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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에세이 (31) 교회의 변모
세계의 변방, 팔레스타인의 시골 어부들을 통해서 시작된 작은 그룹은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빠르게 세계의 중심부로 향하였고, 그 한 가운데 둥지를 틀었으며, 마침내 세상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코스탄티노(Costantino)로 대변되는 황제들의 개종은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를 가져왔고, 이 새로운 국면은 그들이 모진 박해 에도 지켜낸 신앙은 아니었을 지라도, 교회의 외적인 모습에 특별한 자국을 남기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코스탄티노의 전환’ 이란 대사건 후의 교회와 초기의 교회가 모든 면에서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몇 몇의 변화는 교회가 새로운 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 변화를 실감하기 위해 먼저 교회가 공적 법률의 주체가 된 점을 기억해 봅니다. 이제 교회는 세상의 그 누구와도 법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소수의 종교 집단으로 받아야 했던 정치적 의심과 사회 적대감을 몸으로 견뎌냈고, 국가의 박해를 믿음으로 이겨내던 그들이, 이제 이전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한 발 나아가 교회는 공적인 명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모든 곳에 황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은 교회들이 건설되기에 이르렀고, 321년경이면, 그리스도인의 주일 축제는 한 주간의 시작을 의미하였고, 사회 전체를 위한 휴식과 예배의 날이 됩니다. 국가의 재정적 지원은 그리스도교가 스승의 계명인 이웃 사랑의 실천을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게 하였고, 이것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주교들은 제국의 새로운 종교의 대표자들로서 국가로부터 두드러진 특권과 선물들, 예를 들면, 세금의 면제와 이와 비슷한 선물들을 받게 되었습니다. 318년이 되면 주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연관된 시민적 소송의 심판권을 부여 받게 됩니다. 일련의 변화에 따라 주교들은 명예에 걸맞는 호칭과 영예의 권한들을 갖게 되는데, 그들의 새로운 지위는 외적 표식에서 드러났습니다. 영대와 팔리오1)를 지니고, 모자를 쓰고, 특별한 양말과 반지를 지니게 됩니다. 지위에 따라 그들은 주교좌를 가질 권한과 향을 받고, 손에 입맞춤을 받을 수 있는 권한과 찬양의 합창 또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절적인 요소들은 황궁의 예절들에서 기인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귀족의 표식들이 주어짐은 그들의 임무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도 어쩔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오는데, 주교들은 더 이상 섬기는 이들이 아니라 고귀한 이들처럼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를 표현 하는데 있어서도 반영되는데, 교회의 예술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군주의 특징들로 그려집니다. 예를 들면 황좌와 올려진 손으로 황실의 모습을 취하거나, 황금 관, 궁궐 등의 상징들 안에서 그려졌습니다. 예절의 장소인 성당도, 황실의 실내처럼 승리의 아치와 천개(Baldacchino)의 장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신심 행위들 안에도 이방적인 요소가 들어오는데, 순교자들과 그들의 유물에 대한 공경 등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이방 로마적 요소들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모든 주교들이 이런 것들을 받아들임에 동의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교회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갔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사 에세이 (32) 교회의 조직과 삶 (1)
박해 중에도 그리고 박해를 벗어나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된 이후에도, 고대 교회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이 세상에 현실화할 것인가?’였습니다. 현실화란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어떻게 가시적 통일성을 갖게 하고 조직화 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신앙의 신비의 전례적 거행의 통일과 그리스도 신앙 고백의 공식화야말로 가장 앞선 주제들이어야 했고, 그리스도교적인 도덕의 실천 또한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현실화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됩니다. 교회의 편에서 볼 때 이것들은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국가 혹은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원칙을 정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형성된 전통과 성경의 인도를 통해 현실에 상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이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역사적 현실화의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특별 교회와 지역 교회
그리스도교는 몇몇 사람들의 모임만 있다면 어디든지 공동체를 건설하였고, 공동체를 통하여 진리에로 사람들을 초대하였고, 모인 이들은 열렬한 삶과 도덕적으로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가시적 공동체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공통적인 세례와 성찬례의 거행, 그리고 은혜와 각 개인의 카리스마(은사) 위에 건설되었고, 이 외에도 다양한 임무들 위해 건설되었습니다. 글자 그대로 충만한 의미에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개별 교회는 통교와 친교를 통해 하나이고 참된 의미의 교회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이 교회란 하나의 지역에서 개별 공동체의 너머에 있는 지역 공동체들의 총합과 그 지역 전체를 의미하는 ‘교회’였습니다.
