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나가 보자-오대산 월정사~비로봉
눈 길을 헤치고 비로봉 정상에 선 사람들이 설악산 방향으로 세워진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산은 겨울에 가야 제 맛이 난다. 순백이 내려앉은 대자연 속으로 가면 그 길을 걷는 사람까지 하얗게 변한다. 새해가 되면 오대산을 찾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흙산이 주는 푸근함에 기대면 일 년 내내 모나지 않게 산다는 의미를 불현듯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 조금은 떨어져 있는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이든 비로봉 정상 가는 어느 길이든 그곳에 나를 내려놓아 보자. 추운 겨울이 가야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로봉 정산에서 본 능선. 나무들이 겹쳐 마치 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보인다.
오대산(五臺山, 1563m)은 너른 품을 가진 산이다.
그 품에 안기려면 들머리인 월정사(月精寺)에서 어느 정도 속세의 때를 벗겨야 한다.
그래야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 산행하기에 알맞다.
월정사는 번잡한 세속과 한참이나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속가의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전나무숲을 거쳐야 한다.
이 길은 세상을 잠깐 비켜서고 싶을 때 걸으면 좋다.
뽀드득 눈밭의 발자국 소리에 잠시 잊었던 나를 찾게 되고 싱싱한 전나무향은 마음 구석구석 오욕을 닦아내기 때문이다.
오대산 상원사 표지석에 내린 눈이 오(五) 자를 타고 흘러 내리고 있다.
오대산은 금강산, 설악산처럼 불길을 닮은 바위산이 아니라 어머니 품속 같은 흙산이라 묵직하다. 문수보살이 주석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오대산은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호령봉, 두루봉, 상왕봉, 동대산 다섯 봉우리가 어울려 오대다.
자장율사가 적멸보궁을 세운 후 서대(상왕봉)에는 수정암, 중대(호령봉)에는 사자암 적멸보궁, 북대(비로봉)에 미륵암, 남대(두루봉)에 지장암, 동대(동대산)에 관음암 등 다섯 암자를 세워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른 아침 전나무숲을 찾은 모녀가 이야기를 나누며 숲길을 걸어가고 있다.
월정사는 오대산 입산의 경계 지점이다.
상원사까지 이어진 6.9km의 비포장 길을 따라가면 적멸보궁(寂滅寶宮) 문수성지(文殊聖地)라는 글씨가 황금빛 음각으로 새겨진 거석(巨石)이 나오는데 비로봉 출발점이고 상원사 입구다.
이곳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상원사까지는 300m에 지나지 않는다.
상원사 찻집 뒤편 계단길이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을 열었고, 여기부터 비로봉까지 3km로 적멸보궁이 절반 위치에 있다.
눈 때문에 계단길이 미끄러워지자 조심조심 길을 내려가는 등산객들.
가파른 계단이 암시하듯 오대산 가는 길은 그렇게 녹녹치만은 않다.
숨이 가파 오고 다리가 묵직해지면 그제 서야 물욕 덩어리인 육신을 나무라게 된다. 그렇게 자신을 나무라고 자성을 하다보면 사자암(중대)에 닿는다.
5개의 지붕이 길을 따라 포개진 지붕이 인상적이다.
다시 몸을 추스르고 계단 길을 오르면 적멸보궁이다.
팔작지붕을 이고 그 뒤로 영봉들을 거느린 보궁은 오히려 단촐해 강한 인상을 준다.
서기 645년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온 석가의 신보(神寶)인 정골사리(頂骨舍利)를모신 오대산 적멸보궁은 비로봉의 귀한 큰 기운이 마무리되는 곳에 있다.
5개의 포개진 지붕이 인상적인 사자암(중대).
연꽃에 비유되는 곳이 오대산이지만 산의 지세가 뚜렷한 겨울철에 보는 모습은 사실 은밀하다.
여인의 두 다리사이 모습을 한 겸혈장(鉗穴場)에 기가 응축된 곳이 적멸보궁이다.
