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順從), 복종(服從), 맹종(盲從)
성경중의 말 중에 순종(順從)과 복종(服從)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인들이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고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갑자기 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사전적인 뜻으로만 보고 해석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의구심이 드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말은 순순히 따른다는 뜻으로, 복종은 자신이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하는 일, 그리고 맹종은 앞뒤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행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세 단어의 사전적인 설명을 먼저 살펴봅니다.
* 순종(順從) : 다른 사람, 특히 윗사람의 말이나 의견 따위에 순순히 따름.
* 복종(服從) : 남의 명령이나 의사, 또는 규칙 따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따름
* 맹종(盲從) :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 무턱대고 따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의 뜻에서 보면 순종이나 복종을 막론하고 자기의 듯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순종은 전적으로 명령자와 동일한 사고로 따라가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혀 거스를 것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반면 복종은 자기의 의사와 반할지라도 명령자의 뜻과 요구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뜻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채용하고 있는 말을 확인해 봅니다. 먼저 순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코드 : 3980
원어 : peiqarcevw
발음 : 페이다르케오
해설 : 3982와 757의 합성어에서 유래;'통치자에 의해 설득되다', 즉(일반적으로) 권위에'굴복하다',(유추적으로) 충고를 따르다, 귀를 기울이다, (행정장관에) 굴복하다 <행 5:29>동. to submit to authority, obey; 통치자에 의해 설득되다, 즉(일반적으로) 권위에 굴복하다, (유추적으로) 충고에 따르다, 귀를 기울이다, (행정장관에) 굴복하다
설명에서 보는 것 같이 순종이란 말은 오히려 설득당한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동화(同化) 됐다는 말이 오히려 타당성(妥當性)이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 말씀에 동화된 상태가 바로 순종이란 말입니다. 말씀과 사람이 일체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을 증명해 주는 말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나와 하나가 된 상태가 곧 순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동화(同化)인 것입니다. 신인일체가 되는 그 순간마다가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면 복종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선 원어부터 봅시다.
코드 : 5293
원어 : uJpotavssw
음 : 휘포탓소
해설 : 5259와 5021에서 유래;'종속하다', 재귀적으로'복종하다', 굴복하다, 순종하다 <눅 10:17; 고전 15:27>동. to subject; 종속하다, 재귀적으로 복종하다, 굴복하다, 순종하다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순종이 설득되는 것이라면 복종은 종속의 개념입니다. 종속(從屬)이란 형질이 똑같게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종속(從屬)이라는 말을 씨가 같다는 뜻의 종속(種屬)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종속(從俗)은 따르는 무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종속(種屬)은 같은 씨에 속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씨를 소유한 자들이므로 종속(從俗)보다는 종속(種屬)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결국 기독교인들의 모두는 하나님의 종속(從屬)이 되어야 하는 필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면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복종은 스스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즉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결국은 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고 될 수 없는 일들이 말씀으로는 능히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생각과 같이 복종이란 자신이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하고 해야 하는 억지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종이란 말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종속되어서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가랴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 하니라 만군(萬軍)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能)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神)으로 되느니라.” 고 했습니다.
순종이든 복종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다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그것들을 여호와의 신은 능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종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적인 순종과 복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말씀으로 말미암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순종과 복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종은 불평불만 없이 따르는 것, 복종은 내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쯤으로 생각했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가려는 것이요, 성경적 순종과 복종은 말씀이 나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전자는 사람의 행위를 말함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합니다. 이것을 율법과 진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사실 맹종(盲從)인 것입니다. 이유도 원인도 알지 못하고 누가 그렇다고 하면 막무가내로 따라가는 형식입니다.
우리 속담(俗談)에 “사돈이 장에 간다면 자기도 무릎에 망건(網巾) 쓰고 따라 나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맹종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맹종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순종과 복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따지지도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은 맹종인 것입니다.
성경은 확실한 목적과 방향이 있습니다. 단어 하나를 채택해도 가장 적합한 뜻을 가진 말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할 일은 사전적인 의미와 뜻을 떠나는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출애굽이라고 한다. 이는 사람의 교훈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이같이 출애굽은 먼 옛날 히브리인들의 종살이를 마치고 가나안으로 출발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을 떠나는 일이 바로 출애굽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전적인 의미로만 읽고 보고 말한다면 이는 문자주의가 되는 것이며, 사람의 교훈만 될 뿐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하나님은 이사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29:13 “주(主)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百姓)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尊敬)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敬畏) 함은 사람의 계명(誡命)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요? 바로 성경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전적으로만 본다면 굳이 교회에 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문맹의 시대가 아니다. 사전적으로 본다면 누구든지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과 복종은 모르기에 순종과 복종을 배우려고 교회에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에도 순종과 복종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선후배 간, 직장에서는 상사와 직원에 이르는, 가정에서는 상하의 수직적 관계가 있어서 순종과 복종은 어느 곳이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뜻과 담은 내용물이 다릅니다.
성경은 할 수 없는 것을 결코 말씀하시거나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모두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언제 어떻게 말인가요? 흔히들 쓰는 말씀 중에 “능력 주시는 자(者) 안에서”라고 말들을 합니다.(빌 4;13)
하지만 능력 주시는 자가 없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억지로 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자의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者) 안이라고 하는 말은 주가 내 안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면 모두가 자기 안에 주가 계시다고 말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가요? 바로 앞에 인용한 말씀인 이사야의 증거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교훈으로는 절대로 주가 오시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말입니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은 모든 것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결국은 어찌 될까요? 이는 계시록의 음녀와 여황과 같은 존재로 하루아침에 멸절당할 존재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들은 멸망이 코앞에 닥쳐있는데도 말하기를 나는 과부가 아니라고 하면서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요한계시록 18:7 “그가 어떻게 자기(自己)를 영화(榮華)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苦難)과 애통(哀痛)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女皇)으로 앉은 자(者)요 과부(寡婦)가 아니라 결단(決斷) 코 애통(哀痛)을 당(當) 하지 아니하리라.” 하지만 한날에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먼저 하나님의 기록하시고 증거 하게 하신 말씀들을 통해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구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은 단 한 말씀이 그 시작이고 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 집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운 자이지만 후일에 아브라함의 품에 들지 않았는가요?
그러므로 앞뒤 가리지 않고 맹종하지 말고 순종과 복종을 배워 주와 사도들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