서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보편 교회가 중앙 집권적 조직을 갖는 것이 친근하고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로마 교회의 주교, 즉 교황의 중심적 권위가 조직적, 법률적 그리고 신학적 영역에서도 중심적 권위를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은 주로 서방에서 전개되고 성장하였고,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교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에서부터 합의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위에 짧게 언급된 것처럼 혹은 지금의 교회의 모습처럼 중앙 집권적인 하나의 조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모습은 세상 전체를 품는 공동체의 그물망과 같았고, 그 응집력은 지역마다 동일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개별 혹은 특별 교회들의 자율권이 존중되면서 교회들 사이에 ‘차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전례를 예로 든다면, 서로 다른 전례의 순서와 양식, 날짜와 축제들을 갖고 있었고, 교회의 구조는 지역적 특별함을 가졌습니다. 규율적 측면에서도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신약성서의 정경은 오랜 시간 다르게 갈라져 있었고, 신앙 고백의 형식과 내용도 서로 같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현상은 공동체의 신심들, 즉 기도와 단식과 보속 등에서도 같은 현상을 보였습니다.
신학적 측면에서도 고대 교회는 다양성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교부들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교육과 조직 그리고 전통과 전망에서 서로 다름을 발견합니다. 개별, 특별 교회들은 그들의 역사 문화적 조건의 다양성에 따라 자신들의 고백들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리아나 혹은 아프리카 그리고 갈리아에서 신앙의 고백들이 서로 동일한 형식을 띄지 않았었습니다. 교회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 일치의 증거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5년 11월 22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33) 교회의 조직과 삶 (2)
우리는 지금 고대 교회의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의 이런 다양성이란 측면을 온전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의 관계 안에서 이런 다양성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교회 생활에서의 다름과 다양성은 오히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증거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불일치와 다툼과 논쟁들도 종종 그들 안에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단일화하려는 의지가 고대 교회의 특성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지역 교회들의 언어적 상이성 안에서도 같은 믿음과 그리스도의 같은 말씀을 선포한다는 확신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었고, 단일화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모든 개별 교회들도 사도적 기원의 토양 위에 세워졌음을 주장했지만, 서로를 존중한 사실이 이것을 뒷받침 해줍니다.
실제로, 여러 지역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였습니다: 즉 자기들의 도시와 지역에서 어떤 사도가 설교했으며, 자신들의 교회는 그분에 의해서 설립 되었고, 그분이 첫 번째 주교로 착좌했으며, 그곳에서 죽고 묻히셨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개별 교회들은 자신들이 사도적 전통에 머물고 있다는 확신 안에서 개별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성장하지만, 한 사도가 다른 사도들과 일치한 것처럼 다양한 교회들은 서로의 일치를 이루어 갔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되어 가는 것은, 믿음에서의 일치와 지역과 개별 교회들 간의 통교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어로는 koinonia(코이노니아), 라틴어로는 communio(꼼무니오)로 표현되는 이 ‘친교’ 개념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개의 용어는 모두다 ‘통교’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또 교회가 같은 믿음 안에 모여진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란 의미에서 교회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초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 그리스도인들 간의 하나 됨을 통해 개별 교회들의 친교를 이루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였고, 이 친교는 분명한 형식 안에서 특히 성찬례의 거행에서 실현됩니다. 성찬례의 거행은 그리스도와 하나 됨과 교회와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찬례의 장소는 지역의 교회였습니다. 성찬례의 거행자들은 거기에서 하나의 빵과 공통의 믿음의 고백과 똑같은 희망 안에서 온전하게 친교를 경험하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4세기에는 ‘친교’란 낱말이 성찬례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큰 도시들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곳에 모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4세기부터는, 적어도 의미와 목적에 따라 설립된 전례 거행에 있어서의 며칠 동안은 도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했고, 그렇게 그들은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와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투르의 교회에서 이런 것들이 보여집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거행할 장소를 갖지 못하는 경우에, 그곳에 각각의 교회들의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성찬례는 주교의 인도에 따라 공식적으로 거행되었고, 주교는 친교의 표징이었으며, 이름 붙여진 지역 교회들에 모인 공동체에게도 이 성찬례의 축성된 ‘빵의 조각’들이 보내졌습니다. 이 빵들은 성작 안에 놓여 졌고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을 연결하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공동체와의 친교가 단절된 경우가 아닌, 합당한 이유로 이 거행에 참석하지 못한 이에게 ‘빵’이 나누어짐이 확인되기도 합니다. [2015년 12월 27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34) 교회의 조직과 삶 (3)
