹함을 증언>
<제주도 양민과 좌익들을 분리하기 위해 작전을 짜는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
<좌익들이 경찰이었던 부친을 총으로 쏴 죽인 뒤
시체에 계속 사격을 해 시신을 알아 볼 수 없게 훼손한 정황을 설명 중인 좌효남 선생>
김재동 원장은 “이 영화는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한푼 두푼 모금해 만든 작품으로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내용은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상식으로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
우리 국민이라면 꼭 봐야하는 영화이다”라며 많은 이들의 관람을 호소했다.
‘탐라의 봄’은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허리우드 클래식 극장’에서
2022년 9월 매주 금요일 저녁 7:30, 토요일 오후 5시에 상영된다.
관객들의 호응이 좋으면 상영관을 늘리고, 연장 상영할 예정이다.
* 아래 링크는 영화의 예고편 *
https://www.youtube.com/watch?v=k8NZH7u-jKw
■ 영화상영
일시 : 2022년 9월 매주 금요일 저녁7:30, 토요일 오후5시
장소 : 허리우드극장 (종로3가역 5번출구)
[출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영화 '잔혹했던 1948년 탐라의 봄'|작성자 대한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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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제주 95% 노동자 총파업 돌입, 실화냐?
[다시 쓰는 현대사] 제주4.3과 3.10총파업 |
강호석
2021.4.3
▲ 4.3이 발발하게 된 계기가 됐던 3.1절 발포사건 당시
기마경찰이 시위 현장에 들어섰다. [그림=강요배]
1947년 3.1절 기념식이 끝난 후 제주 관덕정에서
가두시위를 구경하던 어린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마경찰이 아랑곳하지 않고 현장을 그대로 빠져나가려 하자
군중들이 항의했고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6명이 숨졌다.
“해방된 우리 땅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다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데,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고 또 넘었는데”라는 절규가 쏟아졌다.
3.1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일제 경찰 출신이 82%인 당시 제주도 경찰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에 3월 10일 유례없는 총파업이 벌어졌다.
3월 13일까지 나흘간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0여개 기관과 단체가 파업에 돌입했다.
이를 핑계로
미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빨갱이 섬)라 칭하고
군병력을 동원,
파업주모자라는 이유로 2500여명을 구금했다.
제주4.3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늘을 사는 노동자라면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3.1사건 발생 열흘 만에 노동자 95%가 참여하는 총파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광복 2년이 지났는데 3.1절을 기념한 이유
총파업 성사 요인을 찾기에 앞서
우선 광복된 지 2년이나 지났는데 3.1절 기념행사에
제주도민 절반에 해당하는 6만 명이나 모이게 된 이유부터 알아야한다.
해방이 되자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제주도민들이 돌아왔다.
그 수는 12만 제주도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6만 명에 이르렀다.
사선을 넘어 해방된 고향 땅에 돌아온 이들은
9월 15일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시발로
노동조합, 부녀동맹, 교육자동맹 등 각종 대중단체를 잇따라 조직해
과거 일본인의 재산(적산)을 관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 새조국 건설에 떨쳐나섰다.
그러나 9월 28일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은
적산을 송두리째 강탈하고,
일제의 밀정 출신들로 경찰을 구성해 치안을 담당케 했다.
당시 제주도(지)사
스타우트 소령 휘하의 경찰 총수 1,157명 중에
일제 경찰이 949명으로 82%를 차지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와 노동조합 등
민주단체 인사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구속하는 등 파괴공작을 감행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군정의 비호아래 자행된
‘한라단’ 사건(친일파들의 테러조직 한라단이 인민위원회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렇게 되자,
일제 대신
제주를 점령한 미군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인민위원회는 ‘3·1투쟁기념행사제주도위원회
’(이후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이양)를 결성해
1947년 3월 1일 대규모 반미 시위를 계획했다.
3.1절 당일 “미군은 물러가라”는
시위군중의 현수막과 기념식 개회사는
당시 제주도민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했다.
“우리 제주도민은
모두 3.1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
”(남로당 제주도당 책임자 안세훈의 개회사 중)
▲제주 민주주의민족전선 [건국5칙]
1. 노동자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는 세우자!
2. 농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3. 권리가 남자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
4.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5.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95% 노동자가 총파업에 돌입한 이유
3.1사건 직후에 바로 총파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 점령군의 실체가 만천하에 폭로됐기 때문이다.
처음 미군정이 시작될 때만해도
그들의 말대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파견된 해방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에 총을 겨누는 미군은 결코 해방군일 수 없다.
조선총독부가 미군정청으로,
일본군이 미군으로,
친일 경찰이 친미 경찰로 바뀌었을 뿐
해방은 아직 멀리 있음이 3.1사건으로 드러났다.
이에 제주 노동자들은 미군정에 맞서 총파업을 결행했다.
