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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눈치가 없어서 설교를 좀 쉽게 준비해야 되는데 오늘 설교는 좀 고민을 하며 들어야 될 설교라서 여러분 감안하시고 좀 마음을 이렇게 열심히 한번 말씀에 좀 빠져들었으면 좋겠습니다. 1절에는 다윗의 삶의 큰 전쟁 그러니까 사람은 그러니까 자기 인생에 좀 전제를 한 몇 개씩 가지고 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로 제 인생에 전제가 있어요. 그렇듯 다윗도 다윗의 삶을 왕으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가지고 있는 전제가 있어요. 다윗이 가진 전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다 아신다는 거 이게 다윗이 가진 큰 신앙의 전제인 거죠.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시고 하나님은 나를 다 보고 계신다.
1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1절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다윗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냐 하면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전혀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어요. 이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그의 행동을 결정하게 됐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을 경험하고 우리가 알지 못한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거예요. 살면 살수록 다윗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이런 전제를 가지기가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신다. 이 다 하신 하나님께 내가 정직하게 행하자 합당하게 행하자라는 이런 믿음을 갖는 게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젊었을 때 다윗이 약간 좀 이상해 보였어요. 불륜이나 저지르고 이런 왕. 근데 살다 살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다윗만큼 위대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신다 이 전제로 그가 평생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또 하나 살펴야 하는 것은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 다윗의 주변에 수많은 대적들이 둘러 진치고 있었다는 거예요. 다윗이 이 시를 썼을 때 평안할 때 쓴 게 아니에요. 그의 대적이 그의 삶을 둘러 진치고 있을 때 이 시를 썼다는 겁니다.
성도의 삶의 수준, 성도의 신앙의 수준은 그 성도가 가지고 있는 전제가 좌우예요.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성도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인생을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달라진다는 거죠.
여러분 이게 불신자도 똑같아요. 예수를 안 믿어도 그 사람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좌우가 된다는 겁니다. 성도의 삶의 수준은 성도가 어떤 전제를 가졌는가 결정하고 한다는 거예요. 다윗의 삶의 수준 믿음의 수준이 특별했던 것은 특별한 전제를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거죠. 우리가 가진 전제는 기도하면 복받는다,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이런 전제잖아요.
근데 다윗은 이런 내 중심의 전제가 아닌 하나님 중심의 전제를 가지고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신다.
보통 이런 전제를 가지고 삶을 사는 일이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뭔가를 결정하려고 할 때도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신다. 내 마음이 거짓말을 하는지 내가 참말을 하는지 다 아시는 거죠. 내가 불편해서 거절한 건지 내가 싫어서 거절한 건지, 진짜 내가 이유가 있어서 거절한지 하나님이 다 아시는 거예요.
이 전제를 가지고 살기가 과연 쉬웠을까요?
근데 다윗은 이 전제를 가지고 살기 위해서 엄청 노력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다 아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전혀 없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살펴보셨으므로라는 이 단어는 그냥 대충대충 훑어본다는 게 아니에요. 자세히 꿰뚫어서 치밀하게 조사한다는 거예요. 모르는 것이 없도록 조사를 다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일부만 조사한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없도록 다 조사를 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2절과 3절 같은 고백이 나온 거죠. 같이 한번 우리 읽어보겠습니다. 2절, 3절입니다. 시작
주께서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하나님은 다윗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아셨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아셨다는 거예요. 다윗이 행동했던 모든 행동들을 아시고 다윗이 결정했던 모든 결정들을 다 아시고 다윗이 생각했던 모든 생각들도 하나님은 다 아셨다는 거죠. 여기에서 안다는 이 단어는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전인격적으로 훨씬 더 포괄적으로 이 알았다는 그런 의미인 거예요. 우리가 겉핱기식으로 어떤 지식에 대해서 안다는 그런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인 겁니다.
그러니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서 본질적으로 다윗의 삶과 다윗의 신앙을 다 아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키가 180이고 다윗의 외모가 잘생겼고 눈이 두 개고 코가 하나 이런 걸 안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윗을 알되 다윗의 모든 것, 그의 전인격적인 모든 것들을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라고 다윗이 믿고 이 믿음을 전제로 다윗이 한 평생을 살려고 노력했다는 겁니다.
