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5.연중 제1주간 토요일>
<마르2,13-17>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나를 따라라.”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위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에, “저는 옳지 않은 자들과 함께 앉지 않았고 음흉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시편26,4) 라는 말씀처럼, 이들의 눈에는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성서 말씀과 맞지 않은 행동이라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은총이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 수련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완성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은총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세주이신 것이지요.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은,
은총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몰라보는 것일까요?
마태25장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들은
‘37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걸을 때 어떻게 걷는지 모르는 것처럼,
의인들이란,자신들도 모르게 선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향하면 선을 향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 자체가 되도록 해야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행복을 채우려고 세상적 탐욕인, 재물, 애욕,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행복 자체이신 하느님을 통해서 부수적으로 오는 선물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돈을 따라가면 안 되고, 돈이 저절로 선물이 되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행복자체, 선 자체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법은?
내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순간순간만을 예수성심께 봉헌합니다.
그 이외의 것에서는 이탈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봉헌 후 의식마저 내려놓고, 마치 아버지 하느님의 품 안에 있는 것처럼,
예수성심 안에 머물면 됩니다.
<Mark2,13-17>
13 Once again he went out along the sea. All the crowd came to him and he taught them.
14 As he passed by, he saw Levi, son of Alphaeus, sitting at the customs post.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15 While he was at table in hi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sat with Jesus and his disciples; for there were many who followed him.
16 Some scribes who were Pharisees saw that he was eating with sinners and tax collectors and said to his disciples,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17 Jesus heard this and said to them,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I did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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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행복과 쾌락의 차이
정신건강의 핵심적인 요소는 행복과 쾌락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
이 둘 모두 아주 좋은 감정이기 때문에 똑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매우 차이가 크다.
행복은 당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더 가까워지도록 행동하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고,
이와는 달리 쾌락은 주로 약물중독, 도박, 성 관계와 같이 짧은 시간동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며 행복보다 더 기분이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쾌락에 속아서는 안 되며, 쾌락과 행복은 서로 다른 경험임을 알아야 한다./
술집에 있다면 많은 남녀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웃고 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술을 제거하면 그들의 동료의식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정을 제거해 보라. 그렇게 되면 그들의 웃음이 사라질 것이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웃지 않는다.
과음하는 사람, 습관적으로 도박하는 사람, 좋은 관계에서 성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쾌락만을 추구하는 성 중독자들은 행복하지 않다./
약으로 말미암은 쾌락은 뇌가 약과 싸우는 과정에서 점차 사라질 것이며, 다시 그 쾌락은 뇌가 약과 싸우는 과정에서 점차 사라질 것이며, 다시 그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약을 복용해야 한다. 이렇게 당신의 뇌는 중독이 되어 가면서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할/수 없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선택할 때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약으로 기분이 좋아지면 약을 복용하여 쾌락을 즐기려는 것 이외의 것을 하려는 동기는 줄어들게 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 불행하다. 왜냐하면 알코올로 인한 쾌락이 항상 마음에 자리하고 있어 그것이 인간관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어떠한 행복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되기 때문이다. 술을 더 마실수록 인간관계는 더 파괴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행복의 기회도 파괴된다.그리고 더 불행할수록 더 술을 마시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코올 중독증으로 가는 악순환의 길이다.
그러나 강력한 습관이나 혹은 심지어는 중독행동도 그 중독자가 약을 사용하지 않고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면 극복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50만에 이르는 단주집단 모임에 규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는 단주집단 구성원들과 우정을 나누며 행복을 추구해 가고 있다. 그리고 행복감을 느끼면서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 집단에서 볼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인간관계를 유지해 가야한다.
그런데 합법적인 중독성 두뇌용 약을 복용하는 경우는 알코올 중독자의 경우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중독성 약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주집단과 같은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희망사항은 선택이론중심 집단(조안과 함께 시도하고 있는 집단)이 약(불법적인 약 혹은 합법적인 약을 포함하여)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단주집단과 선택이론 중심 집단은 거의 같은 성격의 집단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두 집단은 상호 지원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명심할 것은 정신병이 아닌 불행은 당신의 문제이다. 당신의 삶에서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 당신은 행복을 발견해 갈 수 있을 것이다.(경고: 정신과 치료가 당신의 정신건강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생활심리 시리즈 31, William Glasser, M.D. 저, 박재황 역, 도서출판 계림, 2015,p94-98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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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제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마라
385 살아 있는 배아나 배아 줄기 세포를 연구해도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배아도 인간입니다.[2275, 2323]
아기의 장애가 예상된다고 해서 임신 중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장애가 있는 생명도 똑같이 존귀하고 하느님이 받아 주시기 때문이며, 또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육체적, 영적, 정신적 장애가 없는 삶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2006년 9월 28일)
배아를 생물학적인 물질로 여겨 그것을 ‘제조하고’ 그렇게 얻은 배우 줄기 세포를 연구 목적으로 ‘사용하는’ 행위는, 전적으로 비윤리적이며 다섯째 계명에 저촉됩니다. 그러나 성체 줄기 세포는 인체로 자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연구는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배아에 대한 의학적 개입은 치료의(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06)/
목적으로 시행되고, 태아의 생명과 온전한 성장이 보장되며, 위험성이 지나치게 높지 않을 경우에만 정당할 수 있습니다.->292
나늘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댤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태18,6)
(YOUCAT 가톨릭 청년 교리서, 오스트리아 주교회의, 최용호,2012,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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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절 다섯째 계명
살인하지 못한다(출애20,13)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한다(마태5,21-22).
->2275 “인간 배아에 대한 개입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곧 배아의 생명과 온전성을 존중하여야 하고, 배아에게 부적절한 위험이 없어야 하며, 질병 치료, 건강 상태의 호전 또는 개별 태아 자체의 온전하 생존을 지향하는 개입이어야 한다.”(신앙교리성, 훈령 ‘생명의 선물’, 1항 3: AAS 80(1988), 80-81면)(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17)/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생물학적 실험 재료’ 로 쓰려고 배아를 만들어 내는 일은 부도덕하다.”(신앙 교리성, 훈령 ‘생명의 선물’, 1항 5: AAS 80(1988), 83면)
“염색체나 유전 물질을 변화시키려는 일부 시도들은, 치료 목적이 아니라 특정 성(性)이나 미리 정한 다른 기준에 따라서 우수한 인간을 선택적으로 만들어 내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조작들은 인간 존재의 개별적인 존엄성과 온전성, 그리고 (그 유일하고 다수로 복사될 수 없는) 주체성에 어긋나는 것이다.”(신앙 교리성, 훈령 ‘생명의 선물’, 1항 6: AAS 80(1988), 85면)(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18)/
간추림
->2323 배아는 임신되는 순간부터 인격체로 대우를 받아야 하므로,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보호받고, 보살핌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830)/
->292 구약성서 안에 암시되고(시편32(33),6; 103(104),30; 창세1,2-3 참조) 새로운 계약 안에 계시된, 성부의 창조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성자와 성령의 창조 활동은 교회의 신앙 규범으로 분명하게 확언된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그분은 아버지이시고,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주인이시며, 그분은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 자신, 곧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지혜’를 통해서”(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2, 30, 9: SC 294, 318-320(PG 7, 822) “당신의 두 손”이신 “상자와 성령을 통해서”(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4, 20, 1: SC 100, 626(PG 7, 1032) 만물을 지으셨다.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공동 업적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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