총파업이 성사된 또 다른 요인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라는 강력한 노동자 조직이
제주 인민위원회와 제주 민전의 기둥으로 망라되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노동운동이 금지됐던 일제치하를 벗어나자마자
조선광산노조를 시작으로
금속, 철도, 출판, 섬유, 토건, 화학, 전기, 조선 등 각 분야에 노조가 결성되었다.
1945년 11월 5일 전평 결성대회에는
1,194개의 노조, 50만명의 노동자를 대표한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전평은
자신들의 과제를 경제투쟁을 넘어서서
정치투쟁을 통한 일제잔재 청산과
반제‧반봉건 민중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전평이 주도한 주요 투쟁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947년 ‘3월 총파업’을 꼽을 수 있다.
철도노조에서 시작한 9월 총파업은 11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해
전국의 주요도시와 지방 60여개 군으로 확산되었다.
미군정은 전평의 요구사항을 묵살하고 강경대응 방침을 세웠다.
9월 30일 미군정은 탱크를 앞세우고
군경 3천여 명과
우익단체(친일파들) 청년 2천여 명을 동원해 용산 철도파업 현장을 습격했다.
2차 총파업으로 불리는 3월 총파업은
일제 부역 경찰간부 처벌과 경찰 민주화,
구속된 노조간부 석방을 요구하는 정치파업이었다.
제주 3.10파업이 바로 전평의 지휘아래
제주에서 벌어진 총파업인 것이다.
2차 총파업 역시 미군정의 강경진압에 의해 2천여 명이 구속되며 끝이 났지만
전평은 1948년 다시 3차 총파업을 감행한다.
이 역시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정치파업이었다.
3차 총파업은 제주4.3으로 이어졌고,
3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이
미군정의 초토화 작전에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전평은 3차례의 총파업으로 인해
수많은 간부들이 검거되거나 살해 당해
조직과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단독정부 선거일에 맞춰 다시 총파업을 조직했고
전국 규모로 확산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역시 잔혹하게 진압 당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4.3항쟁을 이어
5.10 남한 단독선거를 무산시키는 데 성공한다.
▲ 4·3사건 발생 한달여 만인 48년 5월 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바로 제주4.3학살의 주범들이다.
왼쪽 두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총사령관
,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제주4.3은 반제자주, 조국통일을 향한 전민항쟁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어둠을 가르는 한발의 총성은
순식간에 제주도를 흔들어 전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라산의 봉우리마다 붉은 봉화가 올라가고
미군정의 탄압에 맞선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탕’하는 총성은
5.10 분단선거를 무력으로 저지하라는 공격개시의 신호임과 동시에
제주도민 전체의 궐기를 촉구하는 호소였다.
3천여 명의 무장대원들은 각지의 산봉우리에 일제히 올려진 봉화와 총성에
동서남북으로 호응하여 봉기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제주도민에게 전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경애하는 부모 형제 여러분!
4월3일 금일, 여러분의 아들 딸과 형제들은 무기를 손에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적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을 찾기 위해.
여러분에게 고난과 불행을 강요한 압제자와
그 하수인의 압제의 사슬을 풀기 위해.
여러분의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을 풀기 위해.
저희들은 오늘 분연히 떨쳐 일어섰습니다.
여러분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몸을 던져 싸우는 저희들에게 협조하시고
저희들과 함께
조국과 민중이 인도하는 길로 결연코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경찰관 여러분!
탄압하면 항쟁할 뿐이다.
제주도 빨치산은 민중을 수호하고 민중과 함께 한다.
항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민중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 여러분!
하루라도 빨리 선(조직선)을 찾아가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직장을 수호하며,
악질 동료와 최후까지 용감하게 투쟁하라.
양심적인 경찰, 장병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있는가?
한국 민중이라면
조국과 민중을 유린하는 외적을 내쫓는 투쟁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과 민족을 팔아먹고
애국자를 학살하는 반역자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총구는 놈들에게 향하라.
결단코 여러분의 부모 형제에게 향해서는 안 된다.
제주4.3의 전평이
오늘 민주노총에 묻는다
3만여 제주도민의 생명을 앗아간 주한미군이 76년 째 주둔하고 있다.
제주도민을 학살하라 명령한 주한미군은
여전히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다.
자신의 부모 형제를 쏴 죽인 주한미군에게
제주도민의 세금이 방위비분담금으로 지급된다.
11월 총파업을 선언한 민주노총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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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우익은 국적을 일본으로 기재한 이승만과 친일파들.
좌익은 김구를 비롯한 독립군과 민족주의자들.ㅡ 밑에 좌파 우파 빨갱이 유래 글 참조.
첫댓글
https://cafe.daum.net/freemicro/QnxH/715
좌파 우파 빨갱이 유래
https://cafe.daum.net/freemicro/1CmD/407
반민특위 기념식 열린다 ㅡ매국노 청산?
https://cafe.daum.net/freemicro/1CmD/257
코리아 전쟁 진실을 벗긴다 전문을 게재
https://cafe.daum.net/freemicro/1CmD/310
상해 임시정부는 망명 정부가 아니다 ㅡ 한반동로 지명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