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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전쟁과 평화 ]
이 영화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대하 소설 <전쟁과 평화>를 파라마운트社가 하나의 업적을 남기겠다는 각오로 영화화해서 1958년도에 개봉한 초대형 블록버스터였습니다.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인간과 전쟁, 그리고 사랑의 대하 드라마로 개봉 당시 엄청난 규모의 제작비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2시간으로 줄여서 상영했던 것을 1977년에 다시 3시간 15분으로 원상 복구하여 재개봉되었습니다.
출연배우들의 명연기와 시대배경, 장대하고 압도적인 전투씬, 모스크바의 대화재,,오드리 헵번이 분한 나타샤의 상큼한 매력들이 잘 버무려져 있다고 평가되기도 하나 한편에서는 다소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평도 뒤따랐습니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러시아를 침공하기까지의 시기에 러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귀족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 등 당시의 생활상과 풍속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인 안드레이(멜 파라 분)와 피에르(헨리 폰다 분), 나타샤를 중심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끝나기까지 그들이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그들이 어떻게 성숙해나가는지를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아울러 전쟁의 참상 뿐 아니라 참혹한 일을 겪으면서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톨스토이가 수년에 걸쳐 쓴 이 장편소설을 208분이라는 시간 안에 압축해 넣다 보니 원작과는 조금 내용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전성기 시절 모습을 보며 추억에 잠길 수 있으며 실제로 부부사이였던 안드레이 역의 멜 파라와의 연기도 주의 깊게 볼만합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몇가지 장면들이 오버랩 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 즉 전장의 폐허 속으로 돌아온 나타샤가 명랑함으로 분위기 반전을 하는 부분에서는 바로 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장면과 연결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지요.
물론 두 영화의 여주인공의 그들과 그들 앞에 놓인 삶, 마주한 죽음, 전쟁, 사랑, 배신에 대한 시선은 확실히 나타샤의 그것이 좀 더 청량감과 함께 명랑하게 황폐함을 이겨나가는 견고한 성숙함을 보여줍니다.
난리 통에 겪게 되는 여러 경험들이 미성숙한 그녀의 천진난만함과 무모한 열정, 젊음의 성장통과 함께 나타샤의 내적성숙을 지켜 볼 수가 있는 재미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군대에 대한 선전포고를 합니다.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는 한창 전쟁에 관한 이야기로 시끄럽습니다. 볼콘스키 집안의 젊은 공작인 안드레이는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생활에 염증을 느껴 전쟁에 출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안드레이의 절친한 친구인 피에르는 러시아의 유력한 재산가인 베주호프 공작의 서자(庶子)로 방탕한 생활에 빠져 살던 중 아버지의 죽음으로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고 러시아 사교계의 거물이 됩니다.
안드레이는 전쟁에 출전하기 위해 임신 중인 아내를 아버지와 누이인 마리아에게 맡기고 전쟁터로 향합니다.1805년 10월, 오스트리아의 오스트렐리츠에서 러시아는 나폴레옹 군대와 전투를 벌입니다. 그러나 전세는 러시아에 불리한 상황입니다. 쿠투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퇴각을 위해 전위대를 파견하고 전투에 참여한 부대원들의 헌신적인 행동으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한편, 바실리이 쿠라긴 공작은 피에르와의 어색한 관계를 청산하고 그를 사위로 삼으려 합니다. 행복에 도취된 피에르는 주위의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작의 딸인 엘렌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바쉴리이 공작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들을 볼콘스키 집안의 딸인 마리야와 결혼시키기 위해 노공작 니콜라이 볼콘스키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 군대와 거대한 연합군을 결성하여 나폴레옹과 일전(一戰)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쿠투조프 휘하의 군대는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고 안드레이는 큰 부상을 당해 전쟁터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벌판에서 홀로 깨어난 안드레이는 지금껏 자신이 동경해왔던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결혼한 피에르는 아내가 뭇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것에 격분합니다. 급기야 그는 이름난 건달인 돌로호프와 결투를 하게 되고 자신의 불행이 음탕한 아내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인의 오만함과 냉소적 태도에 염증을 느낀 그는 아내에게 결별을 선언한 후 페테르부르크로 떠납니다.
