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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韓非子)
글 신영복/성공회대 교수
1) 미래사관으로서의 법가(法家)
법가(法家)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6국을 통일하였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현실성이란 점에 있어서 다른 학파와 어떠한 차별성을 갖는 것인가에 대하여 주목하는 일입니다.
‘한비자’에서 예제를 뽑아 함께 읽어가면서 법가의 성격을 이해하고 다른 제자백가들과의 차별성을 확인해 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한비자’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宋人有耕者 田中有株 兎走 觸株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兎 兎不可復得 而身爲宋國笑 今欲以先王之政 治當世之民 皆守株之類也(五蠹篇)
“송나라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밭 가운데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리다가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로 그는 쟁기를 버리고 그루터기만 지키면서 다시 토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토끼는 다시 얻지 못하고 송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되었다. 지금 선왕의 정치로써 오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그루터기를 지키고 있는 부류와 같다.”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는 다같이 농본적(農本的) 질서를 이상적 모델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복고적(復古的)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과거의 이상적인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선왕(先王)의 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여기에 비하여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식의 정책대응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未來史觀) 또는 변화사관(變化史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守株待兎)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는 우화입니다. 이 우화는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들을 비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방식도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다(無相時之心)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인민이 적고 재물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는다. 반대로 인민이 많고 재물이 적으면 힘들게 일하여도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世事變 而行道異也 人民少而財有餘 故民不爭.....是以人民衆而 貨財寡 事力勞而供養薄 故民爭 : 五蠹篇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양보하였다고 하지만 당시의 임금이란 오늘날의 노복(奴僕)보다 힘든 자리였다. 천자의 자리를 양위하는 것은 이를테면 노복을 그만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현령(縣令)같은 낮은 벼슬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치부하는 자리가 되고, 자손 대대로 잘 살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남에게 양보하기는커녕 한사코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법가의 현실인식입니다.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의(仁義)의 정치는 변화된 현실에서는 적합하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 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지요.
“유가나 묵가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하였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내(海內)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仁)을 따르고 그 의(義)를 칭송하였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하였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하여야 하는 것이지 인의(仁義)를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하여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자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법가사상의 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컨대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의(義)를 말할 것이 아니라 이(利)를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법가의 이러한 변화사관은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荀子)의 후왕사상(後王思想)을 계승하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후왕(後王)이란 금왕(今王)을 의미합니다. 후왕사상은 과거모델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는 현실정치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자는 “후왕(後王)이야말로 천하의 왕이다. 후왕을 버리고 태고(太古)의 왕을 말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순자의 성악설과 후왕사상이 제자인 한비자에게 계승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비자는 내외정세가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여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여 숱한 시무책을 국왕에게 바칩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비단 한비자와 한(韓)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변화된 현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고로 발상을 전환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지요. 다음 예제는 여러분도 잘 아는 화씨지벽(和氏之璧)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 奉而獻之厲王 厲王使玉人相之 玉人曰 石也 王以和爲誑 而刖其左足 及厲王薨 武王卽位 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 武王使玉人相之 又曰石也 王又以和爲誑 而刖其右足 武王薨文王卽位 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之下 三日三夜 泣盡而繼之以血 王問之使人 問其故曰 天下之刖者多矣 子奚哭之悲也? 和曰 吾非悲刖也 悲夫寶玉而題之以石 貞士而名之以誑 此吾所以悲也 王乃使玉人理其璞 而得寶焉 遂命曰 和氏之璧.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옥돌을 주워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인을 시켜 감정케 하였더니 돌이라 하였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하여 월형을 내려 왼발을 잘랐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무왕에게 그 돌을 또 바쳤다. 무왕이 그 돌을 옥인에게 감정케 하였더니 또 돌이라 하였다. 무왕도 그가 자기를 속였다 하여 월형으로 오른 발을 잘랐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이제 그 옥돌을 안고 초산에서 곡을 하였다. 문왕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다. ‘천하에 발 잘린 사람이 많은데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슬피 우는 것이요?’
