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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성차공식과 거울단계
◆ 성차공식
ㅡ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적 남근으로 자기의 위치를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기표에 자신의 존재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 상징적 방식으로 거세가 이루어진다.
※ 라캉의 성차공식 (세미나 Encore 의 그림참조) : 남자는 전체에 관계됨에 반하여 여자는 전체가 아님 (여자는 큰 타자에 관계), 성별차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남근에 대한 위치,
La femme n'existe pas.
Φ : 남근의 기능, x : 성차가 기입되는 곳, $ : 거세된 주체, A/ : 대타자의 결여, a : 환상대상.
1) 남성적 방식
ㅡ모든 주체 x는 하나의 남근적인 것을 수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상징적 거세를 받아들여야 한다. 원래의 주체는 빗금 쳐진 의미로 밖에 남을 수 없는데 빗금은 (1)시니피앙에 의해서 관통되었다는 뜻과 (2)지워진다는 의미가 있다. 즉 원래 우리 존재는 지워지고 시니피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을 부여받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실존적인 차원은 이름에 의해서 하나의 구별점으로 바뀌게 된다.
→ 이것은 주체화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남성적 주체의 탄생과정인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거세되지 않은 출발점을 가정해야 한다.
ㅡ상징적 남근의 거세에 복종하지 않는 하나의 예외 (원초적 아버지)가 있다. 이 예외가 있기 때문에 ‘모든’ 주체는 상징적 거세를 받아들여야한다는 논의가 가능해진다.
2) 여성적 방식
ㅡ여성은 남성과는 반대로 전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구조를 가진다. 하나의 예외적 지점이 여성에게서는 인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상징적 남근의 거세에 복종하지 않는 하나의 예외가 없다. 하나의 예외가 없다는 것은 보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ㅡ모든 여자는 거세 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여자가 다 거세된 것은 아니라는 게 여성 도식의 의미이다. 남성의 경우 모든 남자 모든 인간은 상징적으로 거세되었다고 본다면 여성의 경우 모든 여자가 거세된 것은 아니다.
ㅡ전체에 대한 부정이 여성성의 공식에 나타난다. 여성은 주이상스에 의해 자기의 위치를 설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이상스는 상징계적인 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들이다. 상징계에 우리를 가두는 것은 쾌락원리인데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들이 주이상스의 영역이다.
ㅡ여자는 주이상스에 자기의 위치를 설정한다. 그런데 대타자 역시 주체와 마찬가지로 시니피앙에 의해 관통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존재할 수는 없다.
→ 거세되지 않고 그것을 완전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기표적 차원의 메타언어는 있을 수 없다. 언어는 우리를 한계 속에 정해두게 된다. 언어는 부재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부재의 언어를 설명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언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빗금 친 A의 의미이다.
ㅡ프로이트는 여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것이 정신분석이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자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대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인간(양성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여자가 되는가를 물어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과정은 약간 다르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문제의식이었고 남성적인 것은 보편적이므로 이해가 되는데 거기에서 벗어나 있는 여성성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라캉은 더 나아가서 이야기한다. 보편성은 하나의 전체명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명제에 의해서 인식틀이 가능해지고 인식의 보편성은 전체를 전제할 때만 가능해진다. 그런데 전체 보편성을 벗어나는 것이 여성의 지위이기 때문에 사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 히스테리의 문제
ㅡ남성은 기표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존재이고 여성은 여성적인 기표를 찾을 때만 여성이 될 수 있는데 여자를 여자로 만들어주는 여성적인 기표는 사실 없다. 단지 그것을 넘어서고자하는 것 속에서 대타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 여성이다. 그래서 남성에게 있어 여성은 항상 상징적인 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주이상스의 대상처럼 다가오기 때문에 여성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던지면서도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것은 여성성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히스테리의 문제라고 라캉은 말한다.
ㅡ히스테리는 오이디푸스 과정의 억압에서 기원되는데 억압되는 것은 시니피앙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나는 하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것이 히스테리의 문제라고 한다.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여성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여성성은 여자나 남자 모두에게 하나의 질문이라고 라캉은 이야기한다. 여성은 여성성이고 남성은 남성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기표에 종속된 존재들이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성에 대해서 우리는 히스테리적으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 전체에서 벗어나는 여성성
ㅡ남성에게 여성은 항상 ‘오브제 a’로서, 즉 환상적 방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구별해줄 수 있는 남자/여자의 대등한 기표가 없기 때문이다.
ㅡ불어 ‘homme’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뜻이다. 보편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정관사가 들어가면 ‘L‘homme’가 되고 인간이면서 남자라는 뜻이 된다.