볼콘스키 집안에는 안드레이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통보됩니다. 공작과 마리야는 비통한 소식에 슬퍼하지만 출산을 앞둔 그의 아내 리자에게는 비밀로 합니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안드레이는 부인이 출산하는 날 기적처럼 돌아오지만 부인은 아이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도중 평등과 박애주의 결사체(結社體)인 프리메이슨에 매료된 피에르는 메이슨 회원이 되어 갱생의 기쁨을 느낍니다. 한편 실의에 젖어있는 안드레이는 세상일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에 빠져듭니다. 이 시기에 러시아와 프랑스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세상은 잠시 평온한 시절을 맞이합니다.
안드레이는 우연히 로스토프 집안을 방문하고 나타샤를 만나 이제껏 자신이 잊고 있었던 생명이 다시 약동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무도회장에서 다시 만난 후에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안드레이는 그녀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볼콘스키 공작의 반대로 결혼은 일년 뒤로 연기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게 된 나타샤는 엘렌의 오빠이자 방탕한 아나톨리의 유혹에 빠져 스캔들에 휘말리고 안드레이와의 약혼은 취소됩니다. 약혼이 취소된 것을 알게 된 안드레이는 슬픔과 분노에 잠기고, 피에르는 괴로워하는 나타샤를 위로하면서 그녀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하고 전쟁은 다시 시작됩니다.
그때 투르크 전선에 부임하여 쿠투조프 장군의 휘하에서 군무를 돌보던 안드레이 공작은 나폴레옹과의 전쟁 소식을 접하자 그쪽 전선으로 전근시켜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스크바에서 요양 중이던 나타샤는 타인들과의 접촉을 끊고 종교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되찾습니다.
피에르는 나타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불안해합니다. 전쟁이 확산되어 피난길에 오른 볼콘스키 공작은 도중에 임종을 맞이하게 되고, 피난길에 발이 묶인 마리아는 나타샤의 오빠인 니콜라이 로스토프의 도움으로 위험을 모면합니다. 니콜라이와 마리아는 서로 호감을 갖게 되지만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집니다.이런 와중에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은 모스크바 근교인 보로디노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릅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앞으로의 전운에 대해 불길한 예감에 휩싸입니다. 이 전투에서 안드레이는 큰 부상을 입고 의무실에 후송되어 자신의 행복을 앗아간 아나톨리를 만납니다. 그는 한쪽 다리를 잃고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는 아나톨리를 보고 연민의 눈물을 흘립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승리를 확신하던 러시아군은 뜻밖의 타격을 받고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집니다.
러시아군은 퇴각을 결정하고 모스크바를 나폴레옹에게 넘겨줍니다. 한편, 피난길에 나타샤는 안드레이가 부상당해 근처에 후송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납니다. 여기서 둘은 서로에 대해 품고 있던 오해를 풀고 자신들의 사랑이 여전히 변치 않았음을 확인합니다.
모스크바에서 방화 혐의로 체포된 피에르는 포로생활을 하면서 플라톤 카라타예프라는 죄수를 만나 러시아적 선량함과 민중의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는 여기서 육체와 마음을 초월하는 영혼의 자유로움과 불멸을 체험하고 환희의 눈물을 흘립니다. 전쟁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안드레이는 마리아와 나타샤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면서 모스크바에서 퇴각합니다. 이에 러시아군은 사기가 고조되어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고 그 와중에 피에르가 구출됩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그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는 내면의 변화를 통해 이전의 원만치 못했던 인간관계를 복원합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피에르는 마리아를 방문하고 거기서 예전과는 달라진 나타샤를 만납니다. 이들은 안드레이 공작과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슬퍼합니다. 그러나 피에르와 나타샤는 서로의 마음 속에 새로운 사랑이 싹트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둘은 결혼을 합니다.
[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퇴각, 그리고 몰락의 시작 ]
* 나폴레옹군 원정 및 퇴각로
1811년에 유럽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스페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4년간 전쟁이 없는 평온한 시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폴레옹 체제는 거인이었지만 외양과는 달리 불안정했습니다. 그 불안정의 첫 징후가 스페인에서 발생했는데, 이제 결정적인 사건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부득이 러시아도 그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영국을 견제하느라고 유럽대륙 전역에 걸쳐 내려진 대륙봉쇄령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러시아의 지주계급이었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밀, 목재, 대마, 수지의 가장 큰 시장이었습니다.
