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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92
6월15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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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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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RzkGFip1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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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혼자만 멀찌감치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고, 같이 먹고, 더불어 살아가는 ‘함께 영성’(Sinodality)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은 성령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은총 충만한 순간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메시아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직제자들의 감동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혹독한 박해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당당했습니다. 가난과 추위, 배고픔과 역경 속에서도 늘 기뻐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동행하지 않으셨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시대와 초기 교회 시대는 기적으로 충만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과 그분의 부활 목격 증인들은 마치 스승님처럼 놀라운 기적을 행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불치병 환자를 치유시켰으며, 이미 목숨이 끊이진 사람들까지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자신들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가진 바를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초기 교회 교우들의 모습이 첫번째 독서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2코린토 8장 2절)
이토록 놀라운 기적의 원동력이자 배경은 스승이자 길잡이이신 예수님이었고, 그분이 공생활 기간 내내 취하셨더 고유한 노선이었습니다. 노선은 다름 아닌 하향성(下向性)의 노선, 아래로의 영성, 육화강생의 노선, 자기 낮춤의 길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1코린토 8장 9절)
오늘 우리나라를 바라보니 참으로 대단한 나라, 대단한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급격한 경제성장를 초단기간에 이뤄냈습니다. 불과 5~60년전만 해도 너나할 것 없이 쫄쫄 굶고 다니던 최빈국이었는데, 이제 G7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참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압축 경제 성장 이면의 어두운 그늘,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로 인해 차별받는 이웃들, 소외되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초대교회 신자들이 목숨걸고 추구했던 공유 의식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높은 벽을 허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혼자만 멀찌감치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고, 같이 먹고, 더불어 살아가는 ‘함께 영성’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과거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의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식사 시간때 누군가가 갑자기 찾아와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환대했습니다. 자리를 좁혀 그를 식탁에 앉게 하고, 초스피드로 수저를 놓아주며 그를 끼워주었습니다.
식사 시간에 맞춰 깡통과 대문을 두드리는 걸인들을 위해 어머니들은 넉넉히 밥을 준비했습니다.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간절한 목소리로 부르짖고 계시는 시노달리니(sinodality) 운동, 즉 ‘함께 걷기’ 운동이 점점 더 큰 메아리가 되어 전 세계에 울려퍼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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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WIDf9dro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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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는 법 : 먼저 생존을 보장받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전작업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심판하게 되면 분별심이 생기고 그러면 선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대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 판단이 일지 않아야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일단 판단하여 분별심이 생기면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왜 생기는 것일까요?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이 친구인지 적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내가 ‘정글’ 속에서 살고 있음을 증명해줍니다. 정글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글은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고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으면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이 더해지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 부인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자신과 아기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 있습니다. 그녀에게 세상은 정글입니다. 내가 아니면 나와 아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모든 사람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원수가 생기는 이유는 상대방이 무언가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나를 정글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용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정글은 정글입니다. 정글에서 원수가 생기지 않으려면 정글보다 강하게 나의 생존을 보존해 줄 대상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원수가 생기지 않고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아프리카에 간 어떤 사람이 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머리를 숙여라. 무릎을 꿇어라. 기어서 아빠에게 오너라. 이제 일어서라. 잘했다 아들아.” 그렇게 한 이유를 보니 아들이 오던 길 위의 나무에 독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그대로 따릅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지금 정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아들은 무엇이 위험한지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믿으면 독사는 그냥 독사일 뿐 원수가 아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어야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이유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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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오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코린 4,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이 주신 계명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새로이 태어남으로써 자녀들이 되며, 그분의 새로운 창조물이요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녀로서의 권한을 받는다. 우리는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가 되는 권한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뜻하며,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 진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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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자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가장 잘 지켜야 하는 계명이지만, 동시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냥 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시네요. 참 어렵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사랑과 관련된 구절만 살펴봅니다.
