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3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애통하여 터진 샘 》
슥 13:1~6
<한국의 스콜>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요즘 전주의 날씨가 독특합니다.
아침부터 오후 네 다섯 시까지 푹푹 찝니다. 사람을 아주 구워 삶아요!
그러다가 갑자기 한 줄금 소나기가 내립니다.
길어야 20분이나 30분쯤 소나기가 훑고 지나갑니다. 조금 서늘해집니다.
그러나 밤에는 여전히 열대야입니다. 에어컨 없이 잠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오후 내리다시피 하는 이 비를 ‘스콜’이라 부릅니다.
‘스콜’은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잠깐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오다가 그칩니다. 스콜은 비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도 여름에는 스콜이 일상화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금년 여름 정말 덥습니다. 견디기 힘듭니다.
☞ 여러분들은 이 여름, 더위를 어떻게 견디고 계십니까?
조금만 더 견디자, 조금만 더 버티자, 여름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가을 못이긴다!
맞습니다. 여름이 아무려면 가을을 이기겠습니까?
봄은 여름을 못 이기고, 여름은 가을을 못 이기고, 가을은 겨울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겨울을 이기는 것은 또 봄입니다. 사계절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순환하게 만드셨습니다.
여름 가면 가을 오고, 가을 가면 겨울이 옵니다.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만합니다. 할렐루야~
스가랴서를 설교하면서 떠오르는 것이 바로 “롤러코스터”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은혜 이야기를 한껏 띄워놓았다가,
그다음 주제는 급전직하, 하나님의 징벌에 관한 주제로 “얼음”을 만들어놓고 합니다.
은혜와 징벌~ 마치 롤러코스터와 똑같습니다.
☞ 오늘 본문 주제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지지라~” 할렐루야~
아침부터 푹푹 찌다가 스콜 한줄기 쏟아집니다.
<애통으로 터지는 은혜의 샘>
오늘 본문 앞 부분, 스가랴 12장에서도 롤러 코스터였습니다.
12장 3절에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무거운 돌로 만들어 보호하시겠다!”
예루살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은혜입니다. 한껏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12장 뒷부분 10절부터는 갑자기 싸늘해집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게 된다”(10절)
하나님은 그래서 자기 백성에게 애통하는 심령을 주십니다. 애통하라, 애통하라, 애통하라!
슥 12: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하나님의 ‘은총’에서 ‘애통’으로 롤러코스터가 내리막길을 달렸습니다.
스가랴 12장 첫 번째 주제는 ‘은총’ 두 번째 주제는 ‘애통’이었습니다.
13장은 어떤 주제로 시작할까요?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지리라는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은총과 애통을 지나 다시 은총입니다.
_ 오늘도 아침부터 오후까지 내내 푹푹찌는 더위의 연속이었습니다.
_ 그러다가 6시쯤부터 스콜이 내렸습니다. 오늘 스콜은 좀 길었습니다.
하나님의 징벌보다는 은혜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아예 징벌은 없고, 은혜로 평생이 지속되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됩니다.
연을 날리다가, 끈을 놓아주면, 그 연은 땅으로 곤두박질합니다. 끈 떨어진 연입니다.
하나님은 연줄을 꼭 쥐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마음껏 날도록 끈을 쥐고 계십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도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애통함으로써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집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그래서 “애통하여 터진 샘”
<애통하여 터진 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그냥 터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보고, 애통함으로써 샘이 터졌습니다.
우리가 애통했기에, 하나님이 샘을 열어주셨습니다.
(2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우상이 판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애통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득세하는 세상을 보고 우리가 애통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이 땅에서 주인노릇하는 것을 목도하고 우리가 애통해 했습니다.
2절에서는 ‘우상을 끊겠다’ 말씀하시고, 3절부터는 거짓 선지자를 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이 세상의 문제는 첫째, 우상 섬김 둘째, 거짓 선지자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를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처럼 가장하는 것들을 예배합니다.
우상은 “하나님 아닌 것이 하나님인 것처럼 사람의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도록 합니까?
그 역할 하는 사람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더러운 귀신’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우상뒤에 거짓 선지자, 거짓 선지자 뒤에 더러운 귀신 “우상, 거짓 선지자, 더러운 귀신”
이 셋이 트리오가 되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애통함이 없습니다.
애통은 이렇게 잘못된 현실이 냉철하게 보일 때 가능합니다.
‘지금은 문제가 없는 때이니, 먹고 마시자’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에게 애통은 없습니다.
☞ 그러면 지금이 애통할 때입니까? 먹고 마시자 할 때입니까?
<지금은 애통할 때입니다>
지금은 애통할 때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온갖 우상들이 횡행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어 거짓 선지자에게 달려갑니다.
이런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애통할 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집니다. 할렐루야~
서울의 어떤 목사라는 사람이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어쩌고 저쩌고’”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망령되이 일컬어도 이보다 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 주변에 사람이 넘칩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목사라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떠받듭니다.
떠받드는 목사에게 왜 그를 따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광 부린 것”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 거짓 선지자를 중심으로 내로라 하는 목사들이 모여서 지금 뭐하는 지 아십니까?
성경에도 없는 ‘기독청’을 설립하겠다고 합니다.
개신교가 가톨릭을 향해 지적했던 것 중의 하나가 로마 교황청입니다.
교황청, 그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기구입니다.
거기서 가톨릭이 잘못되었다는 반성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청’을 세우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지금은 애통할 때입니다.
<애통으로 터지는 샘>
오늘 본문 1절에서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선포되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으로 샘은 열렸습니다.
그러면 2천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성령강림이후 지금까지 쭈우욱 평안의 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을 우리는 ‘초림’이라고 말합니다.
‘초림’ 처음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초림 다음에는 재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재림을 약속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완결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애통하면서 살아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애통함으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완전히 열립니다.
오늘날에도 이 땅에 우상, 거짓 선지자, 더러운 귀신이 횡행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의 애통을 보시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2천 년 전에 선포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 5:4)
우리는 자꾸 착각합니다.
‘애통해야 하는 시기는 끝났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때부터는 은총만이 우리에게 있다.’
이렇게 착각합니다.
우리를 이렇게 착각하도록 하는 것으로 3가지가 있습니다.
우상과 거짓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입니다.
난데 없이 ‘기독청’을 만들겠다?
거기에 깃드는 것 3가지가 우상, 거짓선지자, 더러운 귀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애통합니다.
<애통하면서 말씀으로 무장하자>
살전 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많은 기독교인이 착각합니다.
‘우리가 불교에 넘어가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유교에 넘어가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회교에 넘어가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무신론에 빠지지 않으면 된다.’
이것은 다른 모양의 우상입니다.
여기에는 우상, 거짓 선지자, 더러운 귀신이 이렇게 미혹합니다.
우상 거짓 선지자, 더러운 귀신은 뜻밖에도 위장을 하고 우리 곁에 밀착하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로 가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바르게, 제대로, 똑바로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라고 말씀합니다.
입었다가 벗어도 좋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기까지 입고 있으라 하십니다.
잠깐 벗고 쉬어도 좋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상 거짓 선지자, 더러운 귀신은 뜻밖에도 위장을 하고 우리 곁에 밀착하여 있습니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겨드랑이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겨드랑이에 낀 성경이 빠지는 순간, 그곳을 우상, 거짓 선지자, 더러운 귀신이 점령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애통하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스펙타클 파루시아” (온고을교회 2023.8.13. 황의찬 목사 주일 설교)
주님 다시 오시는 광경입니다. 두 글자로 줄이면 “스파”입니다.
가슴에 찬 호심경을 확인하십시오,
머리에 쓴 투구를 확인하십시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