* 나폴레옹
그 큰 시장이 대륙봉쇄로 러시아는 산업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주들은 알렉산드르 황제에게 계속 항의하면서 알렉산드르 황제는 나폴레옹과 결전을 다짐합니다. 이제 러시아는 대륙봉쇄의 그물을 찢고 그 그물에서 나오고 맙니다. 나폴레옹과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은 시간적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 공격하느냐였으나 칼은 나폴레옹이 먼저 빼들었습니다.
* 네멘강 도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생각으로는 러시아를 이번 기회에 제압해버리면 대륙운영은 안정적으로 운영될 터. 이때 나폴레옹의 대군은 총 60만명이었습니다. 그중 20만이 후미군으로 독일에 남고 40만이 네만 강을 건넜습니다.
아군의 중핵을 구성한 프랑스군은 20만도 못되고 나머지는 전부 나폴레옹 지배하의 다른 나라 병사들이었습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및 라인 연방의 독일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네델란드인, 크로티아인, 폴란드인 등 가히 총천연색으로 인종전람회를 방불케 했습니다. 일찍이 이런 대군이 편성된 일은 없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전람회는 없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바그라티온 장군이 이끄는 17만의 병사가 프랑스군의 동정을 살피면서 프랑스군이 전진하면 그에 따라 후퇴하는 작전을 썼습니다.
* 바그라티온 장군
러시아의 용장, 바그라티온, 그는 보로디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 핀란드 전쟁
대 투르크 전쟁에서 혁혁한 수훈을 세웠습니다.
러시아의 끝없는 대평원에 발을 내디딘 프랑스군의 고난은 초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군마의 먹이인 건초와 귀리가 부족했는데 말먹이 부족으로 농가의 지붕을 벗겨다가 말에게 먹였다가 며칠 만에 군마 2만 마리가 굶어죽거나 탈진했습니다. 또한 식수도 부족해서 비상용 화주는 금방 바닥이 나고 목이 말라 노천수를 먹은 병사들은 발진티푸스에 걸려서 첫 2주 만에 13만 5천 명의 병력을 비전투 손실로 잃었습니다.
특히 구급약품 수송마차들은 전투부대 뒤로 쳐져서 아무런 치료도 못 받았고 일선에선 약품을 대체할 대용품조차 없었습니다.이런 혹독한 복무 여건 속에서 탈영자 자살자가 속출하여 독일 지역 동맹군들에게는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본국으로 편지 보내기를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러시아 측은 병력을 최대한 보존한 반면 공세 측인 프랑스는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입는데, 특히 보급선이 점점 길어지는 문제를 겪습니다.나폴레옹의 급속한 행군은 당시 전문가들에게서나 나폴레옹에 호의적인 프랑스 사가들에게서조차 무리한 공세였다는 게 중론입니다.
< 스몰렌스크 전투 >
8월에 접어들어서 스몰렌스크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여태까지 잡힐만 하면 도망치는 러시아군의 전술에 몇 번이나 당하며 초조했고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마침 스몰렌스크는 러시아군의 서유럽 전진 보급기지였고 군수물자가 풍부했기 때문에 일시에 장악하려 했지만 선발대가 공성용 대포를 못 챙겨 와서 시간을 놓쳤습니다.
그 사이 러시아군 총사령관 드 톨리가 스몰렌스크 기지창 파괴를 명령했고 목조건물이 많은 스몰렌스크는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그대로 내빼 버렸습니다. 양측의 교전이 있긴 했지만 큰 교전은 아니었고 사상자수는 2만 이하였습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스몰렌스크 전투 이후 스몰렌스크를 지켜내라는 명령도 못 지키고 도시를 시원하게 태워먹은 드 톨리를 크게 질책하면서 청야전술(초토화전술)에 부정적이었던 미하일 쿠투조프를 총사령관으로 지명하였습니다.
* 알렉산드르 1세
알렉산드르가 애초에 쿠투조프를 기용하지 않은 것은 드 톨리를 바지사장으로 세워놓고 일일이 전술에 간섭질을 하기 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주전파이며 러시아 전통파를 대표하는 바그리티온 대신 만만한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출신인 드 톨리를 기용한 것입니다.
