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y want this fucking show! But, Who needs this fucking show?
적막. 고요함에 집어 삼켜져 있던 무지개색 커튼 뒤로 살짝 내비치듯 들리는 발걸음 소리. “또각 또각” 긴장. 검은 얼굴들에 식은 땀이 흐리고, 그들이 잡은 트럼펫과 드럼체에 약간의 진동이 생길 때 “딱”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 환호. 수많은 이들의 환호와 함께 시작되는 재즈틱한 연주소리. 얼마나 기다렸던가 우리의 쇼맨을. 미칠 듯이 고대했던 저 얼굴이 이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에 거할 때 사람들은 미쳐 쓰러질 듯하다. “나의 영웅!” 한 사람이 그렇게 분위기를 북돋우자 모두가 따라 외친다. “나의 영웅, 우리의 영웅!” 화려함과 공상의 실현이라는 유니컬함과 센세이션함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안고 태어난 이 타고난 쇼맨에게 사람들은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그 남자는 밴드의 연주와 사람들의 갈채에 몸을 맡긴 체 모든 관절을 구부려 대며 저 수많은 기대에 보응한다. ‘오, 마치 그들의 신같이.’
아침에 일어나 면도를 하고 얼룩진 거울 보며 턱 한번 쓸어준 다음, 옷장 열어 저번 달 큰 맘 먹고 산 나름 멋진 코트를 입는다. 꼴에 안 맞게 산 손거울 들고 선 다시 한번 얼굴을 점검한다. 기분 나쁘게 하나만 툭 삐져 나온 수염이 있어 물어뜯어 짧은 손톱으로 열심히 뽑으려 해본다. 대충 몇 번 시늉해준 다음 손거울을 내려 둔다. 오늘 저녁의 일정이 벌벌부터 심장을 뛰게 한다. 하루는 그렇게 흘러간다. 다른 어떤 일들도 머리속에 쥐어 박히지 않은 체 오늘 아침 면도할 때의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어 간다. 오로지 오늘 밤 그 쇼를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저 극장 앞을 보니 내내 긴장되어 있던 심장이 터지려 한다. 그의 모든 행동을 보기 위하여, 이미 보여줌으로 증명한 이 몽상하는 혁신가를 위하여 그의 몸짓과 손짓과 혓바닥의 놀림을 직관하기 위하여, 그가 항상 집어 말해주었던 이 젠장 할 모든 것에게 향했던 쌍욕을 위하여, 그 소름 돋는 웃음소리를 위하여! 그 의자에 앉아 있던 시간과 주변에서 들렸던 떠드는 모든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막이 올랐을 때, 커튼을 열고 들어오던 그의 모습을 보였을 때 눈물을 흘리고 싶어서 말했다. “나의 영웅!” 꼭 친구가 되고 싶은, 여자라면 결혼하고 싶은, 모든 시간 속에 하나가 되고 싶은, 할 수 만 있다면 그의 아이를 가지고 싶은, 키스를 나누고 싶은. ‘오, 마치 나의 신 같은.’
초췌함. 그는 무대에 올랐을 때 분장을 하지 않았다. 잠시 눈을 찌푸리는 사람들은 박수를 멈추고, 환호도 멈추고, 밴드의 반주도 자연스레 멈추고, 의아함과 함께 깊은 적막을 만든다. 몸을 부르르 떨고선 힘껏 웃는다. 모든 이가 바랬던 그 웃음소리. 다시 시작되는 밴드의 연주에 그는 눈을 감고 다시 끔찍한 자신을 발표한다. 손에 든 분칠. 그 분칠하는 손길은 온전하여 아름답고 눈에 담기에 부족한, 이 연약한 망막을 혐오하게 된다. 그려진 입가의 미소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먹을 불끈 쥐게 한다. 아주 깔끔한 표정과 몸짓을 만들고는 말하는 남자 “죽이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그리고 남자는 손가락을 사람들을 향해 쫙 피고는 어깨는 살짝 들어 올린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듯싶다. ‘바로 이거지?’ 진격하는 군대와 같은 그들의 발 구르며 기뻐 날뛰는 소리는 기가 막혔다. 초췌함. 1막은 내려야 한다. 우리의 호스트도 쉼을 가져야 마땅하다.