초기 교회 공동체들은 다양성 안에서의 점점 하나 됨과 일치를 지향하며 성장하게 됩니다. 지난 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친교’란 개념 안에서 그들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표지는 친교라고도 불리던 ‘성찬례’였습니다. 이런 ‘친교’는 서로 다른 공동체들 사이에서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 교회 공동체들 간의 친교의 표지로 중요하게 여겨지고 기능했던 것을 들라면 그것은 ‘서신 교환’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1세기경에 다양한 교회들 간의 빈번한 서신 교환은 특징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성경이 아닌 가장 오래된 문서는 로마의 공동체로부터 코린토의 공동체에 보내진 소위 말하는 ‘클레멘스의 첫 번째 편지’일 것입니다. 이 서신들은 여러 지역의 교회들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교회 공동체들은 서로간의 소통을 원했고, 특히 어려움과 분쟁의 상황에서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이 서신들의 어조는 주로 권고, 포교, 비평, 지적, 교정, 지도 등으로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들 간에 이미 법적인 의존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친교는 내면적으로 서로 동등한 교회라는 생각에 상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서기 160-170년경에 코린토의 주교 디오니시오(Dionigi)가 자신이 어떤 법적인 권한도 가지 않는 지역의 교회들과, 심지어 대단히 멀리 떨어진(예 : 스파르타, 아테네, 로마 등) 여러 교회들에 일련의 편지들을 씁니다. 이 편지들의 주제들은 주로 그 시대의 주된 염려들과 관련된 것으로, 올바른 믿음, 이단, 평화와 일치에 대한 자발적 참여와 이 외에도 그리스도교적인 열성과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편지에서는 권고 받는 교회의 사도적 기원의 찬란함 혹은 과거의 모범적 모습들이 기억되었고, 칭찬과 위로의 말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성경의 해설과, 성덕에 대한 고양과, 사목적인 지도 등에 대한 가르침들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이외에도 죽음, 주교의 선출 그리고 박해와 새로운 이단의 위협들에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도 질문과 조언들을 주고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신의 교환들은 서로의 앎을 깊게 하였고 그들을 가족처럼 가깝게 연결하였습니다. 이 서신들은 구체적인 상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서들로 보관되었고, ‘친교’의 살아있는 증거처럼 매번의 모임마다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실 우편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서신들을 보낸다는 것은 공동체들 간의 아주 긴밀한 접촉의 결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서신들은 전문적인 그리스도교 순회 설교자들이나 적당한 사람들 편에 보내졌고, 이런 소식 전달자들은 수신처에 도착하면 거기서 무료로 숙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소통과 친교를 강화하였는데, 이런 손님에 대한 환대는 고대 교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덕이었습니다. 고대 교회에서의 환대는 그리스도교적 실천처럼,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 통교의 숨겨진 또 다른 표현의 하나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서신 교환에서의 남용을 피하기 위해서 주교는 서신 전달자에게 외부 공동체들에서 그의 정체성을 증거할 것을 함께 주어 보냈습니다: 그것은 ‘친교의 편지’나, 추천의 편지 혹은 평화의 편지라고 불렸는데, 이런 공인 문서는 실천적인 면에서의 장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개별 그리스도인들과의 아주 많은 접촉에 있어서 정규적인 교환을 보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실천에 있어서 문제들도 생기게 되는데 이 경우는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016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35) 교회의 조직과 삶 (4)
교회는 성찬례와 서신 교환을 통하여 ‘친교와 일치’를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서신 왕래에 있어서는 몇 가지의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주 로 그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의 주교들이 이단과 혹은 개인적인 죄로 인해 이 ‘친교’에서 제외되는 이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주교들의 공인 편지들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친교와 일치’를 잃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주교들을 제외한, 정통 주교들의 목록을 공동체 안에 비치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실제로, 죄와 분쟁의 결과로 ‘친교’가 줄어들기도 하는데, 이것은 교회에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왜냐면 마치 단일성과 평화처럼 ‘친교’란 그 시대 교회에 있어서 하나의 현실이고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역사의 흐름 안에서 현실 교회는 여러 개의 교회들로 쪼개지면서, 보편 교회는 그의 친교와 일치를 지켜내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죄와 이단은 지역 교회들과 개별 교회들간의 일치라는 끈을 약하게 했지만, 또한 이런 분열은 공동체 자체의 내부에서도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후자의 경우, 교회는 파문의 조처를 취했는데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친교’로부터 축줄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묘사했던 교회 구조에서 ‘친교’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자는 누구나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친교에서 제외시킬 권한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주교가 신자와 사제들 혹은 다른 주교들에 대해서 그런 권한을 행사하였고,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신자 혹은 공동체가 주교에 대해서 같은 권한을 갔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는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호간의 ‘친교’에서의 축출을 의미하는, 파문의 가능성은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초래했고 교회의 혼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규율의 문제들과 혹은 권력의 이유들 때문에 발생된 지속적인 분쟁 안에서 ‘친교’도 ‘파문’도 자신에게 유용한 전략적 무기처럼 이용되고 남용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 통교와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적 일치와 합의를 가르는, 근본으로부터 번민하게 만드는 원칙들이 되기에 이릅니다.
