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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역사광복을 해야 한다.
일제는 한국인의 정신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이른바 민족정신 말살 정책을 실시하는데 1938년부터는 모든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을 전면 폐지하고 일본어를 국어로 쓰도록 하였다.
1940년 2월부터 한국인의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도록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시행하였다. 이 정책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1순위로 징용하고, 물자 배급 대상에서도 제외하였다.
또 한국인을 완전히 일본인화하기 위하여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를 들여온다. 전국 곳곳에는 ’신사(神社)’를 지어 일본인의 조상에게 절하게 만들고, 심지어 각 가정에도 가정용 신단인 “신붕神棚”을 만들게 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모든 국민이 지켜야 할 마땅한 생활규범’으로 강요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유능한 인물이 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대한민국 산하의 정기를 끊었는데 명산의 혈자리는 물론 심지어 바다 속에까지 쇠말뚝을 박았으니 그 악랄함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지배를 영구 합리화하기 위해 일본은 온갖 정책을 동원하는데 체질인류학적 연구까지 시행했다.
당시의 연구 자료를 보면, ‘한국인들은 머리가 작고 골격이 두꺼워서 뇌 중량이 작기 때문에 야만에 가깝다’고 하였고, ‘일본인에 비해 동작이 활발하지 못하고, 얼굴 표정이 섬세하지 못하며, 조잡한 음식을 먹는 까닭에 소화기관이 발달했다’는 등 진화가 덜된 미개인종 정도로 낙인찍고 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 보여주는 실화가 있다.
1907년 3월 도쿄 박람회에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전시물이 있었는데, 원숭이처럼 울타리 안에 갖혀 있는 한국인 두 사람이었다. 일본인에게 한국 사람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한국인 참살 만행은 또 어떠한가?
일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무려 8백만 명의 한국인을 참혹하게 죽였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을 진압하면서 동학군과 양민을 합쳐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인을 학살했다. 1920년 만주에서는 한국인 5천 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간도 일대에서 자행된 한국인 학살을 지켜본 미국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 라고 탄식하였다.
1923년 일본 관동 지역이 대지진으로 초토화되자 일본정부는 조선인 폭동설을 날조 유포시켜 일본인 자경단이 약 2만 명이 넘는 동포들을 처참하게 학살하게 하였다.
또한 일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른바 ‘마루타’라는 암호로 통하던 생체실험에 한국인을 이용하였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731부대는 세균성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을 상대로 고속원심분리기를 사용해 생사람의 피를 짜내서 죽이는 실험을 하였고, 사람 몸에 말의 피를 넣어 어떻게 죽는지 관찰하기도 하였다. 또 독가스를 살포하여 얼마 만에 죽는지 실험하고, 페스트와 콜레라균을 주입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체의 70% 이상이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생사람을 한증막에 넣고 쪄서 수분을 빼서 죽이는 실험을 감행하고, 물을 주지 않고 빵만 먹이면 6~7일 만에 퉁퉁 붓다가 피를 토하고 죽는다는 것을 알아내는 실험도 했다. 일본의 생체실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 중의 하나이다.
일제 음모의 절정은 1933년 흥아(興亞)연구소라는 특수조직에서 꾸민 경성천도(京城遷都) 공작이다.
일본인 1천만 명을 한반도로 이주시킬 것을 계획한 이 공작이 실행되었더라면 한국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쌀 한 톨, 쇠숟가락 하나까지 수탈함으로써 조선 민중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친일부역을 했던 자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그들의 해택을 받고 살았다.
지금도 일부 몰지각한 학자들은 이러한 수탈과 참담한 과거를 무시하고 일제가 우리를 근대화시켰다는 망언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만들어 호적제를 도입하자 항일 운동가들은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등록을 거부하고 무국적자로 살았는데 1947년 ‘과도법령 11호’를 통해 일제 호적에 등재됐던 국민들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함으로써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적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머나 먼 타국에서 목숨을 바친 항일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국민에서 배제시켜 버린 것이다.
반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에게 충성을 다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자들의 후손들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친일을 합리화 시키며, 지금껏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의 경우 4년간 나치에 협력한 반민족자 100만명을 체포하여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즉결 처형하였다.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고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호의호식하며 살던 친독에 있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단한명의 친일파도 처형당하지 않고 친일파가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하며 친미파가 되었고, 그들은 반공을 외치며 민족주의자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때문에 어떤 사학자는 ‘우리나라는 친일청산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일파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이 청산 당했다’라고 말한다.