참혹함. 초췌함. 비참함. 팔초함. 해소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해소자는 과연 무슨 자격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을 뛰어 넘는 한 요소, 이 망할 것들의 선생은 무슨 특별성이 있을 까. 뛰어남, 이 개 같은 것들의 대한 뛰어남이 그를 선생으로 만들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선생이 된 그는 그저 알고 있는 사실을 표출했다. 해소되지 않는 것들이라는 사실은 가르치지 못했다. 그때에는 자신도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을 병신으로 만드는 여러 요소도 병신으로 만들어 줬을 뿐이다. 그 요소들의 전문가였기에 망할 것들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분노로, 웃음으로, 기괴함으로, 춤으로, 표현으로, 말로, 행동으로,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무신경으로, 무책임으로, 거짓말로. 이 모든 법들을 그저 표출해낸 그는 어느새 망자들의 선생이 되어있었다. 아주 끝내주는 총구로 마침표를 찍은 그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체 그저 자신을 원하는 신도들의 선생으로 시작되었다. 어째서? 해소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은 무대에 섰기에 그저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는 희망감이 들었다. 우, 그것도 결국 몽상이었다는 것이 천창에서 떨어지는 물 때문에 들어 났다.
자신에게 꼬였던 그 모든 것이 사실 자신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 몽상의 결과였다. 잊으려 애쓰며 호스트는 2막에 오른다. 저 관객석에 한 여인이, 저 관객석에 한 무리가 매혹하는 눈빛을 보내니 ‘뭐 아무렴 어때?’하고 다시 춤을 춘다. 1막을 떠올려 본다. 그들이 제일 환호했던 것, 그들이 제일 기뻐했이던 것, 저 놈들이 나에게 손키스를 하지 않고는 못참는 것. 바로 그것을 떠올려 무대에 옮긴다. 원한다. 저들이 원한다, 바로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워본다. 그와 함께 사라지는 듯한, 담배연기와 함께 사라지는 듯한 참혹함, 초췌함, 비참함, 팔초함이 제발 저 멀리 가버리길 어렴풋이 바란다. 더욱 과장되게 그들이 원하는 이 쇼를 꽉 채워본다. 미소를 함박 웃음으로, 걸음거리를 춤으로, 간단한 말을 영혼의 노래로 그렇게 만든다. 약간의 환호, 다수의 침묵. 무언가 싸해지는 공기의 흐름에 그들의 영웅은 더욱 노력한다, 발악하고 발광했을 때 그는 결국 주위를 둘러 본다. 저 관객석을 형해 다시 손을 쬑 피고 어깨를 살짝 들어올리며 미소를 머금는다. ’원하는 것이다!‘ 고요함. 그 적막에 둘러쌓인 광대는 분위기를 풀어야만 한다.“사한 분위기를 보니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정확하다, 환호하던 그들이 이제는 정색하고 있다, 더러는 극장을 나간다. “원하는게 뭐야?“ 호구조사, 가능하다면 해줄 것이다. 이 무대의 주인으로써 관객에게 당연히 대접할 줄 것이다. 무표정의 관객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혐오와 분노와 광기적인 사고방식을 쏟아낼 그 총구를 이제는 무대 위 광대에게도 겨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따위 것이다. 애초에 그들을 형성한 것, 그들이 그 광대로 하여금 해소하고 싶은 것, 곧 원하는 것은 그 따위 분노와 광기에 절여진 사고방식의 표출이다. 참혹함. 초췌함. 비참함. 팔초함의 뒤틀림에서 오는 이상한 쾌락과 이것을 관찰함, 구경꾼으로 감상함에서 오는 꼬이고 꼬인 환락을 원한다.
이 광대의 웃음이 주는 아이러니컬함과 이상야릇한 감정선을 원한다. 기괴한 몸과 찢어지는 목소리를 원한다. 엿같은 상황의 공감자이자, 그 상황의 선두에 선 선구자를 원한다. 이 쇼의 모든 이질감과 뒤틀림이 주는 통쾌함과 명석함을 뛰어 넘고 지성을 뛰어 넘는 단순한 비판을 원한다. 그 모든 바람을 저 한 사람에게 몰아넣는다. ‘오, 마치 신에게 하듯이.’ 그들은 이 빌어먹을 쇼를 원한다. 이런 쇼만이 그들의 소망이 되어 그 심장들은 떨리게 한다.