지역 교회와 개별 교회들간의 일치의 실천에 있어서 시노드(synodo)와 공의회(concilio)가 다시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2세기의 하반기의 중반쯤부터 여러 차례의 시노드들이 열립니다. 이런 모임에는 같은 관할 구역의 이웃한 교회들이 서로 모였고, 이후에 시노드는 원칙적으로는 신자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모든 교회들의 모임이 됩니다. 이 시노드에는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교회적 질서와 관계된, 교의적인, 그리고 전례와 규율에 관계된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해서 주교들이 교회들의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공동의 결정들은 공통의 실천을 가져왔고 그것을 통해서 지역 교회의 일치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결정들은 다른 지역의 모든 교회들에게도 기록을 통해서 통보되었습니다. 2세기 후반의 초기 시노들의 역사적 의미는 그리스도교의 특별한 조류인 단성론(monotesimo)이란 이단의 발생과 이 외에, 개별 교회들간의 부활절의 날짜에 관한 논쟁들이나, 주로 보편 교회의 예배와 관련된 문제들이었습니다. 비록 시노드가 모든 이견을 좁히지는 못했을 지라도, 시노드는 친교를 실현하기 위한 그리고 어려운 때에 교회를 구하는 이상적인 도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주교직을 통해서 지역 교회들을 넘어 교회의 일치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합의를 도출해 내지 못하고 저항이 있는 경우 다수가 소수에게 ‘친교’를 지키기 위한 의무를 지우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시노드의 결정과 실천에 있어서 주교들과 지역 교회들 간의 권위의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큰 도시의 주교들은 그들 지역의 교회의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맡기 위해 피할 수 없이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교회는 완전할 수는 없지만, 시노드를 통해 발생하는 문제들 안에서 또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교회사 에세이 (11) 선교의 방법들과 개종의 동기들 (1)
오늘은 선교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가져오게 된 이유들과 선교의 방법들을 살펴볼까 합니다. 초기 십 여 년 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의 선포자들은 ‘선교야말로 오직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라고 생각했던 ‘순회 설교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문적인 설교자들인 셈입니다. 그들은 마태 복음 10,9-14절의 말씀처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않고…… 여행 보따리엔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고’ 설교에 전념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은 3세기경까지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이런 선교사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이런 순회 설교자들의 노력의 결과, 그리스도교는 여러 통로를 통해 풍요로운 성공을 거둡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자체’가 그런 성공의 원인이란 것입니다. 새로운 신앙과 그들의 공동체적 삶이 이방인들의 주목을 끌었고, 그들 삶의 양식을 바꾸게 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들과의 일상의 접촉이 ‘전염’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선교에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한 몫을 하였고, 이것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듣게 했고, 설득함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솟아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후 몇 십 년 동안의 선교는 어떤 특별한 소명을 받은 선교사에게만 맡겨진 특별한 임무는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만나는 모든 곳에서 이뤄진 직, 간접적인 반응의 결과였습니다. 이즈음 교회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 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선교는 주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부분에서 이루어졌고, 상업 행위와 사회, 문화적 활동을 통해 이뤄지게 됩니다. 이런 선교는 주목을 받지 않았고, 통제되지 않았고 특히 낮은 신분에서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특히 노예들 사이에서 영향을 발휘했다고 전해집니다.