애초부터 주전파인 러시아파와 드 톨리를 비롯한 반대파를 모두 아우를만한 대장감은 쿠투조프 밖에 없었습니다. 쿠투조프는 취임 조건으로 대놓고 통수권자인 황제한테 간섭말라는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황태자인 콘스탄틴 대공을 통하여 명령권을 간섭치 말 것을 차르에게 직접 요구했고 차르는 속으로 화가 났지만 수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쿠트쵸프 원수
* 대 나폴레옹 전쟁을 이끈 대장군, 나폴레옹을 러시아에서 몰아내고 1813년 병으로 사망합니다
쿠투조프는 막상 실무를 떠맡고 보니 그동안 열심히 비난했던 드 톨리의 초토화 전술을 채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옛 수도(모스크바) 절대 사수라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령도 있었고 "한 번도 싸워보지 않고 모스크바를 내줄 순 없다"는 말을 황제 앞에서 뱉어놨기 때문에 모스크바 앞에서 한번 쯤은 전투를 벌일 구상은 하고 있었죠.
그리고 바그라티온 같은 주전파들의 반발이 심한데다가 군의 사기로 보아서도 계속 싸우지 않고 도망치면 지휘도 어려워지기 때문임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벌어진 전투가 보로디노 전투였습니다.
< 보로디노 전투 >
보로디노에서 양군의 병력은 대포의 화력까지 얼추 비슷했습니다. 새벽부터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어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가 러시아 우익에 유도 공격을 하는 척 하면서 러시아군의 좌익 바그라티온을 프랑스군 우익 포티아토프스키가 기병을 이끌어 우회하고, 중앙의 다부가 바그라티온을 협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 외젠 드 보아르네
나폴레옹의 양아들, 조세핀이 데리고 들어온 그녀의 아들이었습니다. 성실한 인품의 소유자, 양아
버지 나폴레옹에게 끝까지 충성을 받쳤습니다. 수많은 공훈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824년 뮌헨에
서 사망했습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러시아 보병대에 저지당했고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좌익은 프랑스군의 집중공격을 받으며 버텨냈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에 의하면 러시아군의 병력배치가 잘못되어 좌익에 병력이 적었고 집중공격을 받자 우익의 드 톨리가 구원을 하러 오자 개활지에서 프랑스군 좌익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측면을 노출 당했고, 이 때문에 시작도 전에 배치 실수로 진 전투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격렬한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 되었고 양군은 너나 할 것 없이 탈진했습니다. 중요한 전투 국면에서 나폴레옹은 근위대 투입을 거부했고 전투는 시간이 흐를수록 개싸움이 되어갔습니다. 양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남긴 채 소강상태에서 더 피해가 큰 러시아군이 후퇴함으로 프랑스군의 미세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 보로디노 전투, 앉아있는 이가 나폴레옹
전투 피해는 러시아군 사상자 6만 프랑스군 5만 명 정도였습니다. 러시아군에서는 바그라티온을 비롯한 적어도 6명의 장군들이 전사했고 프랑스군에선 다부가 말에 떨어져 중상을 입고 실려 갔으며 11명의 장군이 전사했고 18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양군은 인명 피해 뿐만 아니라 기병 손실이 매우 컸는데, 프랑스군의 작센기병여단 전멸을 포함 총 3만 5천필 이상의 군마를 잃었습니다. 비록 패배했지만 러시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대해 나폴레옹은 훗날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러시아 보병은 요새이며 오로지 포격으로만 파괴할 수 있었다" 라고 높이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 모스크바 입성, 불 불 불 >]
나폴레옹은 보르디노 전투 7일 후인 9월 15일, 유유히 모스크바에 입성했습니다. 늦게 후퇴 명령을 내린 탓에 모스크바 시에는 러시아군 부상자 1만 명이 치료를 받다가 도망도 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포로로 잡혔습니다.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이집트 원정 때처럼 마음껏 정복자 행세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나환자 병원에 찾아간 것처럼 모스크바에서 고아원 양로원을 방문해서 기부를 했고 정교회 사제들에겐 평소처럼 교회를 열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배려했고, 포고문으로 약탈을 금지하고 모스크바에서 흩어진 상인과 수공인들에게 공정한 통상과 안전을 보장하며 평소처럼 경제활동에 종사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나폴레옹과 참모들의 계산으론 모스크바엔 대군을 먹여 살릴 반 년치 정도의 식량이 확보되어 있고 이 정도면 모스크바에서 월동하며 항복 사절을 기다려도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그러나 9월 14일-18일 사이에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화재가 연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발생 원인으로 프랑스 측에선 러시아인들의 야만적인 애국심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나폴레옹이 알렉산드르 1세가 있는 페테르부르크에 보낸 편지에서 비난하길 방화는 당시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직접 임명된 전시 모스크바 총독 로소토프친 백작의 소행이며, 이는 프랑스가 방화범 400명을 체포하여 모두에게(?) 