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홍엽(滿山紅葉)
시월의 끝자락, 여름 내내 싱그럽던 나무들이 어느새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우리의 마음도 뒤숭숭하고 쓸쓸하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1년여 동안 코로나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두문불출의 사슬을 풀고 수십 년간 삶의 터전에서 고락을 함께한 옛 동료들이 만났다.
시내를 벗어나니 자연의 생명체들은 생혼(生魂)을 발휘하여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가로수의 나뭇잎이 울긋불긋하게 물들이고 있다. 일행은 번거로운 일상에서 일탈하여 외각의 산야를 찾았다. 산길을 따라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담한 저수지가 있고 식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웬 산골에 어떻게 알고 많은 사람이 몰릴까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방에 안내되어 들어갔다. 잔에 술을 채워 건배하면서 식사를 했다. 그동안 못다 한 얘기가 물레가 실타래를 자아내듯 술술 풀려나왔다. 한마디라도 얘기에 끼어들려면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집안의 대소사가 쏟아져 나왔다. P는 코로나로 자식의 결혼을 알리지 않았다고 했으며, L 화백은 시골에 들어가 화실을 꾸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K는 원인 모를 이명으로 고생을 많이 했으며, H는 취미로 그림그리기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팔순을 맞은 맏형님은 지금의 보금자리가 재개발계획에 들어가 걱정거리가 생겼다고 했다. 킹콩 사진작가는 어디든지 사진을 담으려고 돌아다니곤 했는데 코로나로 그 일조차 손 놓고 있으며 시골의 전원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나와 반곡지를 갔다. 그곳은 영화 촬영지로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드라마 ‘사의 찬미’의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윤덕심과 극작가 김우진의 삶과 사랑을 그린 곳이다. 그곳은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봄이면 주변의 복사꽃과 어우러져 생동감을 주지만, 지금은 한랭한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청도를 향했다. 동곡 사거리에서 동곡재를 넘어 매전면 소재지를 갔다. 그곳은 내가 가끔 들러 피정을 즐기는 곳, 坒悟齊이다. 나는 그곳에서 텃밭을 돌보기도 하고 색소폰을 즐기기도 한다. 또 습작하기도 하고 경전을 봉독하며 묵상을 하기도 하는 수양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에서 가끔 내 삶을 반추해본다. ‘세월 열차에 편승하여 안이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는지’하고 말이다, 산야의 나무들이 만산홍엽으로 내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나무가 혹독한 추위의 문턱에서 바둥거리며 몸부림치듯 내 삶도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니라. 삶의 경각(頃刻)을 넘나들며 성찰과 반성으로 오늘을 지탱하고 있다.
황혼의 일몰도 내일 일출의 희망이 있기에 아름답게 보이듯 내 삶도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도록 ‘坒悟齊’에서 각성하기도 한다. 이제 여생에 서두르지 말고 한발씩 내디디면서 가지런한 마음으로 정화하여 깨끗이 되도록 말이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일행들은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환담하고 쉬다가 그곳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양측에는 무릉도원을 연상하는 감나무의 붉은 감이 감꽃의 무리를 이루었다. 그 꽃은 우리를 마중하였고 산허리를 넘을 때까지 배웅했으며, 산야의 만산홍엽은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