ㅡ여자를 지칭하는 것은 ‘La femme’인데 여기서 정관사 ‘la’를 붙이면 사실 성립되지 않는 관계가 된다. 전체 여성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것은 오히려 전체에서 벗어나고 있는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정관사 la는 지워지게 된다. 이것은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 전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ㅡ여성성은 주이상스를 가능한 것으로 체험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주이상스는 상징적인 쾌락원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 이 소수자 원리를 윤리적인 차원에 적용할 수 있다.
예)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 모든 인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모든 사회는 정의로워야 한다.’ 이런 것들이 보편성의 예다. 그런데 여성성의 예는 ‘모든 사회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모든 인권이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처럼 ‘모두가 ~한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 성관계는 없다
ㅡ‘성관계는 없다’라는 것은 남성과 여성으로 지칭할 수 있는 대등한 기표관계가 없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단지 여자 또는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남성적인 기표만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보편성이 성립될 때만 학문, 인식이 가능해진다.
ㅡ‘성관계는 없다’는 말은 성교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대등한 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거울단계
ㅡ프로이트는 1920년대 이후로 정신기제의 모델로 자아/이드/초자아를 내세운다.
자아 ⇔ 상상계
이드 ⇔ 실재계
초자아 ⇔ 상징계
ㅡ자아는 상상계적인 차원에서 설명이 되고 이드는 에너지 자체가 발원하는 근본적인 장소이자 충동의 저장고 같은 것이며 실재계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초자아는 상징계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하게 자아=상상계, 이드=실재계, 초자아=상징계와 같은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ㅡ초기에 라캉은 상상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1)상상계는 주체가 왜 주체가 되는가 하는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ㅡ시니피앙은 우리의 실존적 질서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는 상징계의 기본구조가 시니피앙이고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 속하는 것이 시니피앙이다. 시니피앙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고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주체는 상상계적인 방식에 의해서, 즉 동일시에 의해서 주체가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심급으로서 자아가 설정이 된다.
ㅡ(2)실재계는 65년 이후로 많이 개념화가 되는데 초기에는 실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으나 후에 상징계와의 대립관계에서 실재계의 개념이 나오게 된다.
ㅡ(3)상징계는 단순히 말하면 언어적인 질서, 시니피앙에 의해서 구조화되면서 주체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주체가 아는 세계는 상징계이다. 그런데 상징계가 현실세계처럼 다가올 수 있는 것은 거기에 항상 상상계가 같이 다니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에 대해서 ‘우리는 단어만큼 안다’고 말한다. 언어적 질서가 어떻게 펼쳐지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실은 달라진다. 하나의 과학적 발견을 예로 들 수 있다.
예) 예전에 우리는 블랙홀에 대해서 몰랐지만 블랙홀이 발견되면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설들을 동원해 설명하게 된다. 블랙홀은 우리가 직접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언어적인 세계’를 매개로 해서 비로소 다가오게 된다.
ㅡ프로이트에게서 있어서는 이드와 초자아적인 것을 자아가 적절히 통제한다. 자아는 현실원리를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자아는 상상계적인 허구라고 말한다. 그래서 거울단계 이론이 나오게 된다.
ㅡ‘거울단계’는 라캉이 만들어낸 개념은 아니고 1931년에 프랑스 심리학자 앙리 왈롱에 의해 처음으로 기술된 용어이다.
▲ 참고자료
앙리 왈롱 [Wallon, Henri Paul Hyacinthe, 1879.6.16~1962]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심리학
주요저서 《병리학적 심리학》(1926)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이수한 후, 파리대학 의학부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다. 1928년부터 국립직업지도연구소 교수, 1937년부터 콜레지 드 프랑스 교수로, 아동심리학과 교육심리학을 강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독(對獨) 저항운동에 참가하였고, 전후에는 문교부장관,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 물리학자 P.랑주뱅과 함께 교육개혁안(1947)을 작성하였다.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작성한 이 개혁안은 랑지뱅-왈롱안(案)으로 불리며, 교육사상 불후의 빛을 발한다. 그는 이상아(異常兒)의 연구로부터 출발하여 이상의 원인을 생물학적 조건과 함께 사회적 조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변증법적유물론)의 입장에서 심리학을 연구하였다. 주저에 《병리학적 심리학》(1926) 《응용심리학의 원리》(1930) 《어린이의 정신발달》(1941) 《행위로부터 사고(思考)로 De l’acte a la pensee》(1942) 《어린이 사고(思考)의 기원 Les Origines de la pensee chez l’enfant》(1963) 등이 있다.
▲ 거울단계
ㅡ생후 약 6개월 정도 된 아이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신체에 대해 발견하게 된다. 거울은 내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매개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울을 꼭 물리적인 거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나 자신을 확인하게 해주는 모든 것들이 거울이 될 수 있다.