이병도와 같은 식민사학자들도 해방과 더불어 추방은 커녕 서울대 사학과 초대교수가 되고, 60년도에는 문교부장관까지 한다. 주류 학계를 장악하게된 식민사학자들의 손에 우리나라는 80년간 역사 교육을 맡겨 왔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병도같은 식민 사학자가 우리나라 학계의 주류가 되었을까?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독립운동을 하던 대부분 의식있는 사람들은 정식적인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제에 편승한 친일파는 제도권 안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2년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은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한국인 정치가를 물색했고, 그 적임자는 이승만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 등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반면 이승만은 친미주의자로, 미국에 살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지식인이었다. 게다가 부인도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국내 지지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게 된다. 해방직후 친일파 숙청의 건의가 거세게 들어오고 반민족 행위자 특별 처벌법을 만들어 반민특위를 만들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직권으로 1년만에 유야무야 없던 일로 해버린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학자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의 역사학계를 독차지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 역사 파괴 공작은 언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9세기 중반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면서 한국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위해 식민주의 역사관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주의 역사관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과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역사관이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살아온 민족으로 묘사하여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요지이다.
조선을 강탈한 일본은 총칼로는 잠시 지배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의 역사를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관습과 제도를 조사한다는 미명하에 1910년 11월부터 약 14개월 동안 한반도 구석구석을 뒤져 역사서를 포함한 20여 만 권의 각종 도서를 수거하여 대부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1916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25년 일왕의 칙령으로 조선사편수회로 개편하고 16년 동안 무려 100만 엔에 이르는 거액을 투입하여 조선총독부 최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가 총 37권, 2만4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사료집으로 “일본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의 역사서”이다.
이렇게 일본에 의해 조작된 역사책을 전국 각 기관에 배포하고, 각 학교에서는 조직적으로 교육하였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런 역사 말살 정책에 대해 당시 언론은 “우리의 역사를 일제의 손에 내어 주는 것으로 최후의 정신적 파산이다”라고 한탄했다(1925.10.22 동아일보)
우리의 지난 역사를 우리 손으로 직접 쓰지 못하고 침략자 일본이 마음대로 썼다는 것은 한민족 근대사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은 일제가 왜곡하고 날조한 거짓 역사서가 아직도 살아남아 한국 역사학계에서 한국사의 주요 사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45년에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지만, 이 땅의 역사학은 여전히 식민사학의 잔재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이 땅의 역사 광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에 몸담고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식민사학자와 그 후예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지난 식민통치 시기에 일제가 주장한 식민사관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눌러앉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역사상 가장 반인륜적인 식민사관을 옹호하고 있다. 정작 이 땅의 역사 교육은 일제 식민사관의 틀에 여전히 갇혀있는 것이다.
운초 계연수선생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李沂,1848~1909)선생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이맥(李陌,1455~1528)의 『태백일사』와 예로부터 민간에 비장되어 온, 신라 고승高僧 안함로(安含老,579~640)의 『삼성기 상』과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 다섯 종의 책을 독립군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분의 자금 지원으로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이 『환단고기桓檀古記』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역사서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학문권력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전해준 분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팔다리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제와 함께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 섰던 식민사학자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정신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 『환단고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선생이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팔다리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밀정 감영극에 대한 기사 독립신문 1921년 3월 26일자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편집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민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 백제 전후부터 내려오던 고귀한 우리의 역사 기록을 거반 망라해서 묶어 놓은 책이 환단고기다. 신라 때부터 마지막 왕조 근세조선 때까지 당대의 최고 지성인 다섯 분이 천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의 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李沂,1848~1909)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 『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청주에서 살았었다.
양종현 선생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 『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 『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환단고기』 원본 분실에 대해 제자 양종현씨는 "이유립 선생이 1976년 의정부에 거주할 당시,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 친척이 운영하는 안과가 있던 군산에 5일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집세를 5개월 정도 밀린 상태에서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줄 알고 책을 모두 팔아 버려 이때 초간본도 함께 분실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립 선생이 초간본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조병윤이 1979년 이유립의 허락 없이 교정이 안 된 오형기필사본을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하여 광오이해사에서 100부를 출간하였다. 이로 인해 조병윤은 파문당하고 이유립은 『환단고기』가 이미 세상에 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며 그해 10월 광오이해사본을 교정한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미루다가 1983년도에 배달의숙본을 발간한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가 있다.