신약의 언어인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네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는 ‘스토르게’입니다. 이것은 혈연으로 연결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품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 주는 사랑은 이웃에게도, 원수에게도, 곧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좋아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전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떠오르는 태양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하기 어렵지요. 그럼 우리 함께 하늘의 태양을 보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태양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하느님께서 무조건 베푸시는 사랑임을 기억해 봅시다. 태양을 보면서, 비를 맞으면서, 그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여 원수에게까지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은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하여 움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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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이 말씀은, “편 가르기를 하지 마라.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내가 사랑해야 할 나의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따라서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이웃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그래도 살다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생기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생긴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라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미움부터 없애려는 노력을 왜 하지 않는가?” “혹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이 어렵다는 말만 하는 것은 아닌가?” 내 안에 있는 ‘이웃에 대한 미움’을 없애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 안에 있는 ‘나에 대한 미움’을 없애려면 그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야 합니다(마태 5,23-24).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원수를 좋아하여라.” 라는 계명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과 좋아하는 감정은 양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실천이고, 선의 실현이기 때문에, 감정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미워하고 싫어해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감정과 사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는 것만 사랑이 아니라, 타이르고, 꾸짖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엄하게 꾸짖으신 일은(마태 16,23),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고 비판하신 것도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위선을 싫어하셨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실천한 대표적인 예는 루카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으로 생각됩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원수 사이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이 원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라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루카 10,36), 이 말씀은 “누가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먼저 이웃이 되어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서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원수가 될 것인가? 또는 그 이웃을 원수로 삼을 것인가?” 이것은 각자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할 일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여라.”로 해석할 수 있는 율법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우리가 구약시대를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한 시대”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들어 있는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율법을 인용한 말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리킨 말로 해석됩니다. 구약성경에는 그런 율법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사랑의 궁극 목표는 회개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신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뜻인데, 그 사랑은 그들도 모두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를 묵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라는 말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죄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세리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말은, 세속 범죄자들이 자기들끼리 ‘의리’라고 부르는, ‘패거리 의식’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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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업무상 ‘비밀취급인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서류에는 ‘대외비, 3급 비밀, 2급 비밀, 1급 비밀’이 있습니다. 서류를 인수하면서 서명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3급 비밀까지 취급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2급 비밀과 1급 비밀은 더 많은 보안이 필요했기에 비밀취급인가의 등급이 높은 사람만이 볼 수 있었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입니다. 저는 교구청의 여러 모임에 위원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참석하는 모임의 서류나 공문을 열어 볼 수 있도록 제게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주교평의회나 참사회의의 서류나 공문은 제가 볼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밀을 취급하는 사람은 알게 된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알게 된 정보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공익을 위해서, 긴급한 재난의 상황에서 비밀을 해제하거나 공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의 지적재산권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공개된 정보를 활용해서 더 많은 백신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사회 정의를 위해서 비밀문서를 공개하기도 합니다. 당시의 정책이 국민을 위한 것이었는지,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투명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업체의 재무제표도 공개됩니다. 그래야 신뢰하고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다양한 웹들도 무료로 공개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료로 공개된 웹을 통해서 생활에 편리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유에서 존재로 넘어가는 삶의 모습을 ‘공유경제’ 모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사무실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각종 사무기기를 함께 사용하기에 비용이 절감됩니다.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기에 임대료도 절약 됩니다. 옷을 함께 사용하기도 합니다. 면접을 가거나, 모임에 참석할 때 굳이 비싼 옷을 사지 않고,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옷을 입고 반납하면 됩니다. 휴가를 갈 때 좁고 비싼 호텔을 이용하기 보다는 넓고 저렴한 빈집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집을 소유한 사람과 숙소를 원하는 사람을 연결해 주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까지 안전하게 이용하는 차량도 있습니다. 차량이 필요한 사람과 차를 이용해서 수익을 원하는 사람을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정부의 자원을 회의실과 강의실, 강당과 다목적 실, 주차장, 체육시설, 숙박시설과 같은 자원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저렴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한다고 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국가의 자원을 국민을 위해서 돌려주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저도 사제관 지하에 자전거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다른 신부님들도 자전거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필요한 신부님들은 언제든지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뉴욕으로 여행 온 신부님들이 사제관에 있는 자전거를 이용하였습니다. 소유하는 것보다 공유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미 소유의 삶이 아닌 공유의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진 것을 교회에 봉헌하였습니다.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도, 궁핍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도, 과부도, 노약자도 따뜻하게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성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소유하는 삶에서 존재하는 삶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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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 중에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말씀이지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인 이유는 단지 말씀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삶 자체가 그 말씀의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자 비신자나 할 것 없이 기억하고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5,43)하시면서 큰 계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4-45)
신자들은 비신자들과는 삶이 달라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이어서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6-47)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자기와 친한 사람과는 인사를 하며 지냅니다. 우리가 여기에 머무른다면 신자로서 비신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여기에 머무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을 좋아하고 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삶이라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지요. 세리나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대상을 구분하지 말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는 말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율법 해석에 힘입어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할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롭게 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왔다면 어렵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수정해야 합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말씀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지요. 미움은 모래에 새겨서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고 은혜는 돌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다치고 힘겨워지는 사람은 미움을 새겨 놓는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요. 프란시스 베인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수할 때 인간은 그 원수와 같은 수준이 된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는 그 원수보다 위에 서 있다.“
더 큰 사람은 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며 결국 악순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실천의 삶이 우리 신자들의 삶이어야 하며,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좀 다른 사람도 기꺼이 인사하고 받아들이며 친교를 맺고 미움은 용서의 바람으로 빨리 지우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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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시면서,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는 계명을 언급하십니다. 그런데 구약 어디를 보아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있지만,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이 명시적으로 규정된 곳은 없습니다.
