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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2강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말씀 / 마가복음 8:1-26
요절 / 마가복음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부모들이 자녀를 키울 때 어떻습니까? 자녀를 끔찍이도 사랑하기 때문에 해로운 것들을 한사코 경계시킵니다. 제자들을 키우시고 양육하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된 우리들을 어떻게 키우실까요?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또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소망은 어떨까요?
1절을 보십시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여기서 ‘그 무렵’은 7장 31절을 기초해 볼 때,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던 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방 지역을 여행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전에 유대 지역에 있을 때도 큰 무리가 있었고 먹을 것이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방 지역을 여행하던 그 무렵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 큰 무리가 있고 먹을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여기, ‘멀리서 온 사람들’은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도왔던 사건을 계기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사흘 길을 오며 함께 했던 것인데 4절을 보면, 그들 때문인지 제자들의 반응이 영 시큰둥합니다. “누군들 여기 광야에서 이 사람들을 만족시킬 떡들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조엘 마커스)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했고, 길에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질 것을 걱정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얼마 전에도 떡 5개로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심지어 열두 바구니에 가득 거두게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라면 무리로 인하여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겪으며 마음 아파하는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마땅했습니다. 양들을 섬기는 사역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왠지 냉랭해 보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일곱.” 오병이어의 기적은 잊어버리기 어려운 큰 사건이고 중요한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의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리에게 말하여 그 땅 위에 먹을 자리를 펴도록 하신 것, 일곱 개의 떡을 가지고 감사 기도하신 후에 나눠주시고, 작은 생선도 그렇게 해서 나눠주시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고 등등. 예수님이 행하신 일도 거의 비슷합니다. 물론 세세히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합니다. 떡이 5개였는데 오늘은 7개이고, 전에는 그냥 생선이었는데 오늘은 ‘작은 생선’입니다. 또 전에는 5천 명이 배불렀는데 여기서는 4천 명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지난번에는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에게 나와 무리를 챙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흘이 지나도록 제자들에게는 아무 말도, 어떤 움직임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물어야 간신히 대답만 하는데 냉소적이고, 지극히 소극적이고, 예수님이 떡을 나눠주라고 할 때도 무리의 손에 일일이 쥐어주었다기보다는 그들 곁에 그냥 놓아두기만 했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떡을 나눠주는 태도는 피동적으로 마지못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면대면합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부터 따라온 이방인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똑같이 대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내심 불만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들의 반응은 무리를 먹이는 데 있어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게 뭐였습니까? 떡 일곱 개가 있었습니다. 작은 생선 두어 마리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6-9절을 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들어가니까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차고 넘쳤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권능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무리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고 함께 해주셔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우리 인생들의 삶을 친히 인도하고 계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를 능히 도우시고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복음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UBF는 선교운동 모임이기 때문에 특별히 복음 전파와 제자양성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복음 역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복음의 부흥 역사, 제자양성 역사의 기적이 잘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시대입니다. 이 세상은 점점 상대화되고 정욕적이고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합니다. 교회는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고 위축되어만 갑니다. 캠퍼스 선교도 그렇습니다. 상당수 캠퍼스 선교단체들이 캠퍼스에서 발을 빼는 실정입니다. 캠퍼스 학생들은 복음을 잘 들으려 하지 않고, 우리가 다가가 전도하려 하지만 자주 거부당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캠퍼스 선교가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이루어 가십니다.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상 모든 민족을 불러 모아 선교를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체적인 선교에 다만 동참하고 동역하는 것입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마음을 알아갈 때, 우리는 모든 부담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전도와 선교에 자원함으로 적극적으로 동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주님은 우리가 드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이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를 주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의 주인공들로 세워주시고 그 놀라운 기적과 은혜의 역사를 함께 나누고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반응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길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믿음의 반응을 원하고 기뻐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양들을 섬길 수 있듯, 우리에게 심정, 진심, 마음이 담겨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 예수님은 그 믿음을 기뻐 받아주시고 축복하셔서 양들을 먹이시고 제자들로 세워가실 것입니다. 놀라운 방법으로 광야와 같이 삭막하고, 복음의 불모지와 같은 캠퍼스 가운데 기적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문제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의 현실만을 바라보다 매몰될 것이 아니라 우리와 양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에 이르자, 바리새인들이 나와 예수님을 힐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표적을 통해 증명해 보라고 예수님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작은 표적이 아니고, 칠병이어의 표적도 마찬가지로 작은 표적이 아닙니다. 둘 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입니다. 남자만 오천 명, 사천 명이 그 표적을 경험했으니, 실제로는 어린아이들과 여자들까지 포함하면 대략 2만 명 정도가 공개적으로 본 표적이고 소문이 무성할 터인데 무슨 표적을 또 구한단 말입니까?
그들이 표적을 요구한 의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리 앞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악한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목적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요20:30,3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많은 사역을 통해 보여주셨던 표적들을 거부하고 오히려 지금도 시험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 그들에게는 다른 어떠한 기적을 보여준다 한들 믿지 않을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완악한 마음 때문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떤 표적도 무용지물인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영적인 지도자들이라는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로 인해 마음속 깊이 탄식하신 것입니다(12).