일본은 실제 조선을 식민통치하던 동안 관변학자들을 동원해 식민사관을 세웠다. 일본이 물러간 후에도 대한민국에 심어진 일제 식민사관은 청산되지 않고 지금까지 배우고있다.
중국과 일본 역사도발에 대해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제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한중일 역사전쟁의 의미와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과거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지금 우리의 발걸음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역사를 바르게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과거가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으면 과거의 소산인 현재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미래를 보는 올바른 시각도 가질 수 없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아가 말했듯이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아직도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며, 그 때문에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소통될 때 비로소 우리는 다가오는 모든 변화에 대비하고 밝은 미래를 열 수 있다. 미래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은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놓고서 성姓씨를 가르쳐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읽게 하되 어릴 때부터 읽게 할 것이며, 역사를 배우게 하되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게 할 것이다.’라고 역사교육을 강조했다. 또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암李?(1297-1364)은 ‘나라가 몸이라면 역사는 정신과 같다(國猶形 史猶魂)’고 하였다. 정신이 없으면 몸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는가? 국가와 민족을 소생시키는 깨어 있는 정신을 위해 역사를 배워야, 그것도 바르게 배워야한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정신이 없는 민족이다.”
식민사학 자체는 근대에 들어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만든 역사학이다. 하지만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다 보면 고대사에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분야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직까지 일제의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자들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인지? 또 그런자들은 무엇 때문에 식민사학에 집착하는지?
어떻게 그런 자들의 세력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또 하나는 식민사학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 밝혀 보자는 것이다. pp.15~16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의 저자 이희진박사는 청산해야 할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어떻게 뒤틀린 길을 가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가 고대사 학계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병도가 키운 제자들이 대한민국 학계를 장악하고 역사학을,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키운 결과가 바로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 어떻게 역사학계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학자들을 패거리 집단으로 전락시키며,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짓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는 파렴치한이 되고 있는지를 저자는 처참한 내부 고발자의 심정에서 진술하고 있다.
또 이들에게 연구 기금과 학회지 발간 및 활동비를 지원하는 관료들이 결국 이들과 야합하게 되는 과정을 이 책에서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가 무사안일과 출세주위에 물든 관료들의 손을 통해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선심 쓰듯 뿌려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 이러한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언론이다. 이희진박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려 들어갔던 고려대학에서 인문학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제 발로 역사학을 전공하는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성과도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한 『가야 정치사연구』부터 『가야와 임나』, 『거짓과 오만의 역사』등 그 분야에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고대사연구자들이 얼마나 일본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뭘 모르던 시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되는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자면서 만든 프로에 어떻게 식민사관에 입각한 논리를 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또 이를 비판하자 진상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을 문제 있는 인물로 몰고 가고, 또 그런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전국민에게 배포함으로써 결국 식민사관을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결과를 자아냈던 경험담을 수록하고 있다.
결국 식민사관이란 태생부터 어떤 실체가 있는 역사관이 아니라, 철저히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과 야합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관이 건국 80년이 되도록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를 쳐서 학계에서 큰소리를 치는 주류로 성장한 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것이 신진 학자에 불과한 저자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몸을 던져 불속에 뛰어드는 이유일 것이다.
독도나 정신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왜곡이 불거질 때마다 온나라가 뒤끓는 대한민국에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틀을 세운 한국 고대사를 후손들에게,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한국 고대사 학계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비극의 출발점이었다고 진단한다.
이병도를 비롯한 해방후 한국 고대사학계를 장악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반대편의 역사학은 반실증적인 것 즉 반과학적인 것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역사학이 실증적인가?
그들이 말하는 실증성을 대변한 인물이 쓰다 소키치이고, 쓰다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초창기 한국 고대사학계였다. 하지만 그들이 배운 쓰다 소키치의 한일 고대사 체계는 실증사학의 탈을 쓴 황국사관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의 일부를 비판하는 척 하면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전의 기록을 활용해 한반도 초기 국가의 식민성을 강조하는 그림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 맞추기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 고대 국가의 건립 연대는 수 백년이나 늦추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토대로 한국고대사를 복원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것을 저자는 제안하고 있다.

첫댓글 아침햇살님의 기록이 민족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증염하시는 자료입니다.
민족의 상흔을 헤아려 보는 귀한 글 아픔과 감동으로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