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영 시인의 시집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꽃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 새롭게 출범한 <가히 시인선>의 두 번째 시집으로 한혜영 시인의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가 출간되었다. 태평양 건너 이국의 땅에서 모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 중에서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이고 있는 한혜영 시인의 이 시조집은 한마디로 경이(驚異)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시와 동시, 동화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모범적 글쓰기'의 선례가 되어온 한혜영 시인의 이 시조집은, 한국 정형시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꽃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 이 시조집을 읽는 독자라면 한혜영 시인의 '절제의 미학에 몸서리를 치게 될 것이다.
시인의 말
그날 이후
내 한쪽 발은 줄곧 맨발이었습니다.
2024년 3월
한혜영
작가 소개
한혜영 시인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1989년 《아동문학
연구》 동시조 당선, 1994년 《현대시
학》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
예로 등단했다.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
탁소』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
다』 『검정사과농장』, 동시집 『치과로
간 빨래집게』 외 다수가 있다. 미주문학
상, 동주해외작가상, 해외풀꽃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목련
올해도
딱 그맘때 시구를 했습니다
포물선을 그리며
훌쩍 넘던 계절의 담장
마지막
꽃 한 송이가 글로브를 떠났지요
어떤 청춘이
공을 받아 애인에게 줬을까요
흠뻑 젖은 몸을 씻으러
구름 아래로 드는
그 목련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이명
소리의 세계는 약육강식 먹고 먹힌다
이도 잇몸도 없는 입으로 감쪽같이
소리가 배곯는 일은 세상에 없을 거다
소리들 모두 먹힌 고요한 밤 되어서야
존재를 알리는 아주 작은 소리 있다
큰소리 피해 도망을 와 내 귀에 사는 이명
추락한 자들의 모임
그의 곁에는 낙방한 자들만 쏙쏙 모였다
공무원 입사시험 떨어진 자는 물론이고
계단서 굴러 내렸다는 사내도 슬쩍 끼었다
깨진 꿈이 안 붙으면 자격이 되는 거다
마음의 장애거나 몸의 장애거나
미래를 깁스한 그들은 밤새도록 떠들었다
더는 무너질 것 없는 견고한 바닥을
안심하며 건배하다 불현듯 악을 썼다
추락할 높이마저도 상실했다는 절망감에
가족
가족이란 이 이름은 누구한테 받은 건가
두고두고 뼈가 아픈
약지로 쓴 혈서 같은,
이 세상 다 건너도록
밀서처럼
내가 품을
벽을 넘는 방법
어린 내 앞에 걸핏하면 벽이 놓였다
두껍고 단단하고 올려다보면 아득한
절망을 누군가 훌쩍 마술처럼 넘겨주었다
열 살 스무 살 때도 쉰 살에도 그러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발 구르며 쩔쩔맸다
예순이 되어서야 고요히 손 모을 줄 알게 됐다
추천사
한혜영의 시는 단도직입이다. 직방(直放)의 시학이라 할 만하다. 그 직방의 힘으로 삶의 다양한 파편들을 보여준다. 그 힘은 바로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터득한 고투(苦鬪)일터, 살얼음이 박히거나 붉은 피가 도는 타자의 삶은 곧 한혜영 그 자신에 대한 치환이며 기록일 것이다. 한혜영의 고국을 향한 그리움은 자주, 시시때때로 태평양을 건넌다. 그는 결코 날개를 멈추지 않는다. “거기 무슨 꽃이 있어/날개가 젖고 젖나//죽음이 거기에 있어/부르면 가는 거지”(「나비는」)처럼, 설령 그것이 죽음을 불사하는 일이 될지라도 꽃이 부르면 기꺼이 바다를 건너가는 나비가 된다. 생사가 한 몸이니 이승과 저승 또한 한 처소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음과 이별의 처연한 모습을 촌철살인의 언어로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이는 한혜영 시인이 세상과 사람살이를 깊이 연민하고 사랑하기에 가능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