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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메 으메 어짤까이?
존웨인 같은 자세로 중년의 남자가 가슴 속에서 빼든 것은 검은 장지갑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빼든 것이 지갑이란 것을 확인했을 때까지 배장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어쩌면 자신의 가슴에 예리한 단도가 꽂히거나 총알이 박힐 것이라고 상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사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중년의 남자가 가슴 속에서 빼든 것이 검은 장지갑이란 것을 확인한 배장로가 중년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게 뭡니까?”
“보고도 모르십니까? 지갑올시다.”
“지갑은 왜요?”
“헌금하려고요.”
“네에? 헌금이라뇨?”
“기도 받고 헌금 안하면 지옥 가잖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긴 교회가 아니고.”
중년의 남자가 배장로의 말을 황급히 가로 막았다.
“헌금하는데 교회가 따로 있습니까? 기도가 있는 곳이 교회지요. 안그렇습니까?”
배장로는 중년의 남자를 한 번 더 쳐다봤다.
중년의 남자가 한말에 배장로가 무안해졌다. 장로라는 종교지도자인데도 중년 남자의 믿음에 못 미치는 것 같아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중년의 남자는 닌자의 칼 뽑기처럼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뽑아 든 지폐를 배장로 앞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상황이 이렇게 반전될 때까지 최사장은 언제 터질지 모를 배장로의 비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 죽거나 다친다는 것을 기다린다는 건 뭐한 표현이지만 적당한 표현방법이 없고, 솔직하고 양심적인 작가의 입장에서 에둘러 표현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 최사장의 심중이 그랬다는 것은 사실이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은 예외겠지만, 겉으론 아닌척하면서 속으로는 남이 잘 못됐으면, 그런 생각 안하는 사람 있을까? 오죽하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그랬을까? 그러니까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오늘이나 예전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허긴 그게 인간의 속성인 것을 어이하랴?
이런 광경을 확실하게 목격하고 검증하려면 300몇 명이 온갖 지랄 떨고 있는 여의도 돔하우스에 가면 자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건 그렇고.
중년의 남자가 휘두른 주먹이나 흉기에 분명히 배장로가 비명을 지를 것이라고 하마나하마나 기다리는 최사장의 귀에 들려 온 것은 이상한 소리들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탁자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비명이 아니고 무슨 돈 이야기 같았다. 헌금이라면 분명히 돈 아닌가?
최사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의 가전매장에 들어오는 손님을 척 보면 살 사람인지? 아니면 가격만 떠 보는 사람인지? 또 아니면 아이쇼핑만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짚어내는 실력의 최사장이다. 그런데 이 무슨 해괴한 일일까? 최사장은 귀를 쫑긋 세워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분명히 돈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머리털 나고는 아니지만 근래에 처음으로 예측이 빗나는 순간을 맞은 최사장은 좁은 탁자 밑에서 간신히 몸을 돌려 얼굴을 게눈처럼 탁자 위로 내밀었다.
최사장의 눈에 들어 온 것은 붉은 지폐 한 장이었다.
오천 원짜리였다.
최사장이 오천 원짜리 지폐를 목격하자 스프링처럼 탁자 밑에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흐미. 이거이 돈이다요?”
“그렇소. 헌금이 올시다.”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그럼 이거이 내꺼인디.”
최사장은 얼른 배장로 앞의 오천 원짜리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항상 동작이 느려보이던 배장로가 최사장의 손등을 재빠르게 누르며 말했다.
“안돼! 이건 내 헌금이야!”
배장로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등이 눌린 최사장이 중년의 남자를 올려봤다. 오천 원짜리의 최종목적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사이 중년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중년의 남자대신 쁘리쌰가 최사장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물론 진회장도 웃고 있었다.
배장로가 최사장의 손바닥 밑에 깔린 오천 원짜리를 잽싸게 빼내며 말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
배장로의 손가락에 달라붙어 자신의 손바닥에서 빠져 나가는 오천 원짜리를 쳐다보며 배장로에게 최사장이 말했다.
“흐미, 인간이 그러면 몬 쓴다요. 장로가 돈만 밝히면 쓰간디?”
배장로가 오천 원짜리를 자신의 이마에 탁 붙이며 쁘리쌰에게 말했다.
“세상에 별 일도 다 있네요. 이번 주일 우리교회에서 간증해야 겠어요. 그런데 방금 그분 여기 자주 오시는 분이에요?”
쁘리쌰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배장로가 궁금해서 또 물었다.
“그 분 누구죠? 참 멋진 분이네요. 교회 나가는 분 맞죠?”
쁘리쌰가 말했다.
“저분은 우리 단골이지만 치매가 있으세요.”
“뭐요? 치매라 그랬어요?”
“몇 년 전까진 참 건강하셨는데 작년부터 정신이 왔다 갔다 그래요. 가끔 옆에 있는 분에게 버스타고 가라며 차비도 드리고, 때로는 밥 굶지 말라며 1000원짜리를 드리고 그래요. 그리고 자신은 찻값을 외상으로 달고요.”
“왜요?”
“왜긴요? 돈이 없으니까 그렇죠.”
“부잔줄 알았는데.”
“예전엔 크게 나가시던 분이었는데 지금은 쪽방에 산대요.”
“자식도 없는 모양이죠?”
“아들 둘, 딸 하나 있는데 모두 외국에 산다 그러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부인은 계실 거잖아요?”
“부인은 몇 년 전에 암으로 돌아 가셨구요. 허지만 이젠 소문이 나서 그분이 떠나시고 나면 모두 받은 돈을 우리 카페에 맡기고 가신답니다.”
“아무리 치매라지만 자신의 돈을 남에게 주다니.”
배장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쁘리쌰가 숙연하게 말했다.
“그분이 돈을 주는 사람은 자신의 눈에 전부 거지로 보이나 봐요.”
쁘리쌰의 그 말에 중년의 남자가 주고 간 헌금을 배장로에게 고스란히 놓친 최사장이 눈을 번쩍 뜨며 쁘리쌰에게 정면으로 말했다.
“으미 징한 거. 긍께, 돈 주는 사람은 전부 걸뱅이걸인로 보인다 이거지라? 으메 으메 워짤까이. 치매 돈 받은 인간 불쌍해서 워쩐디야?”
그리고 최사장은 배장로를 향해 곁눈질했다.
첫댓글 경국은 장갑보고 놀랐군요
... 산 게 그런거지요...
자라등과 솥뚜겅이 생각나요~~
좋은아침입니다. 그런데 자라두껑과 솥두껑은 뭐죠?..처음 듣는?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