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18. 10;00
영하 6도까지 떨어진 날,
임진각 휴게소에는 내국인은 별로 보이지 않고,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빈다.
어느 여성 외국인에게 "Where are you from?" 하고 물으니
" I'm Incheon"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한다.
인천에서 일하는 외국여성에게 질문을 했으니 우문현답인가.
괜히 머쓱해져서 "Well come to korea!"라고 답하고 시선을
다른쪽으로 돌린다.
11시가 되자 내가 탄 곤돌라는 땅을 박차고 부드럽게 하늘을
난다.
하늘을 날아 민통선을 쉽게 통과를 하다니 언감생심(焉敢生心)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양구 가칠봉 204GP에 가까운 을지전망대에 오르려면 미리
양구군청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고,
18RG~19RG~21RG 등 세 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오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검문소가 한 군데만 남았고 많이 간소화
되었다.
최근 우크라이너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사람들은 군대(Military)와
무기에 관해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에선 94세 노인이 총 들고 전선으로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도 Senior army가 정식 사단법인으로 출범
하였다.
평균나이 63세로 최고령자는 75세로 여성도 포함되었고,
모의 전술사격과 시가지 전투 등 실전 훈련 체험을 하는
노병들이 기사화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자비로 참가비를 냈고 부상 등에 대비해 개인별로
상해보험에 가입하였으며,
내년부터는 국방부와 협의해 동원예비군 훈련에 준하는
입영훈련을 추진한다고 한다.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면 나이가 무슨 대수인가,
아직은 유사시 자원 전력으로 분류되는 나이기에 나 역시
총 들고 전선투입을 지원하겠다.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살만큼 살았으니 미래세대의 안위를
위해 앞장서야 진정한 노병(老兵)이 아닌가.
'자유의 다리'가 침묵을 지키고,
민족의 한(恨)을 삼킨 임진강이 말없이 흐른다.
들판에서 먹이를 먹던 '두루미'가 이따금씩 날아 오른다.
나는 두루미를 보면 고향 진천이 생각난다.
지금은 초등학교지만 옛날엔 학교 명칭이 국민학교였지.
60년대 국민학교 4학년 1학기 자연 교과서에
진천 이월지역에 서식하는 '두루미'가 천연기념물이며,
진천 초평지역에 군락을 이룬 '미선나무' 도 천연기념물로
수록되었다.
타 지역에 없는 천연기념물이 두 종류나 수록이 되어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컸었던 기억이 난다.
꽃 모양이 개나리꽃과 비슷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미선나무가 우리나라 고유의 수종(樹種)으로 천연기념물이라니,
요즘도 집 앞산에 자생하는 한 그루 미선나무에 사랑에 빠졌지.
하늘을 난지 10분도 되지 않아 민통선 안쪽 DMZ 스테이션에
안착한다.
밀리터리 로드(Military road)에서 30여 사단의 마크 중
내가 근무했던 제21 보병사단을 상징하는 백두산부대 마크를
만나니 반갑고,
50년 전 현역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며 잠시 설렌다.
판문점 회의실과 중립국감독위원회 캠프 사이에 놓인
길이 50m의 작은 다리 '도보교'를 재현한 도보다리와
평화정이 외롭다.
문재인과 김정은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키며 대화했던 다리,
그 다리 위에서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했고 건네준 USB엔
무슨 내용이 담겼을까.
그 비밀을 무덤 속까지 가져가려나,
어쩌면 내 생애에서 알 수 없는 mystery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또한 민통선 지역답게 지뢰(Mine) 지대이다.
지금도 지뢰표지판이 있으니 지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미확인지대인 모양이다.
현역시절 금강산 들어가는 길목인 43기지 근처 지뢰지대에
들어가 만삼을 캐다가 폭풍지뢰(발목지뢰)에 발목이 절단된
전우를 보며 지뢰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다.
그 병사가 지뢰지대에 못 들어가게 하는 동료 병사에게
"지뢰도 군번이 맞아야 터지는 거야"라는 말을 하는 순간
지뢰가 터져 21사단 지역에서 한동안 그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당시에 같은 행정반을 쓰는 병기탄약과 동료의 도움으로
볼 수 있었던 '폭풍지뢰', 'M16, M16 A1, M16 A2 대인지뢰',
'M19 대전차지뢰'의 모습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 정확히 각인
(刻印)되어 있다.
10;30
이번 코스는 미군이 철수한 캠프 그리브스이다.
미군들의 막사와 환경은 어땠을까.
색다른 경험을 안겨줄까 궁금해 철문 안으로 들어간다.
인식표도 만들어가며 영내를 둘러보다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마릴린 몬로'를 만난다.
나는 요즘 정치권 등 돌아가는 세태가 못마땅해 일반방송보다는
국방Tv를 잘 본다.
그중 좋아하는 프로는 본방야사, 역전다방(역사적인 전쟁을
다루는 방)과 본게임 등이다.
어느 날 '역전다방'이라는 프로에서 미군의 아이스크림 사랑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을 시청하였다.
우리나라 보급품의 종(種) 분류는 미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언젠가 군인이 죽으면 고기육(肉) 자를 써서 육종반납이라는
말을 하는 친구가 있어서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지적을
했었다.