자백을 받은 사실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방화범을 몽땅 처형하고 나서도 아직 방화범이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화재 진압을 제대로 못했는지 다음날 또 큰 화재가 터져 모스크바의 4분의 3을 태워먹고 한때 나폴레옹이 머문 크레믈린 근방까지 번져서 잠시 성 밖으로 몸을 피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의 한 부관은 "우리는 불의 대지 위, 불의 하늘 아래, 불의 두 벽 사이를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은 사흘간 계속되었고 모스크바는 잿더미로 변하였습니다.나폴레옹의 관대한 정복자 코스프레도 별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모스크바 인구는 점점 줄어들었고 도시 안 병력들은 위대한 군대에서 폭도 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출신 너나 할 거 없이 여기까지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본전 생각이 들면서 뭔가 하나라도 챙겨가려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고관대작들의 집을 서로 차지하려고 술 퍼먹고 멱살 잡고 싸웠으며 주민들도 학대하였으며 총질은 기본이었습니다. 유서 깊은 교회들도 약탈당했기 때문에 점령군은 사제들에게 사탄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예전처럼 극장에서 연극과 오페라를 상영할 것을 지시했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배우들이 통째로 약탈(?) 당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 말도 안 들어 쳐먹는데 장교 말은 들을 리가 없고 약탈 금지령 역시 아무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장교들은 물론이고 헌병대까지 약탈병들에게 공공연히 살해당했습니다. 이런 풍조는 근위대 병력에게까지 번져 근무서는 걸 거부하고 약탈에 나서기가 일쑤였다. 크레믈린에서 나폴레옹 침실 앞 복도까지 약탈당할 정도였습니다.이 때문에 훗날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여러 가지 회고한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너무 오래 머물면서 병사들을 타락시킨 걸 후회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알렉산드르 1세가 강화를 맺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3번이나 항복을 권했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일체 대꾸를 안했습니다. 군부와 황태자 콘스탄틴 대공 황태후 마리아 페도로브나까지 강화를 권유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전투 지휘에선 미숙했으나 정치면에선 굳건했습니다. 오히려 쿠투조프 진영에 나폴레옹 사절이 간 것을 알고 문전박대 안 했다고 쿠투조프에게 직접 신하를 보내 질책까지 했습니다.약탈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식량이 모자라자 모스크바 밖까지 병력이 흩어지면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생활은 종지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이고 장수들이고 모두 알고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서로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순찰 중에 어느 병사와의 대화에서 병사가 "지금이라도 신속히 후퇴해야 할 겁니다. 황제 폐하"라고 말해 이를 듣고 이틀 후에 전군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결국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화가 나서 크렘린 궁전이라도 파괴하고 퇴각하려고 궁 밑에 폭약을 잔뜩 설치했지만 후퇴 당일 비가 내려 탑 3개와 성벽 일부분만 무너지는 정도로 피해를 면했습니다.
* 위대한 군대의 위대한(?) 몰락
나폴레옹은 후퇴 날에 또 한 번 놀라게 되는데 군대의 어마어마한 짐 때문이었습니다. 모스크바의 모든 짐마차를 동원해 (물론 나폴레옹조차도 많이 챙기긴 했지만) 일개 졸병까지 금붙이 골동품 미술품들을 산더미처럼 들고 왔으니 행군 대열이 아니라 이삿짐 대열이었습니다.
군기가 이토록 개판이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마차가 많으니 부상병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애써 자위했습니다. 4주간의 모스크바 생활 동안 병력은 저희끼리 죽이고 이탈하고 약탈하러 나가느라 9만으로 줄어버렸습니다.10월 24일 마로야로슬라베트에서 러시아군이 도발해 온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실 쿠투조프는 공격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이것도 주전파와 젊은 장교들의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공격한 것입니다.