ㅡ아이는 원초적인 자아성애만을 가지고 있다. 즉 몸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들 밖에 없는데 나중에 엄마의 개입으로 타자적인 차원을 알게 된다. 그 발견은 자기의 신체가 외부에 투영된 거울의 발견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신체가 대상처럼 자신 앞에 완전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거울은 사실 소외된 모습으로 아이를 비춰주는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 거울단계는 유아기의 성장과정 때에만 겪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기구에서 타자의 인정을 얻기 위한 원형적인 형태로서 계속 작동한다. 거울은 분열 속에서 성립 하는데 6개월 된 아이는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완전하게 운동감각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거울에 비친 아이의 상은 완전하지만 실제의 아이는 아직 감각의 덩어리인데 이 완벽한 상과 감각의 덩어리는 사실은 불일치할 수밖에 없다.
→ 아이는 자신의 상을 보면서 일차적인 신체의 불안감들을 해소하게 된다. 거울은 나의 형상들을 이미지로 되돌려주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주체가 자기의 형상들을 포착할 수 있게 해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형상에서 나의 원초적인 차원이 배제되게 만든다.
ㅡ라캉은 주체(코키토)의 본성이 거울단계에 있다고 본다. 거울에 비쳐진 상은 내 것이면서 동시에 내 것이 아니다. 나의 이미지이긴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은 아니다. 그래서 거울의 이미지는 내 것이면서 동시에 타자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ㅡ라캉은 철학에서 말하는 사유의 주체가 하나의 소외에 불과하고 이미지적인 차원, 상상계적인 차원에 자기를 고착시키는 거울의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라캉은 ‘우리는 모든 코키토의 철학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울과 같은 본성을 가지는 소외구조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ㅡ라캉은 거울단계를 통해서 그 당시의 이른바 프로이트의 정통주의라고 자부하는 주류심리학의 경향들을 가차 없이 비난하게 되고 이 일로 국제정신분석학회와 화해할 수가 없게 된다. 자아심리학이나 프로이트의 가르침을 자아의 차원에서 자아의 강화로 보는 시각은 라캉에 의하면 상상계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울단계, 자아의 형상과정의 기본 메카니즘은 소외와 동일시이다. 한편으로는 이미지에 의해서 자기가 소외되면서도 그 이미지에 의해 자기를 고착시킬 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주체가 최초로 존재론적인 안착을 하는 것이 거울 단계의 출발이다. 실제로 우리는 자아 없이 사고할 수는 없다.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것이 먼저 존재해야 한다.
ㅡ상상계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상상계가 허구이고 소외라고 해서 그것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상계가 없이는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라캉은 상상계의 본질을 알고 거기에 현혹되지 말라는 뜻이지 상상계 자체를 폐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오해
me(나, 재귀대명사) + conaissance(지식, 인식)→ 나를 아는 것, 나에 대한 인식
→ 나를 아는 것은 오해에 빠질 수밖에 없다.
ㅡ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타자적인 차원(상상계)이 원초적으로 깊이 개입한다. 이것은 인간이 대상세계를 알아나가는 과정은 항상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더불어 우리가 대상을 향하는 욕망의 구조에서 항상 타자적인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울단계의 경험은 욕망을 타자적인 욕망으로 만든다. 나의 욕망은 타자에 의해 인정될 때 제대로 욕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나의 고유한 욕망이란 없고 욕망은 타자에 의해서 인정되고 매개되며 한편으로는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타자적인 차원, 즉 자아의 개입에 의해서 왜곡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주체는 자기의 욕망에 대해 알 수가 없게 된다.
ㅡ자아가 자아일 수 있는 이유는 최초의 거울이미지(반사이미지라고도 한다)에 대한 동일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아는 언제나 나르시시즘의 결과물이다. 프로이트 자신이 자아 형성에 있어서의 동일시의 메카니즘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자아와 이드’, ‘군중심리’에서 세 가지 유형의 동일시를 설명하는데 첫 째는 오이디푸스 단계에서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동일시 두 번째는 대상적 관계의 동일시 세 번째 동일시는 히스테리의 동일시이다. 라캉은 이 중에서 두 번째 동일시를 가장 중요시 여긴다.
ㅡ대상관계를 통해 하나의 특징을 자기의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 아버지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의 모범적 이미지를 자기가 수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엄마라는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취하고자 하는 동일시의 표현인 것이다.
→ 프로이트의 인격구조에서 자아는 동일시로 설명되는데 라캉은 동일시의 개념을 확대하고 발전시켜 자아 자체가 상상계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