보급에 대해 요약을 하면
1종은 주부식(主副食), 전투식량,
2종은 피복류, 개인장구류, 천막류, 내무생활 보급품, 수공구류,
3종은 석유, 연료 등 기름종류,
4종은 시멘트, 철근 등 공병자재,
5종은 화학탄 포함 병기탄약류,
6종은 병사의 사체가 아닌 PX 판매품목,
7종은 차량, 총포, 기계종류,
8종은 의무기재, 약품 등,
9종은 모든 장비의 정비지원에 소요되는 부속 및 구성품,
10종은 대민지원물자로 분류한다.
따라서 사람은 물자가 아니기에 6종이나 10종으로 분류가
되지 않는 영현(英顯)이며,
그날 토론에서 우리나라와는 다른 특이한 보급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다.
미군은 아이스크림이 1종 보급품에 해당하며,
2차 대전 당시에도 병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보급하였고,
심지어는 6.25 전쟁 당시에도 아이스크림을 보급하였다는 거다.
아이스크림은 병사들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항공모함이나 전투함정은 함내에 자체 아이스크림 제조시설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감탄을 한다.
또 한 가지 사실은
우리 병사에게는 1일 1인 백미 576g과 압맥 252g이 보급되는데,
미군은 시레이션 등 3kg에서 지금은 3.5kg이 보급된다고 하며,
전투병 1명에 대해 지원병력이 18명 정도가 된다니 미군의
보급과 막강한 전투지원 능력에 대해 혀를 내두른다.
13;00
400여 m의 가파른 산길을 올라
폭 1.5m, 길이 150m의 감악산 출렁다리에 섰다.
기념촬영을 하며 이 친구들과 나는 무슨 인연일까.
사람이 살아가며 맺는 인연은 통상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 등 3대 인연을 말한다.
그중 하나의 인연만 가져도 우주의 거대한 삼라만상(森羅萬象)
에서 대단한 인연인데, 우리들은 학연과 지연이라는 인연을
가진 친구들이다.
이중 어느 친구는 혈연까지 3대 인연을 다 갖고 함께 살아간다.
저곳 감악산(柑岳山 675m) 정상에 2019년 10월 29일 올랐다.
순식간에 흘러간 4년여 세월을 잠시 반추(反芻)한다.
그날 산중턱에 자리 잡은 범륜사를 지나 너덜길로 정상에
올랐다가 왼쪽 2충 팔각정으로 하산을 했는데,
어느새 4년이나 지나갔다니 이놈의 세월은 마하(mach)로
달려가나 보다.
단풍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졌고 초록만 점점(點點)이 남았다.
11월의 감악산은 선(線)을 쓰지 않고 점(點)을 찍으며 점묘화
(點描畵)를 그려 나가는 중이다.
감악산은 임진강을 끼고 있는 산으로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다투던 군사요충지로 알려졌다.
6.25 전쟁 당시 영국군 제29여단은 감악산 좌측 설마리와
중앙 장현리, 도감포 일대에 각각 대대병력을 배치하였다.
영국군은 중공군 3개 사단과 1,091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중공군 제63군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이 전투로 인해 미군 제1군단의 주력부대가 서울방어를 준비
할 수가 있었다는데 이 전투는 6.25 전쟁 중 벌어진 '60대
전투'의 하나로 평가된다.
사진촬영을 하며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국군에 대해
잠시나마 마음속으로 명복을 빈다.
14;30
오늘 마지막 코스인 마장호에 도착한다.
초록이 사라진 11월의 마장호 풍경은 쓸쓸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색소폰 소리는
바람소리,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기러기 날아가는
소리가 어우러진 자연의 교향곡을 깨고 소음으로 변한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들은 향어가 몰려든다.
이 녀석들은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길이 든 모양이다.
폭 1.5m, 길이 220m를 자랑하는 마장호 출렁다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체중 70kg의 성인 1,280명이 동시에 지나가도 되도록 설계를
하였고, 출렁다리 움직임을 수시로 계측하는 변위계측기도
설치되었다니 대단한 기술이다.
데크로 된 둘레길이 4.5km로 천천히 걸어도 1시간 반이면
충분한 사유(思惟)의 길을 걸었다.
15;30
살다 보면 잠시 멈추고 싶은 순간(瞬間)이 있다.
내가 원하던 게 성취되는 순간,
여행지에서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쳤을 때,
또는 사랑에 빠졌을 때 등 내 삶에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그 장면 속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이 온다.
어쩌면 그 순간들이 지금 아닌가.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십 년 인생을 같이 하고 있는 친구들이 옆에 있기에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영원히 멈추고 싶은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영원하길 바랐던 순간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금방 지나간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른다면 머릿속에 저장되었던 기억도 순간이
되어 사라지겠지.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기억도 영구보존할 수는 없다.
이별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요즘엔 문병도 다니지 않는다.
준비할 시간도 없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든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 되어 사라지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거고, 잊고 싶은 기억은 기왕에 저축된 행복한
기억으로 막으면 된다.
또한 기억이 떠나면 새로운 기억으로 채우면 되기에
하루 동안 행복한 추억을 많이 저축하였으니 한동안 나쁜 기억을
잊을 수 있으리라.
2023. 11. 18.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