* 회의 중인 러시아 쿠트쵸프와 수하 장군들
의도치 않았지만 러시아는 나폴레옹군을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몰렌스크 방면은 이미 양군의 격전으로 초토화된 후라 프랑스군은 보급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러시아군의 총사령관 쿠투조프는 추격에 있어 두 가지를 강조했는데 하나는 나폴레옹 군대 10명을 잡고자 러시아군 한 명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 두 번째는 나폴레옹을 러시아 국경에서 몰아내는 것. 이 두 가지만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젊고 공명심에 부푼 젊은 장교들은 쿠투조프를 노쇠하고 겁 많은 노인네라며 마구 씹어댔습니다.신중한 정도가 지나쳐서 쿠투조프가 나폴레옹을 전멸시킬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는 비판도 있으나 나폴레옹을 뒤쫓는 병력도 고생을 하며 손실이 극심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이었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이에 나폴레옹군도 신속하게 후퇴했어야 하는데 앞선 짐들이 너무 많아 신속은 커녕 느려터지게 퇴각하느라 러시아군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를 견제해야 할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이미 기병 병력이 극심하게 소모된 데다가 지독한 식량난으로 말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말이 없게 되는 탓에 다량의 대포와 수송차들이 길바닥에 버려졌습니다. 이는 나폴레옹군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포병대의 붕괴로 이어져 나폴레옹 몰락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네이 장군의 3군단 기병 병력은 사실상 전멸했고 뮈라의 병력도 겨우 수천으로 감소했습니다.극심한 식량난으로 행군 탈락, 탈주병들이 급증했습니다.
그러나 탈주병들은 잡혀서 포로가 되도 사는 걸 장담하기 어려웠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있던 러시아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거나, 얼어 죽거나, 굶어죽거나, 병 걸려 죽거나, 운 좋게 포로로 잡히더라도 러시아군은 포로들을 먹여 살릴 의도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군의 병력은 갈수록 줄어들어 11월 8일 스몰렌스크에 겨우 도착했을 때는 생존자는 6만까지 줄어들었고 무장한 병력은 4만에 불과했습니다. 쿠투조프의 판단대로 공격하지 않아도 적은 알아서 무너지고 있었고 바짝 뒤쫓기만 해도 말고기에 화약을 뿌려먹다가 알아서 병들거나, 굶어 죽든가, 농가를 약탈하며 흩어지든가, 카자크에게 목과 약탈품을 조공으로 바치든가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식량은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병사들은 크렘린에서 노획한 금은보화를 몸에 지고 어그적거리다가 눈밭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좀비처럼 휘청대며 걷는 그들의 동료들에게는 언덕 위에서 코사크들이 총알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쇠약해진 병사들은 전염병에도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 끔찍했던 베레지나 강 도하 >
나폴레옹은 간신히 드네프르 강을 건너 마지막 장애물인 베레지나 강을 향해 바쁜 도망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빅토르와 우디노의 남은 3만여 정규군을 포함한 약 5만 명의 체계 잡힌 병력과 그 절반 가량의 낙오병, 비전투원들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북쪽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군대가 빅토르와 우디노의 군대를 뒤쫓아 남하하여 압박해오고 있었습니다. 치챠고프와 비트겐슈타인이 이끄는 두 군대가 합류한 후 원정군의 후퇴를 저지하며 쿠투조프의 본대와 연계해 공격해오면 탄약과 물자가 거의 다 떨어진 상황에서 여지없이 전멸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휘하 군대를 독려해 최대한 빨리 서쪽으로 가 바리사우에서 베레지나 강을 건너려고 했습니다. 이즈음에는 기온이 올라가 드네프르 강도, 베레지나 강도 얼어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11월 28일, 바리사우에 있는 베레지나 강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강 좌안에 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 어떻게든 치챠고프의 주력을 도강 지점에서 떼어 놓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를 위해 몇몇 곳에서 동시에 도강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치챠고프는 원정군이 바리사우보다 하류에 위치한 지점을 골라 도강할 것이라고 오판해 주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덕분에 에블레 장군이 감독하는 나폴레옹군 공병대는 바리사우의 약간 상류에 있는 스투디안카 마을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다리 건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동반한 이동식 부교들은 드네프르 강을 건널 때 사용한 후 수거하지 못하고 없애버렸으므로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공병들은 알맞은 자재도 부족하고 한겨울에 얼음같은 차디찬 강물 속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작업하는 등 험악한 조건을 딛고 두 개의 부교를 완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근위대를 포함한 나폴레옹군은 하루 이상 거의 방해받지 않고 강 너머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착각을 깨닫고 군대를 되돌린 치챠고프가 강 좌안을 방어하는 우디노와 네이의 군대를 총공격했으나 저항도 격렬하여 기어코 교두보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한편 북쪽에서 접근한 비트겐슈타인의 군대는 아직도 강 우안에 있던 나폴레옹군을 공격하고 다리에 포격을 가했지만 빅토르가 이끄는 4천여 명의 후위 부대는 5배에 가까운 러시아군의 공격을 견뎌내었습니다. 가슴팍까지 얼음장 같은 물 속에 잠겨 하는 작업 자체가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마침내 다리가 완성되었다 싶자 러시아군이 공격해 왔습니다. 네이(Ney) 장군과 빅토르 장군이 후위를 맡아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끝에 도하는 성공했지만, 그 뒤로도 강추위와 산발적인 습격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 베레지나 강 도하 지도, 나폴레옹의 다부,네이,웨젠,쥬노 등 막강한 장군들이 보입니다.