그 계명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이웃과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명확히 구분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웃에는 한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 땅에 거주하고 있는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범주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적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땅은 하느님께서 선택된 민족에게 마련해 주신 것이었기에, 그 땅을 공격하거나 지배하려고 하는 모든 이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하느님께 대적하는 원수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인들을 통하여 전해져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켜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를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수 사랑은 그리스도교 정신의 근본적인 핵심이면서, 가장 성숙한 열매입니다. 내가 비록 가까운 사람도 용서하지 못하여 힘들어하고 있을지언정,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가까이 가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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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어떤 사람이 가시가 잔뜩 나 있는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쥐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지금 손이 너무 아파.” 가시나무를 손에서 놓으면 그만일 텐데, 그 사람은 아프면 아플수록 더 힘을 주어 그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쥡니다. 이 사람이 아픈 이유는 가시나무 때문일까요, 가시나무를 쥐고 있기 때문일까요?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 있지?’, ‘네가 내 돈을 그렇게 떼먹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다 보면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마음에 큰 멍이 생긴 것처럼 아픔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마음의 병이 몸에도 영향을 주어 몸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건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또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원수 같은 그 사람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우리가 아픈 이유는 그 사람이나 그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을 붙잡고 있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더 폭넓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원수의 모진 말에만 시선을 두면 아픈 마음이 생기고, 원수의 단점에만 시선을 두면 증오심이 생깁니다. 또 상처가 된 사건들만 바라보면 우울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반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네주었던 격려를 떠올리면 용기가 생기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장점에 시선을 두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또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감사함이 넘쳐흐릅니다. 요컨대 원수를 사랑하려면 나의 시선을 달리해야 합니다.
가시나무를 당장 손에서 놓는다고 아픔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처를 낫게 하는 첫걸음입니다. 그 첫발을 떼고 인내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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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혹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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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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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우리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살아내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과 수도자의 길과 사제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힘든 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로 동화되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동화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요 율법의 본질인 사랑입니다.
마지막 힘듬인 너를 위해 죽는 바로 그 전 단계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 사랑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원수 사랑과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23,34)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몸소 원수를 사랑하셨고,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때문에 원수 사랑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구원의 일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완전한 사람,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완덕의 산을 오르려면, 원수 사랑과 박해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큰 산을 반드시 넘어야 합니다.
오늘 수사님 한 분과 함께 설악산 대청봉에 오릅니다. 참으로 힘든 산인 원수 사랑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산을 기억하면서, 특히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산을 기억하면서, 뚜뻑뚜뻑 대청봉을 향해 오르면서 땀 흘리겠습니다. 그리고 소리없이 매일 복음 묵상글을 통해 만나는 저의 영적인 벗님들도 기도 중에 기억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성모님 손잡고 화이팅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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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처럼>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처럼>
하느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시듯이
나도
그대를
사랑해야 해요
그래야 비로소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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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혼자 개인 여행을 갔다가 있었던 황당한 일이 생각납니다. 빨리 화장실에 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저는 얼른 근처 카페로 들어가서 차를 주문하고는 곧바로 화장실로 갔습니다. 급한 일을 모두 마치고 세면대에 가서 손을 씻는데 난처한 상황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쎄 남자 소변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화장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화장실 안에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뻔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밖으로 나왔는데, 문 앞에서 어떤 자매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 자매님이 깜짝 놀라면서 눈이 동그랗게 커졌습니다. 그리고 제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을까요? 저를 혼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아! 죄송합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옆의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셨습니다. 남자가 나오니 그곳은 남자 화장실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차마 “자매님, 여기가 여자 화장실이에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이렇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할까요? 당연히 좋은 행동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더 밝고 행복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모범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런데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원수같이 말도 잘 듣지 않는 나를 그리고 당신 뜻에 정반대로 행동하는 나였습니다. 그런 나를 용서해주시고 또 당신의 큰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을 떠올려보십시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주님 말씀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당신의 모범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범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십니다.
