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갈라디아서 5:16-24)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은혜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고 삽니다. 우리 눈은 다른 사람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키, 헤어스타일이나 의복을 봅니다. 마치 유리창문을 통해 밖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유리에 수은을 입히면 거울이 됩니다.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을 보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만 보입니다. 성경 말씀은 유리에 수은을 입힌 거울과 같습니다. 내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얼굴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이빨 사이에 뭐가 끼었는지, 의복은 깨끗한지. 사람들은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다듬고 헤어스타일을 고칩니다. 거울을 통하여 내 자신을 보듯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 마음, 나의 영혼을 보시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고정관념 중에 하나가, 착각하는 고정관념중 하나가 자신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어떤 코미디언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못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 얼굴을 보면서 익숙한 내 얼굴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얼굴이 문제가 아닙니다. 얼굴이야 자기가 잘 생겼다 하고 살아도, 그래도 괜찮습니다. 순간적인 착각은 영원한 쪽팔림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 영혼입니다. 내 영혼이 볼품 없는데도 내 영혼이 아름답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이라는 거울을 잘못 쓰면 영적 나르치시즘, 자기도취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나르치스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 잘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허구한 날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습니다. 거기엔 세상에서 제일 잘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소년 나르치스는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영적 나르치시즘, 자아도취를 경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의 하나가 자아성찰입니다. 자아성찰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고 현재의 생활에서 행복을 찾고, 미래에 다가올 죽음의 불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성찰해서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잠언 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진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벧전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그 몸에 대신 담당 하신 것입니다. 갈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했습니다.
동일한 그 십자가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좀 더 복잡하고 심오한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이 불안하고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육을 따라 사는 것은 이 진리에 대하여 모르거나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깊은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자아를 죽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받을 말씀은
첫째, 우리는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의 정욕과 감정, 욕심을 죽여야 합니다. 그 정욕과 탐욕이라고 했는데 정욕이란 감정을 말합니다. 탐욕이란 육신의 욕망을 말합니다. 사람의 행복감이나 마음의 평화, 이런 것은 대체로 감정의 영역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거나 속이 상하거나 상처를 받거나 하는 것도 감정의 영역입니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육체의 욕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육체가 죽듯이 우리의 육에 속한 자아를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8:8절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느라’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6장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체와 함께 그 정과 탐욕을 못 박아야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혈기를 죽이고 살아라, 분노를 죽이고 살아라, 미운 마음을 죽이고 살아라 질투하는 마음도 죽이고 살아라 하십니다. 감정의 충동을 따라 살면 스스로 멸망할 뿐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했죠. 아벨은 양을 잡아 제사했고 가인은 곡식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았지만, 가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를 않았습니다. 가인은 동생에 대한 분노로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감정이 격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인은 삶의 근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근본인 땅을 갈아도 곡식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떠돌이가 됩니다. 땅은 저주를 받았고, 그는 피해망상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불안에 떨며 살았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엘가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는 한나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둘째 아내를 들였는데 그는 브닌나라는 여인입니다. 브닌나는 아들과 딸을 낳았습니다. 브닌나가 한나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곧잘 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감정의 격동을 기도로 이겨냅니다. 브닌나가 도발을 해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조절했습니다. 혈기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위대한 사무엘이라는 선지자의 어머니가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내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나도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나의 육이 죽어야 영이 살고,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내가 죽어야 속회가 삽니다. 교회에 와도 여전히 육이 살아 있고, 자존심이 살아있고 혈기가 살아있고 속회로 모여도 쓸데없는 이야기 하고 믿음 날아가는 소리하고 그러면 영이 죽고 교회가 죽고 속회가 죽고 선교회가 죽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 심판의 경고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땅 끝으로 도망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배가 바다 가운데에 왔을 때 갑자기 풍랑이 크게 일어나고 배가 뒤집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파도가 웬일이냐? 조사를 하는 중에 요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요나가 ‘이 파도는 나의 연고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했고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잔잔해 졌습니다.
요나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거슬렸더니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요나가 자신을 죽이니 모든 배의 승객이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육으로 살고 감정으로 살고 욕심으로 살면 아주 위험한 일이 일어납니다. 나만 아니라 주변 사람도 위험해 집니다.
자아의 죽음이란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신비한 방법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을 죽였더니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고 요나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죽인다고 내가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니라 육은 죽고 영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자아를 죽이고 살려면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육신을 따라 살수도 있고 영을 따라 살수도 있습니다. 롬8:5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감정을 조절하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을 따라 살고, 감정 내키는 대로 살고 혈기를 부리며 살기가 쉽습니다.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있습니다. 그는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행구 사이에 숨을 정도로 낯가림이 심한 소심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된 후에 사람이 변했습니다. 욕심이 많았고 명예심이 많았고 질투심이 많았습니다. 전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고서는 자신의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전쟁에서 하나님이 금지한 소와 양을 노략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과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다윗이라는 어린 소년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열광했습니다. 사울이 이것을 보고 마음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는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비파를 연주하는 다윗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후 사울은 이 잘못된 감정과 혈기 때문에 자신을 망치고 가문을 망치고 맙니다. 그는 길보아 전투에서 패전하고 자결로 자신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나는 죽어도 나의 감정을 죽이고 혈기를 죽이고 살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육을 죽이고 정과 탐욕을 죽이고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전주에 전원교회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좋은 교회를 지었습니다. 교회는 빚을 7억 졌습니다. 목사님은 빚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거기에다 가시 노릇을 하는 권사님이 있어서 목사님이 스트레스를 다블로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임하고 선교사로 갈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지 뇌에 문제가 있어서 수술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마침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차화연이라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남편은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들은 교외에 전원주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좋은 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회 둘째 날, 차집사님이 교회로 들어서는데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허름하고 남루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차집사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렇게 잘 해 놓고 살면서 내 집은 이렇게 거지 집으로 놔두었구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교회 빚 7억이 떠올랐습니다. 아, 주님이 교회가 빚 있는 것을 속상해 하시는구나. 그래서 차집사님이 내가 먼저 헌금을 하고 성도들에게 힘을 모으자고 해야 되겠다. 그날 밤 모두 열심히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교회 빚이 해결되었습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기도하는 중에 담임목사님의 머리에서 고열이 펄펄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새벽에 성령의 불로 목사님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다음날 예정대로 목사님이 수술 받으려고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으려고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수술할 필요없이 깨끗이 나아 있었습니다. 말썽 부리는 권사님은 징계를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평안해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큰 은혜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순종하니 교회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이 낫고, 평안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같은 은혜가 우리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