러시아 비트겐스타인의 부대가 위에서 쳐 내려오고, 오른쪽에 쿠트쵸프의 본진이 닥쳐오고
있습니다. 다행히 치차코프군이 도하지점을 잘못 알고 아래로 군대를 몰고가는 바람에...
사실 베레지나 강 도하전인 11월 6일, 나폴레옹은 본토에서 클로드 프랑수아 드 말레 장군이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사실 전사하였음"이란 명분으로 파리에서 10월 23일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보고받았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선 한시 바쁘게 본국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강을 건넌 후 12월 5일, 나폴레옹은 자기 매제이기도 한 뮈라에게 뒷일을 맡기고 썰매를 타고 본국으로 황망히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뮈라는 자신의 영지인 나폴리 왕국을 지키려는 목적에 나폴레옹의 양아들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잔존 부대를 남기고 서둘러 탈주해버렸습니다.
* 나폴리로 내뺀 뮈라
곱슬머리의 미남, 단순무식하지만 최고의 기병대장이었습니다. 기병이 공격하는 타이밍을 기가 막
히게 포착하는 천재적인 수준이었고 나폴레옹 초기부터 수훈을 세웠습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롤린
과 결혼하고 나폴리 왕으로 책봉됩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 말기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나폴리로 내뺍
니다. 후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한 뒤 나폴레옹에게 다시 붙으려고 했으나 그의 배신에 치를
떤 나폴레옹은 발길로 걷어찹니다. 나중에 오스트리아군에 붙잡혀 총살당합니다
12월 7일부터 9일까지는 영하 39도의 강추위가 찾아왔습니다. 당연히 들판에서 노숙하던 병력들은 상당수 얼어 죽었습니다. 보아르네는 간신히 남은 부대를 이끌고 12월 14일, 러시아 영내를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러시아 원정군 60만명 중 25만이 전사하고 10만이 포로가 되고 15만 명이 부상 또는 실종되었습니다. 역사상 최대를 자랑하던 대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소식에 지금까지 숨죽이고 지내던 독일 라인연방 국가들이 너도 나도 벌떼같이 일어나 반 나폴레옹의 기치를 높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군대를 동원하였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습니다. 유럽 전역의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 프랑스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반 프랑스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스페인에서는 웰링턴이 피레네 산맥을 향하여 프랑스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니다.
" 1년 전에는 전 유럽이 우리와 함께 진군하고 있었다. 오늘은 전 유럽이 우리를 향하여 진격하고 있다...."
* 패인
나폴레옹은 일언반구 대꾸도 안하는 알렉산드르의 답변을 기다리는 통에 모스크바에서 너무 오랫동안 미적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초부터 방한 장비도 없이 좋지 않은 계절에 출격했습니다. 러시아로부터의 퇴각은 비극이었으면서 동시에 기적이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아무 보급도 없이 적군의 집단 공격을 받아가면서 이 얼어붙은 대지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가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폭설, 동결했다가도 별안간에 깨어지는 하천, 코사크 기병 등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분쇄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대육군에는 누더기를 걸친 초라한 부상병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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