좀 더 말씀을 드리면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다 아신다는 거죠. 하나님이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이게 거짓이 아닌지 다 아신다는 거예요. 내가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진짜인지 아닌지를 안다는 거예요. 내가 봉사를 하면 이 봉사가 진짜인지 아닌지도 아시고, 내가 예배를 하면 이 예배가 진짜인지 아닌지도 하나님은 다 아실 만큼 다윗에 대해서 그렇게 알고 계셨고, 다윗도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있다고 믿었던 거예요. 이 전제를 가지고 다윗이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려고 노력했어요. 다 아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신 하나님에 대해서 다윗은 자신이 할 일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다 아신 하나님께 나가 인정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자 이게 다윗의 결정인 거예요.
그러니까 숨을 곳이 없다는 거죠. 내 생각도 숨을 곳이 없고 여러분 우리가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기 생각을 숨기잖아요.
사람들과 어떤 감정을 교류하다가 그 감정을 이렇게 숨기잖아요.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내 생각도 숨길 수 없고, 내 감정도 숨길 수 없고, 내 의견도 숨길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한 일은 자신을 그렇게 모든 걸 아신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인정하는 삶을 살자 이게 다윗의 결정이었던 겁니다.
이제 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그냥 개혁 계정으로 보고요. 두 번째로는 표준새번역으로 한번 봅니다. 먼저 개혁 개정으로 4절 말씀 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여
표준새번역을 보면 좀 더 실감 있게 들려요. 우리 4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봅니다. 시작
내가 열을 올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주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어떻게 인정했냐 하면 다윗이 말하지 않은 것도 아시고 말하려고 마음에 품었던 것도 다 아시는 분이라는 거죠. 단순히 몇 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 다윗의 실체, 다윗의 삶, 다윗의 생각, 다윗의 존재에 대해서 전부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다윗이 믿었던 거예요.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부모보다 더 많이 알고 동료나 신화보다도 더 많이 안다고 여겼어요. 그리고 이 사실을 다윗이 인정하려고 평생을 노력했다는 거예요. 나를 다 아신 하나님을 내가 인정하는 삶을 살자.
여러분 이게 얼마나 어렵겠어요?
나를 다 아는 사람에게 정직하게 말하는 게 쉬운 일일까요?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내가 조금만 대화하면 들통이 나잖아요. 조금만 잘못 맞다면 내 말이 거짓인지 알잖아요. 이런 거예요. 내가 기도하러 앉았어요. 하나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나를 도우시고 기도했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 기도가 진짜인지 아닌지 아시는 거예요.
여러분 기도가 언제 들려질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기도가 진짜면 들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어려운 거예요. 나를 다 하신 하나님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도 어렵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도 어렵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살려고 평생을 노력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전제 때문에 다윗에게 두 가지 습관이 생겼어요.
첫 번째 습관은 하나님은 다윗은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분으로 믿었어요. 나는 절대로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거예요. 7절에서 10절 좀 길지만 우리가 같이 한번 큰 목소리로 같이 읽습니다. 시작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수월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아멘 자신의 삶을 살피신 하나님께서 다윗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아신다고 믿었어요. 그러니까 어디에도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을 자기 인생이 피할 길이 없다고 그가 믿었다는 거예요. 하늘, 수월, 바다 끝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다 계신다고 다윗은 믿었습니다.
이 신관은 그 당시에 신관과는 좀 달라요. 그럼 그 당시에 신관은 어떤 신관이었냐 하면 요나를 보면 좀 알 수 있어요.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면 하나님을 또 하나님의 명령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지역 신의 개념인 거죠.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에 대해서 지역 신의 개념으로 인정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를 옮기면 내게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신 그래서 이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다른 신을 찾았던 거죠. 이 동네에 가면 이 신을 찾고 저 동네에 가면 저 신을 찾고 이랬던 거예요.
일본도 똑같은 거죠. 엄청나게 많은 신들이 각 지역마다 있어요. 그래서 그 지역에 가서는 그 신을 찾아야 되는 거예요. 이게 그 당시에 신관이었습니다.
근데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른 지식을 갖고 있었어요. 편제 편만 그러니까 어디든 계시고 어디든 충만히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이 무서운 지식을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쪽방에 들어가도 피할 수 없고, 내가 다른 나라로 달아가도 피할 수 없고, 내가 숨어도 피할 수 없고, 내가 나를 가려도 피할 수 없고, 내가 하나님을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윗이 알았어요.
이게 다윗의 삶의 전제였던 거죠. 피할 수 없는 분. 그래서 다윗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보시고 어디에서나 들으시고 어디에서나 함께하시고 어디에서나 도우시는 분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고 그리고 하나님을 또 숨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다윗의 부르짖음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왜 다윗의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력할까요?