이 은총과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를 위해서 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영향이 계속되어야 하므로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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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가 잘 되는 곳은?>
어느 동네에 과일가게가 세 군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가게 중 어디가 제일 장사가 잘될까요?
1) 그냥 오시는 손님을 맞이하고 파는 곳.
2) 멋진 실내장식이 되어 있는 곳.
3) 과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곳.
3번의 과일가게가 제일 장사가 잘되는 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 사장님께서 이런 말을 합니다. 과일에 관해 설명할 때와 설명하지 않을 때 매출액이 2배 차이가 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과일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답니다. 알면 알수록 전달해 줄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단순히 땅끝으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금의 자리를 포함해서 모든 곳에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새로운 교우가 오면 왔나보다 하는 수동적인 교회.
2) 아름다운 성전 만들기에만 힘을 쏟는 교회.
3) 새로운 교우가 오면 자세히 설명해 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는 교회. 당연히 3) 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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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사랑! 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 이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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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하느님의 소망所望이자 우리 삶의 궁극 목표目標-
“주님,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이옵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이사26,8-9)
아침성무일도중 마음에 와닿은 이사야 찬가입니다.우리 하나하나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소망이자 우리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누구나 한결같이 노력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훌륭한 사람이, 위인이, 성인이,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온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누가 과연 이런 훌륭한 사람일까요? 재산이, 학식이 많아서, 지위가 높고 인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참으로 무사한, 깨끗한, 초연한 이타적 아가페 하느님 사랑을 닮은 참 사랑의 사람이 진정 훌륭한 사람입니다.
‘훌륭하다’가 순 우리말인줄 알고 찾아 봤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칭찬할 만큼 뛰어나고 대단하다는 뜻’으로 어원은 한자 ‘홀륜(囫圇;온전할 홀. 완전할 륜)’에서 나왔으며 홀륜은 이지러지거나 모자람이 없이 이루어진 완전한 모양의 덩어리라는 뜻이라합니다. 홀륜의 중국어 발음(hulun)이 변화한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진정 훌륭한 사람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 하나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진정 참 사람이요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훌륭한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참 깊고도 깊은 순수한 사랑, 하느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잠시 어제 있었던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 또한 일종의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화투 비광에 담긴 뜻과 더불어 원장 수사가 이를 바탕한 합성 사진에 관한 내용입니다.
“화투 비광 그림의 위쪽 검은 것은 버들가지, 가운데 파란 것은 냇물, 왼쪽 아래 구석의 노란 것은 개구리입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학자이자 서예가인 ‘오노노미치카제’입니다. 비광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합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심한 좌절상태에 빠져 있던 미치카제는 냇가를 거닐다 무심코 아래를 보니 개구리 한 마리가 불어난 물에 쓸려가지 않으려고 늘어져 있는 버들가지를 향해 온힘을 다해 점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가지가 높아서 개구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버들가지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미치카제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어리석은 개구리 같으니라고, 노력할 걸 노력해야지...’
그런데 때마침 강한 바람이 불었고 버들가지는 개구리가 있는 쪽으로 휘어졌고 마침내 개구리는 버들가지를 붙잡고 냇가를 벗어나 올라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미치카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또한 하느님의 구원하는 아가페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예화입니다. 개구리뿐 아니라 미치카제도 구원한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위 비광 그림의 예화와 더불어 제가 집무실 앞에서 찍은 사진을 비광과 합성된 사진을 원장수사가 보내준 것입니다. 제가 즉시 화답한 메시지입니다.
