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3일 토요일 흐리다. 영어로 쓴 한국의 양반 가문 이야기
이전에 미국에 와서 보니, 한국에서는 오히려 외면하는 한국 사람들의 족보를 모으고, 연구하고 강의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더러 신문에 매우 놀랍게 보도되기도 하고, 또 그런 사실을 미국에 와서 보고 놀라운 일이라고 기행문을 쓴 사람도 가끔 있었다. 유타 주에 본부가 있는 모르몬교에서 전 세계의 족보를 수집하고, 족보학 회의도 가끔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지금도 그런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학에서는 하버드 대학의 와그너Wagner 교수가 전북대학의 송준호 교수와 함께 이씨 조선의 모든 소과(진사, 생원시험) 합격자와 대과(문과) 합격자, 도합 총 10만 명의 명단을 조사하여 컴퓨터에 입력하면서, 그러한 명단에 적어 놓은 책(사마방목, 문과방목)에 적힌그들의 본관, 징조부, 조부, 아버지, 외조부, 거처지, 합격하기 전의 아주 간단한 약력(대과의 경우는 소과의 합격 상황, 또는 벼슬을 한 기록) 같은 것 까지 모두 함께 입력하여, 이조 시대의 통치 계층에 대한 상세한 검색이 가능하도록 편의를 마련하여 놓았는데, 지금은 그 자료를 한국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모두 손 쉽게 검색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1999년부터 2000년까지 1년 동안 하버드대학에 와서 체류할 때 보니, 그 와그너 교수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 제자한 사람이 이 학교의 한국학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한국 사람누구를 이야기할 때면, 꼭 그 사람이 “누구 누구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어, 참 재미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번에 여기 와서 보니, 역시 와그너 교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인 런던대학의 여류 명예교수인 마르틴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박사가 영어로《조상들의 눈길 아래서Under the Ancesstors' Eyes》라는 매우 두터운 책(국배판 610쪽)을 하버드대학의 동아학술총서 제 378권으로 이미 2년 전에 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분은 이미 80이 훨씬 넘은 고령으로, 원래는 스위스 태생인데 하버드에 유학할 때 알게 되었던 그 학교의 동문이었던 영천永川의 조씨曹氏 청년과 결혼을 하였다가, 그만 일찍 상배喪配를 하였다고 한다(이 책의 첫머리에도 자기가 이러한 책을 쓰면서 자주 한국에 들릴 때 마다 도와준 시댁 가족들에 대한 감사인사가 적혀 있다)
이 분이 박사를 받은 뒤에 잠시 서울대학에 와서 공부를 할 때부터 비록 인사는 한 일이 없지만, 나는 그 분의 얼굴은 알고 있었고, 또 이태 전에 그 분의 이전의 영문 저서《The Confucian Trnasformaion of Korea》(1992)의 한국어 번역본을 오히려 미국에 잠시와서 있을 때 어떤 대학교의 동양학 도서관에 있는 것을 빌려서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인류학이나 민속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여 쓴 한국 전통 사회, 생활의 변천,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서 유교, 유학의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사람들의 일반 생활상이 바꾸어 가는가 하는 것을 아주 차분하게 다룬 매우 독보적인 책이다. 그 번역도 매우 훌륭하여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또 내가 요즘에 많이 생각하고 있는 이퇴계 선생의 사생활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힌트를 얻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낸 이 책을 보니 앞서 내었던 그 책을 낼 때까지도 저자가 미쳐 잘 알지 못하였던 한국의 여러 가문의 고문서, 또는 그런 고문서를 보고서 낸 한국의 새로운 저술들을 참작하면서 다시 위의 책을 좀 보완하기도 한다는 뜻으로 낸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분야에 내가 전문가는 아니라서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보아서 이 분야 연구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달리던, 이전의 나의 영남대학의 동료였던 고 이수근 교수의 《영남 사림파의 연구》나, 내가 요즘 자주 거론하는 서울대학의 현역 김근태 교수의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같은 책을 많이 참작한 것 같으나, 어떻든 영어로 이러한 분야에 이만한 중후한 책을 내었다는데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국배판으로 600쪽이 넘는 이러한 영어책을 내가 지금 돋보기를 쓰고서 자세히 읽어 가기는 힘들지만, 우선 목차와 이 책에 실린 사진, 도판, 그림표, 참고서목 같은 것만 우선 살펴보아도 매우 재미가 있다. 안동 지역의 진성이씨, 하회유씨, 의성김씨, 광산김씨, 봉화의 닭실(유곡) 권씨와 안동의 몇몇 권씨 가문, 영해의 재령이씨 등등 경북 지역의 여러 가문과 남원의 전주이씨, 삭녕최씨 등 전라도의 한 특정 지역에 관하여, 그런 가문의 세계世系를 도표까지 그려 가면서, 각각 소 항목을 설정하여 그런대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이 책에는 “전근대 조선 [사족의] 친족 관계, 지위, 지역성”(Kinship, Status, and Loclaity in Premodern Korea)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제1부은 기원, 제2부는 향촌의 재건, 제3부는 유학의 가르침과 실천, 제4부는 분열과 봉합, 제5부는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순서로 되어 있으며, 신라 고려 때의 지배계층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이조시대의 중·후기의 안동 양반이야기가 위주이나, 그 중심층에서 벗어났던, 서얼, 노비(종), 중인들의 이야기도 더러 들어 있다.