부르짖음이 다르니까 만약에 저의 기도의 내용이 달랐다면 제 기도의 내용이 찬양의 가사가 되었겠죠. 여러분 제 옆에서 제 기도의 내용을 한번 들어보세요. 찬양의 가사를 삼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우리 교회 말씀이 살아있게 해 주십시오. 기도가 살아있게 해 주십시오.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 되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죠. 우리 자녀들 하나님 잘 되고 안전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고 나를 위해서 제가 하는 기도의 내용 중에 가사로 옮길 만한 것이 없어요. 몰라요. 진짜 1년 1년 내내 누가 제 옆에서 받아 적다가 한두 구절 나올 만은 할 수는 있겠죠.
근데 다윗의 많은 고백이 다윗의 많은 기도가 이렇게 노래가 되고 찬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다 하신 하나님 피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그가 인정했기 때문에 고백의 수준이 기도의 수준이 달랐던 거예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분으로 알면 그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행동과 삶이 달라지게 되는 거예요.
근데 아직도 많은 성도들은 내가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이 속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내가 피하면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내가 감추면 하나님이 모를 거라 생각해요. 이런 신앙에는 그 서 신앙에 맞는 산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볼 수밖에 없어요. 그 정도밖에 못 봐요. 다윗의 왜 고백해 달라 했냐 그의 기도가 왜? 아니 형편이 어렵잖아요. 자식에게 쫓겨가면서 지은 시가 어떻게 찬양이 될 수 있어요? 신하들에게 공격받으면서 쓰는 시가 기도가 어떻게 찬양이 될 수 있냐고요.
하나님을 그렇게 인정했기 때문에 자식에게 쫓겨다니면서 쓴 시도 찬양이 되고 우리의 노래가 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인정함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거죠.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 보시고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도 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의 고백, 그의 기도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분,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속일 수 없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어디서나 보시고 어디서나 함께 계시고 어디에서도 도우시는 분이라 알았어요.
여러분 다윗의 신앙 중에 하나가 위대한 것은 다윗 하나님은 어디서라도 자기와 함께하신다고 믿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와 함께하지 않는 공간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위료가 돼요. 여러분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이 자리에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믿을 수 있으면 얼마나 큰 위로가 내 삶에 오겠어요 내 옆에 계신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겠어요?
힘내 내가 도울 거야. 내가 너의 아버지잖아. 내가 너의 창조주잖아. 힘내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까요?
그 하나님의 마음만 내가 들어도 여러분 그 힘든 자리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모르는 거죠. 깨닫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내 인생의 가장 쓸쓸한 시간에 나와 함께했던 하나님을 외면하는 거죠. 하나님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내가 병실에 있을 때 함께해 주셨고, 내가 가난할 때 함께해 주셨고, 작은 방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옹기종기 살 때 나와 함께 하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몰라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다윗은 이 사실을 알았어요. 자기가 어디 있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편지하시고 충만하신 분 어디든 계시고 어디든 충만하게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이 다윗의 삶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부탁인데 오늘부터 이것만 여러분 버려둬요. 신앙이 완전 달라져요.
오늘부터 여러분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실은 어제도 밤늦게까지 총신대에서 운영하는 교회 교육사 이제 대전에서 수료식이 있었어요. 감사하게도 이번에 한 55명 정도가 수료를 하고 수료증을 부여하고 하는 자리에 어떤 이 기획이 저로부터 나와서 시작돼서 이제 총신대에 올라가서 시작된 거라 어젯밤에도 늦게 제가 내려 하고 오늘 아침에도 또 구미대에 가서 이제 픽업을 해서 교회로 와야 되잖아요. 저를 아니까 다른 분을 보내면 좀 불편할까 싶어서 그렇게 해서 이렇게 제가 이 자리에 왔어요.
제가 지금 막 집중이 좀 덜 되는 건 사실이에요. 실은 열심히 전하려고 애쓰는데 집중이 좀 덜 되는 건 사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만 꼭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마치고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은 다 아시고 하나님은 어디서 어디서든 함께 계신다. 이 사실만 기억하고 여러분이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이게 마음에 잘 새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다윗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고 믿고 숨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뒤에 두 번째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온전함으로 대하려고 노력했다는 거예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은 거짓말하지 않는 거예요. 숨을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은 참되게 하는 거예요. 속일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은 정직하게 하는 거예요.
이게 다윗의 결정이에요. 하나님은 피할 수 없는 분으로 믿었고 속일 수 없는 분으로 믿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다윗은 정직하기로 온전하기로 열심을 다하기로 맹세하고 그 삶을 다윗이 살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도 숨길 수 없고 과거도 숨길 수 없고, 삶도 숨길 수 없고, 결정도 숨길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정직하기로 결정했던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대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커집니다. 하나님을 정직하게 대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커집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다윗처럼 정직하게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이 다윗이 다윗을 특별하게 대한 건 다윗이 범죄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다윗이 죄가 없어서가 아니에요. 다윗이 정결하고 순결해서가 아니에요.