누구도 영웅의 개인사에 관심은 없다, 누구도 선생의 개인사에 관심은 없다, 누군가의 개인사가 무명 광대라면 관심은 없다. 관심이 없다. 이딴 놈을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가 영웅보다 광대가 되기를 원할까. 그런 웃기는 짓을 좋아하는 것은 광대밖에 없다. 이 쇼의 호스트는 이 개그를 무대의 마지막 조크로 넣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전혀 재미있지 않은 개그였다. 이 쇼는 더욱 파국으로 떨어졌다. 망했다, 정확히는 이 멍청한 광대에 의해 망쳐졌다. 사람들은 분노의 칼을 휘둘렀다. “이런 쇼는, 이딴 영화는 개나 줘버려!” 전혀 원한바가 아니었다. 조크가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바에 맞춰 춤추고 노래한 바도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혐오의 총구에 대상이 되어 찢긴 정신에 그는 더 이상 멋진 호스트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무대와 무대 뒤에서의 수많은 일들은 그를 죽이기에 충분했고 더 이상 그저 춤에 맞춰 춤을 출 수 만은 없었다. 그러니 광대로써 농담 따먹기를 하다니, 이제는 할 수 없다. 관객에 원함에 따라 움직이던 그가 그 원함에 따라 총구가 자신의 머리에 겨눠졌을 때, 그리고 그 총이 머리에 처박혔을 때. 그제서야 그는, 무대 위의 그 연약한 사람은 분장을 지워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한다는 것만으로는 죽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다 죽고서야 깨달았다.
더 이상 그는 원함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영웅이 되기를 원했던 광대는 필요에 따라 영웅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아무리 원하는 이상이 되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원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아마 원하는 꿈이라는 핑계로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일수도 있다. 원함에 따라 움직인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인에 한에서는 더욱 그럴지 모른다. 우리의 호스트는 박수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고성능 기계였다. 그들의 영웅은 아주 용감한 세계의 그림자로써 사연 있고, 신념 있는 빌런이다. 모든 관객은 그런 광대를 원한다. 그들의 조커는 그런 인간이어야 한다. 계단에서의 춤을, 마조히스트적 사이코패스를, 기이함과 이질감이 나타내는 이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그런 연출과 대사를 원한다. 단 2시간의 환락을 위해 관객 내면에는 그 조커가 탄생 되어 있다.
원하는 이가 많을수록 의심이 드는 것은 필요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과연 이 모든 광기의 관객들이 원하는 그 조커가 필요한 것일까. 광대는 더 이상 타인의 소망, 희망으로 포장 되어있는 원하는 인형 만들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깨어나야만 하는, 발전해야만 하는 필요에 따른 움직임을 취했다. 연기와 분위기에 취하고, 놀라운 박수갈채와 발 구르며 다가오는 추종자들에게 빠져 그대로 죽어버리지 않았다. 인형으로 사는 것이 사람으로 죽는 것보다 훨씬 죽음에 가깝다는 것을, 자신의 그림자에 끌려가는 것보다 자신을 되찾는 것이 훨씬 고무적이라는 것을. 그는 필요에 따라 결정했다.
관객들은 아직 그 위대한 광대의 생각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항상 원하는 것을 찾는다. 이제 죽은 인형은 버려두고 새로운 쇼의 호스트를 찾아 갈 것이다. 그저 그들의 원하는 바를 해소해 줄 도구를 찾을 것이다. 폭력을 원하면 액션이 좋은 호스트를, 교만을 원하면 입담이 좋은 호스트를, 성욕을 원한다면 매혹적인 호스트를 찾으러 간다. 극장이 되었던, 책이 되었던, 정치권이 되었던, 무슨 죄인이 되었던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일깨워 주는 그 요소를 찾으러 다닐 것이다. 아무도 그딴 쇼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저 원한다면 선택한다. 누가 살인마를 필요로 하겠는가? 누가 살인을 필요로 하겠는가? 누가 추함을 추구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겠는가? 누가 변태적인 것을 강조하는 쇼를 필요로 하겠는가? 누가 바보를 필요로 하겠는가? 누가 혐오와 분노만을 표출하는 것을 필요로 하겠는가? 누가 참혹함, 초췌함, 비참함, 팔초함으로만 채워진 존재를 필요로 할까? 누가 이런 빌어먹을 쇼를 필요로 하겠는가?
왜 원함이 필요의 위에 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