나는 이렇게 한국의 전통을 영어로 적은 책에서 서양에서는 없는 독특한 한국 전통을 나타내는 용어들을 어떻게 영어로 표현하는지, 또 그렇게 옮겨둔 말들이 서양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참 신기하게 생각된다. 예를 들면 내가 속한 집안 "영해의 재령이씨"를 The Chaeryong Yi of Yonghae라고 적은 항목을 보니 참 기묘하게 느껴진다. 다음에 이러한 한국 토속어의 번역어를 몇 가지만 나열하여 놓는다:
불천위제 不遷位祭 ancestral rites in perpetuity
외손봉사 外孫奉祀 worship of nonagtic grandson
신주 神主 spirit tablet본관 本貫 ancestral seat
종손 宗孫 lineal heir향약 鄕約 Comunity Compact
효행 孝行 Filial Acts서자 庶子 Secondary son
동 洞 Ward리 里 Village
그렇지만 아주 한국에만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말에 관하여서는, 그 말의 발음을 그대로 로마자로 적어두고서는 이런 말이 어떤 각도로 사용되는냐에 따라서 그런 개념과 비슷한 영어 단어를 더러 제시하여 두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핵심어 중의 하나인 “양반兩班”이라는 말을 어떤 경우에는 elite나 descent groups, 또는 upper-class family와 같은 말로도 옮기지만, 대부분은 그냥 yangban이라고만 적고있다.
이 책은, 책을 펴면 맨 앞에 어린 종손 감을 가운데 넣고 회갑을 기념하여 찍은 어떤 양반 가운의 1942년 가족사진이 한 장 처음 보이고, 그 다음에 본 책의 면수에는 들어가지 않는 18쪽이나 되는 한국 지도와 이 책 내용에 제시된 여러 가지 도표의 목록, 서문과 감사말, 고려와 이씨 조선의 국왕의 시호와 재위 연대를 밝힌 도표, 독자들을 위한 범례 말이 나온다. 이중에 감사 말에는 이 책을 만드는 동안, 신세를 졌던 여러 가지 연구기관과 재단은 물론 수 많은 한국 학자들과 서양 학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18쪽이나 되는 상세한 도론導論 뒤에 이미 말한 바와 같는 4장으로 나누어진 본론, 12쪽에 걸치는 결론까지 도합 415쪽이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데, 이중에 저자 본인이 찍었다는 사진이 여러 장 들어 있는데, 그 중에 의성 김씨 내앞파의 시조(김진) 어른의 초상화 사진, 학봉 종택의 현재 모습 같은 것까지 두드러지게 들어 있는 것을 보니, 특히 이 집안에 관한 연구가 많은 것 같이 생각된다.
그 다음의 200쪽 정도는 부록과 미주尾注, 참고서목, 색인 등이다. 안동과 그 인근 지역의 17개 집안의 선대 가계도, 남원 지방의의 2 개 집안의 선대 가계도가 제시되어 있는데, 이 중에 안동 권씨, 의성김씨의 세계는 각각 3파씩, 진성이씨, 광산김씨는 각각 2파씩으로 나누어 그려져 있으며, 나의 이 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성씨들 말고도, 고성이씨, 전주유씨, 영양남씨, 봉화금씨, 흥해배씨들이 가계도도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가계도는 이수건 교수의 책(영남사림파 연구 등)에도 자못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는데 많이 참고를 한 것 같다.
그 다음 미주가 438쪽부터 541쪽까지 100쪽이 넘고, 참고 서목이 543쪽부터 549쪽까지 46쪽이나 된다. 그 다음은 색인인데, 이것도 양반 그룹의 분파별 색인이 2장, 본관별 인명 영어 알파벹 순 분류색인이 6쪽, 일반명사와 용어 색인이 589쪽에서 609쪽까지 무려 20쪽이나 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책을 정말 치밀하고 꼼꼼하게 잘 정리하여 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내용에 관하여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자세히 읽어 보지도 않아서 얼마나 좋은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전에 내었던 같은 저자의 책에서 받은 좋은 인상 때문에 이 책도 매우 노작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안동 산골 양반들의 족보 이야기를 비롯한 이런 저런 낡은 이야기가 이렇게 서양 사람들을 위시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된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이러한 남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최근에 발견된 여러 가지 문서들[흔히 종문서라고 해서 공개되는 것을 꺼려 불 태워 버린 가문들이이 있음]이나 미공개 되었던 자료[문집에 넣기를 꺼려한 일상 생활에 관한 가족들 간의 사신이나 일기 같은 것]들을 보고서 실증적으로 분석하다가 보니, 더러 그 자손들이 지금껏 알고 있는 “자랑스러운” 측면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더러 색다르게 보이는 측면의 이야기도 가끔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책에서도 그런 점은 상통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여튼 지금 한국의 어떤 집안의 이야기는 좋던 싫던 간에 이미 이렇게 세계적으로 공개되어 가고 연구되고 있다니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