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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남터성지 → 왜고개성지 → 당고개성지 → 용산성심신학교 → 용산성직자묘지
2.3Km 1.5Km 2.4Km 0.6Km
40. 왜고개성지
서울 국군중앙성당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되었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Manbant, 1803-1839년) · 샤스탕(Chastan, 1803-1839년) 신부와
앵베르(Imbert,1796-1839년)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었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바오로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 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었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암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몰래 유해를 거둔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삼성동)으로
세 성직자들의 시체를 옮겨 안장하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박순집 또한 부친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 볼리외 · 도리 ·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의 시신을 찾아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왜고개로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이곳에 모셨다.
박해가 끝난 후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Blanc, 1844-1890년)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자기 집안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법정에서 증언하였다.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으로
총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순집의 도움으로 1899년 10월 30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여 왜고개에 묻혀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잠시 모셨다가
명동 주교좌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삼성산에 모셨던 세 성직자의 유해 또한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10월 21일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모셨다.
1909년 5월 28일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유해가 발굴되어
역시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복을 앞둔 1924년 명동 성당 지하묘지가 개봉되어 유해 일부가
로마와 파리 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에 순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 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 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로 옮겨졌다.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에는 총 27위의 성인 유해와
성명 미상의 순교자 유해 1위가 모셔져 있다.
103위 순교 성인 중에서 현재까지 유해가 전해지는 분은 27위뿐이다.
이렇듯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위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2위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교회의 성지이다.
또한 왜고개 성지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 성지는 모두 10위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위가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갖고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따라서 왜고개 성지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군종교구는 2013년 12월 15일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
순례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순례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성지를 확장하여 새로 단장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새로 단장된 성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과 기도처 등이 마련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41. 당고개성지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9명의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이며,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고 거룩한 순교 성지다.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 가던 기해년 12월 27일과 28일
양일(음력)에 걸쳐 이곳에서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당시 당고개는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곳은 아니었지만,
다른 형벌로 죄를 지은 죄인들은 처형한 적이 있었다.
일반 신자들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고, 사제들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는데
설을 앞두고 상인들이 닥쳐올 설날 대목장에 방해되지 않도록
처형 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다.
1839년 12월 27일에는 박종원(朴宗源, 일명 이선, 1792~1840, 아우구스티노),
홍병주(洪秉周, 1798~1840, 베드로), 권진이(權珍伊, 1819~1840, 아가타),
이경이(李瓊伊, 1813~1840, 아가타), 손소벽(孫小碧, 1801~1840, 막달레나),
이인덕(李仁德, 1818~1840, 마리아), 그리고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모친
이성례(李聖禮, 1801~1840, 마리아) 7명이 순교하였으며,
다음 날에는 홍영주(洪永周, 1801~1840, 바오로), 최영이(崔榮伊, 1818~1840, 바르바라),
이문우(李文祐, 일명 경천, 1809~1840, 요한) 3명이 순교하였다.
이곳 순교자 10명 중에서 갓난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한 9명이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이로써 당고개는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은 순교 성지가 되었다.
그 후 6년 뒤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를 향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서
이곳에 수레를 멈추고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김대건 신부의 풀어진 상투를 포졸 하나가 다시 묶어 주었고,
김대건 신부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좌우로 돌렸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는 처형지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시성식 후 용산구 신계동 1-57번지에 있는 문배산 마루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하고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2008년부터 주변 아파트 건립 공사로 기념비는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가 정리된 후 2011년 다시 성지가 조성되었다.
42. 용산성심신학교
지금은 성심 여고 교정 안에 속하게 된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예수 성심 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여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됐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되어 축성되었다.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82년 교사와 함께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 신학교 등
여러 군데의 신학교가 생겨났고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수원, 대전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 가톨릭 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에 그 유해가 모셔져 있었던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31년 조선 교구가 북경에서 독립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갖은 고난과 질병을 이겨 내고 조선 땅으로 입국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조선 땅을 눈앞에 두고 조선을 향해 떠난 지 4년 만에
4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비록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개척해 둔 입국 경로를 따라
곧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들어옴으로써
한국 교회는 완전하게 조직을 갖춘 명실상부한 교회가 된 것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조선 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대주교는
1877년 한국에 입국해 1933년 서울에서 선종할 때까지
중간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이국땅인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했다.
박해 시대에 활동한 적이 있는 뮈텔 주교는 한불 조약 이후
지하 교회에서 해방된 교회의 모습을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예수 성심 신학교, 종현 성당, 약현 성당을 짓는 한편
각 지방에서의 본당 창설에 많은 지원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순교자 현양과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순교복자의 시복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유명한 뮈텔 일기는
자신이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임종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일까지 써 둔 일기로
총 6천여 면의 분량에
주교 개인 사정과 재임 동안의 교회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우리 한국 교회로서는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그는 "뮈텔 문서", "기해 일기" 등을 저술하고
황사영 백서의 원본이 발견되자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학계에 배포하고
그 원본을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다.
현재 황사영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 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고,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성당, 절두산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2010년 노후화된 성당 외벽과 주변에 대한 보수공사를 시행하고,
2011년에는 성당 내부에 대한 보수공사를 진행중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43. 용산성직자묘지
한국 교회에서 언제 이곳에 성직자 묘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887년 이 일대를 신학교 부지로 매입한 직후로 추정한다.
당시 조선대목구는 용산 함벽정(현 원효로 성심 여자 고등학교 자리)과
삼호정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여 여주군 강천면에 있던 예수 성심 신학교를 옮기고,
삼호정 뒷산을 성직자 묘지로 정하였다.
현재 용산 성당 내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는 주교 4위, 신부 64위,
신학생 2위, 치명자 1위 등 모두 71위가 안장되어 있다.
특히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끝내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1931년 10월10일 이곳으로 이장함으로써
성직자 묘지로서 의미가 더 깊어졌다.
1961년부터 시작된 '성직자 추모 미사'는 해마다 11월 2일 오후 2시에
교구장과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봉헌하고 있다.
이곳 용산 성직자 묘지는 지금도 신자들의 신심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으며,
한국 교회의 자부심이자 신앙의 토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