교회는 2세기 말까지 선교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프로그램이나 방법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교회는 어떤 선교의 조직을 알지 못했고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선교는 어떤 설교적, 신학적 중심이 잡힌 교회를 건설하지는 못했습니다. 선교의 상황은 대륙과 나라마다 달랐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오직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고, 세상 끝까지 이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믿음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에 있어서 현실적인 교회 건설의 임무는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규칙과 계속성을 갖는 계획된 조직도 없었고, 오직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개별적이고 ‘고립된’ 행동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노력은 유다교 안에 그리스도교를 빠르게 스며들게 했고, 로마 제국이 도달하지 못한 지역에까지 그리스도교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선교의 상황은 이렇듯이 개별적이고 다양했습니다. 우리가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조직이나 도구를 갖지 않은 각자의 직접적인 노력의 결과물이었습니다. 4세기경이 되어서야 그것도 몇몇의 주교들만이 선교에 관한 어떤 계획과 조직을 시도하는데, 그것도 농촌 지역의 선교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과 그 외의 모든 지역에서, 그러나 어떤 방법과 수단도 갖지 않고 선교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전례 그리고 공동체의 삶과 도덕이 백성의 주의를 끌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교가 갖는 혼합주의적 성격과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응화’한 노력의 덕분에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런 선교의 역군은 성직자들이었고 평신도들은 점점 선교에서 제외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4세기경이 되면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기엔 하나의 이방인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선교를 강조하기에 이릅니다. [2015년 6월 14일 연중 제1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교회사 에세이 (12) 선교의 방법들과 개종의 동기들 (2)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폭발적이었고, 4세기 말이 되면 잇달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황제들이 출현하는데 황제들의 법령과 정치 제도를 통한 호의는 그리스도교 선교에 큰 도움이 됩니다.
기원적으로 볼 때, 선교의 방법은 시나고가와 광장에서 이뤄진 설교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우리는 이 최초의 선교사들이 히브리인들에게, 무엇을, 또 어떻게 설교하였는지 마르코(1,15)와 사도행전(7,2-53)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온전히 히브리적인 개념과 종교의 영역 안에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이런 성공의 이면에, 제국의 교회로 성장한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었고 복음의 첫 수신자들이었던 히브리인들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이제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인 선교 방법이었던 설교의 ‘주제와 내용’ 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설교가 유일신론자들에게 행해졌고, 새로운 도덕과 임박한 심판을 설교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심판자요 구세주라고 가르쳤다는 점입니다(사도 26,60 참조). 여기에 말씀과 기적, 예수님의 삶과 고통, 또 모두를 위한 죽음이 덧붙여집니다. 이런 설교의 내용들은 듣는 이들을 세속적인 희망들에서 눈 돌리게 하였고, 삶의 두려움과 위험에 처한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참된 구원을 간직한 종교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설교의 주제와 형식들은 주교들에 의해서 새롭게 구성되고 이것은 이방인들의 호응을 얻게 됩니다. 이런 노력은 ‘신앙의 수용’, 즉 그들이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겪는 어려움을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몇몇의 주교들은 이방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당시의 철학과 대화하고, 그들의 철학적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개종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자체와 진리를 세상과 시대에 맞게 새롭게 선포하려는(aggiornamento)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개종의 이유는 다양하기에 다 설명해낼 수는 없지만,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의심 없이 그리스도교가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응답한 결과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철학과 종교는 세상의 혼란에 비젼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새롭고도 효과적인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진리를 앎으로써 인간은 운명의 탓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 그들을 열광케 했고, 그리스도로 귀의하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에 매료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과 그리고 오랜 시간 지켜본 순교자들과 거룩한 삶의 귀감인 4세기 수도자들의 존재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에 눈뜨게 했던 것입니다.
한편 교회는 개종을 위해 필요한 ‘조항과 형식’을 결정하고 제공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교회의 다양한 사회 활동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전례와 성경의 오랜 역사성은 또한 그들의 주의를 끌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주된 이유들만이 개종을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대중적인 것들도 이유가 되었는데 성사의 마술 같은 개념과 순교자들과 성인들에 대한 신심과 공경의 행위와 축제들이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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