혹자는 오대산 전체를 여성의 은밀한 부위에 비유하는 것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듯하다.
적멸보궁까지는 연로한 노인들이 찾는 길이어서 수월하지만 이곳에서 비로봉까지는 그야말로 삼재(三災)를 넘어서는 길이다.
그도 그럴 것이 1.5km에 지나지 않지만 300m씩 가파른 등산길이 3번 이어져 가쁜 숨을 몰아쉬다 보면 삼재는 어느새 나가고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적멸보궁 오르는 길에서 만난 비구니스님. 누군가 미끄러질까 정성스럽게 눈을 치우는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등산로 좌우에는 월정사 입구에서부터 따라온 전나무가 이어져 흰 눈과 대비되며 청량감을 주고 물박달나무, 들메나무, 피나무, 신갈나무들이 연이어 입산객을 마중한다.
비로봉 정상에 서면 갑자기 허망해진다.
널찍한 공터에 표지석만 덩그러니 놓여 기를 쓰고 올라온 길이 미안스럽기도 해 돌아온 길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한다.
밧줄을 잡고 조심스럽게 나무계단을 오르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면 비로봉의 너른 공터는 마치 피안의 세계처럼 비춰진다.
비로봉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이 능선길을 가고 있다.
비로봉 정상은 칼바람과 시원한 조망 때문에 잠시라도 마음 줄을 놓을 수가 없다.
동쪽으로 동대산과 노인봉 너머 주문진 앞바다가 가물거리고, 북쪽으로 설악산의 장쾌한 마루금이 구름처럼 흘러간다.
상왕봉으로 향하면 올라온 수고스러움에 보답이라도 하듯 쌓인 눈을 밟아가는 부드러운 능선길이 이어진다.
'함부로 발자국을 내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앞서 간 사람들이 능선에 내준 발자국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오대산 영봉들을 거느린 상원사 적멸보궁.
추위에 떠는 나무들은 눈 솜이불을 덮고 있어 겨울잠을 자는 듯 고요하다.
상왕봉으로 향하던 발길을 멈췄다.
머리를 깎아야 입산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이곳 자체가 입산(立山) 이다.
그 입산의 경지에 육중한 산두덩들은 속눈썹 같은 나무의 경계 때문에 구분될 뿐 산과 나무와 내가 하나가 된다.
고생을 자처하는 산행이 아닌 나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 입산이다.
전나무가 들어차 청량감을 더하는 비로봉 가는 길.
헬기장이 있는 1539m고지를 넘어 서면 길은 스펀지처럼 착해지고 원시림 지대가 나타나 경이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상왕봉 정상에 서면 손 내밀면 설악산이 닿를 것처럼 가까워지고 다시 능선을 타면 두로령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상원사 방향으로 내려서면 옛 446번 도로를 만나고 자작나무 늘어선 비포장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내려오면 상원사 입구다.
산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붙잡고 하산하다보면 만나는 모든 것들이 정겨워 보인다. 그래서 오대산 여행은 산행이 아니라 어쩌면 신행인지도 모른다.
◇여행메모 △가는 길=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진부IC로 빠져 나가 6번국도를 타면 가깝다. 버스는 서울동부터미널에서 진부행 버스가 40분마다 한 대 꼴로 다닌다. 진부터미널에서 월정사, 상원사행 버스는 1시간마다 있다.
△먹거리= 월정사 매표소 인근에 있는 음식점들은 오대산 일대에서 나는 산채를 잘 보존했다가 차려내는 산채백반은 양념이 없어도 겨울별미다. 진부면소재지에 이름난 식당이 많고 30분거리에 있는 봉평으로 가 메밀국수를 말아도 좋다.
△쉴 곳= 오대산을 끼고 있는 진부에는 특급호텔인 켄싱턴플로라호텔(033-330-5000)이 있고, 이 일대에 펜션과 민박집이 여럿 있다. 오대산관리사무소(033-332-6417)
비로봉 정상에서 본 속초시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