예수님은 한숨을 내쉰 후, 바리새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사천 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시고 흩어 보내신 예수님은 곧바로 ‘달마누다’ 지역으로 가셨었는데, 그곳에서 바리새인들을 만난 후에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빠르게 이동하다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덩달아 서두르다 그만 남은 떡 챙겨오는 것을 깜빡했을까요? 배 안에 떡이라고는 한 덩이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포함 남자가 13명인데 떡은 한 덩이였습니다.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룩’은 ‘영향력’, 그것도 ‘좋지 못한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왜 악영향을 누룩에다 비유하셨을까요?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밀가루 반죽 전체를 발효시켜 부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시골집에 있었을 때 어머니는 시루에 연한 호박잎을 깔고 달달하게 만든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섞은 그 반죽을 조금씩 떼어 호박잎 위에 얹고, 열을 가하면 나중에 놀짱놀짱하고 맛있게 부풀어 오른 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악영향이라 할지라도 순수한 성도들의 모임에 침투해 들어오면 모임 전체가 순식간에 오염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 시대의 영적, 정치적 지도자들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여 순수한 하나님의 종이요, 주님의 제자들로 키우고자 경계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16절 말씀. “어이쿠~! 떡 챙기는 것을 잊었더니 예수님이 노여워하시네. 이 일을 어쩌지?” 뭐, 이 정도로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대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잠깐 딴생각하다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실수를 하곤 합니다. 그럴 때는 가볍게 웃어넘기거나 “떡을 안 챙겨왔다고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이다” 이렇게 한 번 더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를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폭풍 질문’을 던집니다. 17,1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몰아붙이십니다.
작은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문제는 ‘나비효과’라는 게 있는데,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그 나비의 날갯짓이 큰 태풍을 몰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룩처럼 작아 보이지만 그 세대를 망치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마음이 둔하냐?”라는 질문은 ‘너희 마음이 완악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런 책망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할 때 하시던 말씀과 비슷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이 제자들 속에도 퍼져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다시 묻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배에 떡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걱정했습니다. 장정이 13명인데 먹을 떡이 한 개뿐이니, 걱정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 보아도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제자들도 똑똑히 보았고 경험했고 자기들도 배불리 먹고 넉넉히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아닙니다. ‘열두’ 바구니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꽉 찬 ‘열둘’입니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풍족하게 남았습니다. 제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늘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데 빵이 적고, 돈은 너무 없고, 너무 피곤하고 지치고, 시장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고, 여기는 광야이고 등등. 하지만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 그리고 열두 바구니의 표적. 또 떡 일곱 개로 사천 명, 그리고 일곱 광주리의 표적입니다. 사람이 많은데 떡이 적은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표적입니다. 돈이 없어도 문제가 아니다는 표적이고, 지치고 피곤해도 상관없고, 시장이 멀어도, 광야라도, 가진 것이 적어도, 이런 현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적입니다.
어쩌다 한번 보여준 표적이 아닙니다. 비슷한 표적을 얼마 안 되어 두 번 연속 보여주셨습니다. 한 명에게만 은밀하게 보여주거나, 수제자 세 사람에게만 조용히 보여주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그런 표적도 아닙니다. 오천 명의 장정들에게, 사천 명의 장정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남은 바구니, 남은 광주리를 언급한 것도 반복해서 보여준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처한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적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제자들의 겉이 아니라 속입니다. 제자들에게 바깥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내면의 믿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말할 때 제자들 속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제자들 속에는 믿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제자들 속에는 냉소가 있습니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도 선명한 표적, 공개적인 표적을 두 번씩이나 얼마 안 되어 연속적으로 보여줬는데도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으니 아마도 그들은 ‘하늘의 뜻’을 알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은 너무 선명하게 두 번의 표적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할 목자요,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약속된 메시야요, 권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 그들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듯,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사람들, 하나님에 대해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해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런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영향을 받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제자들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깁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칠병이어 사건에서 사흘 길 떨어진 먼 곳에서 온 이방인들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럼, 제자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사실, 제자들은 배와 그물 등 삶의 터전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열둘을 따로 세울 때 그 열둘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해 권능도 받고 전도 훈련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리인,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해야 할 동역자요, 계승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척하면 척이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폭풍 질문을 던져도, 선명하게 말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을 답답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즉 바리새인들에 더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관심 가지려는 마음은 없고, 겉으로 일어나는 표적만을 구하는 사람들, 즉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또 뭐가 의이고, 뭐가 진리인지 알면서도 눈치를 보며 흔들리고, 결국 의인 세례요한을 목 베기까지 한 헤롯과 더 가까이 서 있는 모습이 바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배고픈 무리 앞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는 것인지를 알면서도 미적거리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 바로 헤롯의 누룩에 영향을 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헤롯에 더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양 무리의 목자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섬길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악영향의 누룩 없는 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만민 구속 역사의 주역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소원 가운데 제자들을 부르셨고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며, 또 그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배우며 본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악영향과 싸우며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목자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감당하신 사명의 십자가를 배우고 함께 지며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처럼 심하게 완악하고 둔하다고 책망하신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역으로,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영적인 지도자로서 그만큼 큰 소망을 두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22-26절은 예수님이 한 소경을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한 맹인을 고쳐주시는데, 단번에 고쳐주지 않으시고 점차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을 보는 정도로 희미하게 고쳐주시고, 그 후에 모든 것을 밝히 보도록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소망을 심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반복 학습을 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우둔한 자신들을 생각할 때 자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맹인 한 사람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현재 영적 상태는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흐릿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세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이 언젠가는 영적인 눈을 활짝 떠서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망 가운데 영적으로 둔한 제자들을 오래 참으시며 제자 훈련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도 보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UBF교회를 통해 흥왕한 캠퍼스 제자양성을 이루시고 광야 가운데 길을 여시며 놀라운 세계선교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의 권능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디쯤일까요? 예수님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 더 가까이 서 있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편에 저 멀리 서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비록 믿음이 연약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지라도, 우리 한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고 소망 가운데 이 시대 양 무리의 목자들로 키워가십니다. 권능과 소망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 관심 없이 살아가고, 진리에 대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철저히 경계하고 싸워야겠습니다. 우리가 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배우며, 진리를 수호하려는 분명한 믿음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