여러분 왕이 어떻게 정결하고 100% 숨겨가는 삶을 살아요?
못 살아요. 근데 다윗은 그런 자신의 삶에 대해서 정직했어요. 하나님 다 아신다고 믿었어요. 다 보고 계신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순간순간 잘못했더라도 순식간에 회개하고 잘못했더라도 순식간에 돌아오고 순식간에 뉘우치는 삶을 그가 살았던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불륜을 지적했을 때 부인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인정했어요. 심지어 회개까지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피할 수 없는 분으로 숨을 수 없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걸 누리고 싶어 해요. 좀 넉넉했으면 좋겠고, 자녀도 좀 잘 됐으면 좋겠고, 내 삶도 좀 편했으면 좋겠고, 여러분 이런 삶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여러분이 원하는 이런 삶은 그냥 기도만 많이 한다고 오는 걸까요?
그냥 교회만 열심히 봉사한다고 오는 걸까요?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삶은 다윗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하고 노력할 때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축복인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함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위선과 거짓을 떠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위선만 떠나도 가정과 교회와 인생에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가 위선만 버려도요. 우리 가정에는 혁명이 일어나요. 우리 부부 사이에도 혁명이 일어나요. 가족 안에도 혁명이 일어나요.
근데 왜 이 혁명을 경험하지 못하느냐 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인 거죠.
다윗은 비록 큰 범죄도 저지르고 그래서 그 죄로 말미암아 죄의 결과를 평생 마음에 품으면서 그가 살았어요. 그래도 그러나 한평생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적을 기대하면서 기도합니다. 여러분 아셔야 될 게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임하는 신비한 능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기적인 거죠.
여러분 기적 경험하고 싶지 않아요. 기도하려고 하지 말고 온전하려고 하십시오. 기도도 해야 되지만 정직하려고 하십시오. 온전하려고 하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예배하고 섬기려고 힘을 써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런 교회와 그런 백성들에게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봐야 할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12절인데 12절 한번 같이 읽습니다. 시작
주에게서는
이 12절 말씀을 줄이면 이렇게 돼요.
하나님에게는 어둠과 빛이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곳에 있어도,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곳에 있어도 우리를 다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분이라는 그런 의미인 거예요. 빛과 어둠이 같아요. 내가 어둠에 있다고 하나님 모른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거예요. 내가 아무리 큰 어둠에 있어도 깜깜한 사방 가운데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시고 나를 다 보시고 나를 다 기억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둠 가운데 있어서 하늘을 보실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긴 밤 힘들게 잠 못 자고 밤새 울 때 하나님이 함께 계셔요. 어느 이 나이 들고 잠을 못 주시나 봐요. 잠이 너무 힘들대요. 잠자는 게 너무 힘들대요. 여러분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같은 분이니까 빛 가운데도 계시지만 어둠 가운데도 계시는 분이고, 우리가 어둠 가운데 있어도 우리를 다 밝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따라 하십시오.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한 번 더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우리 어두운 가운데 계셔요. 계셨었어요 계셨었어요.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가장 절망의 그 시간에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여러분의 행동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다 아신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야 됩니다.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지금까지 여러분의 태도와 생각이 바뀌셨나요?
아니면 여전히 옛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어디든 계신다고 생각하면 모든 걸 다 아신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달라져야 돼요. 교회에 대한 예배에 대한 기도에 대한 태도가 변화가 돼요. 그러면 시를 쓸 수 있는 기도를 우리도 하게 돼요. 여러분과 저의 기도는 아직 시를 쓸 수가 없어요.
맨날 주십시오. 보호해 주십시오. 지켜주십시오. 통과하게
이거 어떻게 찬양을 써요? 못 쓰죠? 어느 날 우리의 기도의 고백이 깊어져서 우리의 기도가 찬양의 가사가 되는 그런 날들이 여러분과 저에게도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전제하심이 불편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전제하심이 좀 행복한 성도가 됐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나 다 아시죠?
이게 행복한 성도 그러면 하나님으로 인해서 큰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다윗의 축복은 그의 삶의 위대함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마음이었어요. 교회의 위대함도요. 그 교회가 좋은 위치에 있느냐 좋은 성도가 맞느냐가 아니에요. 진짜 좋은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서 태도가 바른 성도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예요. 우리 제단이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