“멋집니다. 기발한 착상입니다. 길이 남을 작품입니다. 비광의 숨은 뜻도 감동적입니다. 개구리에게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를 배웁니다. 하느님 아가페 사랑은 결코 무심하지 않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이 기막힌 합성작품은 하두 정교한 작업이라 무려 2시간이 걸렸다니 이 또한 일종의 하느님 아가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아가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 궁극의 희망입니다. 우리를 감동케하고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사실 이런 사랑을 발견하면 살 힘이 생깁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하느님 아가페 사랑의 절정을 참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간곡한 권고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하늘 아버지께서 차별없는 무상無償의 사랑을 끊임없이 쏟아 주시기에 이렇게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섯의 대당명제(1.화해하여라, 2.극기하여라, 3.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 4.정직하여라, 5.폭력을 포기하여라)에 이어 마지막 결론같은 ‘6.원수를 사랑하라’는 결론같은 대당명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비상하거나 특별한 사랑이 아닌, 차별이나 무시가 없는 인간 모두에 대한 존중과 연민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유일한 소망이자 우리 삶의 궁극 과제를 부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래야 이지러지거나 모자람이 없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늘 아버지를 닮아갈 때 비로소 참 사람의 실현이자 완성입니다. 세상에 온 보람이자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이의 하느님 아가페 사랑의 영원한 롤모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야 말로 아가페 사랑의 샘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격찬 받는 ‘환난의 큰 시련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푼’ 마케도니아 교회 신자들이 이런 아가페 사랑의 본보기입니다. 마지막 바오로의 말씀이 참 멋지고 은혜롭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는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새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텅빈 가난의 충만한 샘’이요, 마르지 않는,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아가페 ‘사랑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샘터인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 아가페 사랑으로 영적 갈증을 완전 해갈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아가페 순수한 사랑은 베네딕도 규칙의 절정인 참 아름다운 제72장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성규72,4-12)
마음만 먹고 한결같이 노력하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훌륭한, 아가페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싫든 좋든 상관없이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연민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잘 들여다 보면 예외없이 고단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가엾은, 측은한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아가페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아가페 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에서 샘솟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사는 동안, 나의 하느님 찬송하리라. 행복하여라, 예수님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시편146,1ㄴ.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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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를 닮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 본능이나 감정만으로는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원수에 대한 복수나 박해자에 대한 저주가 율법이나 관습으로 용인 내지는 묵인되어 왔으니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상당히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6)
아버지는 선인도 악인도, 의인도 불의한 이도 가리지 않고 해와 비를 보여 주십니다. 그분께는 누구도 제외되지 않지요. 그분의 사랑이 반응의 일환이거나 대가성 응답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분 사랑은 계산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순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완전함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예외를 두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에서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지요. 모든 사랑은 아버지의 이 완전함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 부르면서 그 사랑을 닮지 않았다면 자기 욕정의 만족을 위한 거래일 공산이 큽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독려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2코린 8,3)
사도는 마케도니아 교회에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환난과 시련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언가를 많이 받고 누리는 부유함보다, 오히려 베풀고 나눌 수 있는 비움의 덕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난을 떠안으시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모든 불의를 떠안으시면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신 교환의 신비가 가장 큰 구원의 선물, 곧 은총이지요.
죄인일 수 없는 분이 죄인이 되시고 의로울 수 없는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가난하실 수 없는 분이 가난하게 되시고 부유할 수 없는 우리가 부유하게 된 신비가 바로 은총입니다.
이 은총은 "우리"라는 울타리, "형제"의 경계를 넓히게 해 줍니다. 우리의 부유함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대가이니 그분 마음이 아파하시는 이들과 나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은총으로 받은 모든 것은 원래 주님의 것이었으니까요.
가난으로 고통받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어려움 중에서도 팔을 걷어부치고 손을 내밀게 만드는 사랑은 나와 너, 우리와 너희, 형제와 원수, 이웃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무는 데서 시작합니다. 모든 인간, 모든 피조물이 완전하신 아버지의 한 자녀이고 한 형제라는 의식에서 출발된 사랑은 차츰 확장되어 원수에게까지, 박해자에게까지 가닿을 수 있습니다. 원수, 박해자에게서 시작하려면 한없이 어렵지만, 모두가 "우리"라는 의식에서 시작하면 사랑도 가능하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특정인일 수도 있고 어떤 부류의 소수자나 집단일 수도 있지요. 내가 형제와 이웃의 담정 밖으로 밀어낸 이들, "우리" 안에 끼워주길 꺼리는 이들은 철천지 원수부터 나와 다른 이들까지 다양할 겁니다.
혹 그런 이들이 떠오른다면, 아주 조금씩 마음의 울타리를 넓히려는 결심부터 시작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노력이 내가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이고, 그러다보면 원수도 박해자도 제외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아가려 오늘도 서툴고 미숙한 사랑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바친 인내와 희생이 은총의 열매로 영롱히 맺힐 것이니,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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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vR_ykFKLlE&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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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사랑에
전문가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불완전한 사랑의
전문가들입니다.
사랑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기에 제자신을
아프게 돌아보게 합니다.
불완전한
제 자신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제 자신 또한
누군가의 원수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청합니다.
미움과 분노
적개심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가로막는
오만과 교만을
깨닫습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온전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불완전이 있기에
완전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낮아지시는
십자가의 여정을
다시 만납니다.
낮아지는 것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과정에 충실한 것이
사랑의 본래 모습임을
믿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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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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