화씨가 대답했다. ‘저는 발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니 이것이 제가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문왕이 옥인에게 그 옥돌을 다듬게 하여 보배를 얻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화씨의 구슬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매한 군주를 깨우치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한비자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임금들이 법술(法術)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구슬을 얻고자 하는 마음같이 급한 것은 아니며 또 올바른 도를 가진 법술가들이 월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왕에게 아직 옥돌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2) 한비자(BC.280-233)
한비자(韓非子)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한(韓)나라는 지금의 호남성 서쪽에 있던 나라였는데 한비자는 한왕(韓王) 안(安)의 서공자(庶公子)라고 합니다. 서공자라는 것은 모계의 신분이 낮은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한비자는 55편 10만 자(字)의‘한비자(韓非子)’를 남겼는데 여기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한왕에게 간하기 위한 글들이었습니다. 고분(孤憤), 오두(五蠹), 세림(說林), 세난(說難), 저설(儲說) 등 대부분의 논설은 그러한 동기에서 집필된 것이었습니다.
한비자의 글에 감탄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적국인 진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뒤에 시황제가 된 진왕은 한비자의 고분(孤憤), 오두(五蠹)의 논문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진왕의 막하에는 동문수학한 이사(李斯)가 있었는데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하여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흘립니다. 당연히 화평의 사자로 한비자가 진나라로 왔습니다.
시황제는 한비자를 보자 크게 기뻐하여 그를 아주 진나라에 머물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사는 내심 이를 못마땅히 여겨 시황에게 참언하여 한비자를 옥에 가두게 한 후,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습니다. 언필칭 권모술수의 대가인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는 또 한 번의 역설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李斯)는 순자(荀子)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습니다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희생되고 만 것이지요. 전국시대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는 듯 하지요.
이사가 간지(奸智)에 뛰어난 변설가(辯說家)인 반면, 한비자는 말더듬이였다고 전합니다. 두뇌가 매우 명석하여, 학자로서는 이사가 도저히 따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한비자를 위로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비자는 그의 사상과는 반대로 매우 우직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한비자와 이사의 스승인 순자는 그 성정이 강퍅불손(强愎不遜)하고 자존심(自尊心)이 대단한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쉽습니다.
엄정한 형벌을 주장하고 유가와 묵가의 인의(仁義)와 겸애(兼愛)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군주의 절대권력을 옹호하고, 군주는 은밀한 술수(術數)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한비자’를 읽어 가는 동안에 그러한 선입관을 서서히 바꾸어 가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왕(韓王)이 한비자의 간언을 수용하지 않은 것과는 반대로 진(秦)나라는 일찍부터 법가사상가들이 포진하여 법가 방식의 부국강병책을 실시해 왔었습니다. 우리는 물론 '한비자(韓非子)’를 중심으로 법가(法家)를 읽고자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학파이든 그것은 그 학파 이전의 사상이 계승되고 집대성됨으로써 학파로서 성립됩니다. 법가사상의 계보를 자세히 다룰 수 없습니다만 선구적인 몇몇 법가사상가는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법가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으로 먼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을 듭니다. 관중은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조세(租稅) 병역(兵役) 상업과 무역 등에 있어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법가의 개혁적 성격을 가장 앞서서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나라뿐만 아니라 당시의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개혁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군제개혁, 성문법(成文法)제정, 법경(法經) 편찬 등 변법(變法)과 개혁정책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개혁정책은 예외 없이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의 형태로 수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주권이 확립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은 보수세력의 완고한 저항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개혁정책에 의하여 비로소 군주권력을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법은 기본적으로 강제력입니다. 법은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법일 수 없습니다. 법가가 형벌을 강력한 정책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법가의 정치형태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단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끌어낸 나라가 바로 진(秦)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추진한 사람이 바로 재상인 상앙(商鞅)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진나라는 반읍국가(半邑國家)라고 불릴 정도로 변방에 있는 작은 약소국이었지만 상앙에 의하여 변법과 개혁에 성공합니다.
상앙의 개혁 역시 그의 독창적 창안이 아니고 전대의 선구자였던 자산(子産), 이회(李悝), 오기(吳起) 등에 의해 시도된 변법, 개혁의 경험 위에서 이루어졌음은 물론입니다. 특히 상앙은 먼저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하여 문서로 관청에 보관하여 백성들에게 공포하여야 한다는 소위 법의 공개성(行制也天)을 주장하였습니다.
나는 법가의 법치(法治)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법치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앙이 강조한 행제야천(行制也天)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법가의 차별성을 개혁성에서만 찾는 것은 법가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법의 공개성(公開性)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상앙은 핵심적인 것을 놓치지 않은 뛰어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법관청을 설치하고 사법관리를 두어 존비귀천을 불문하고 법을 공정, 공평하게 적용한다는 형무등급(刑無等級)의 원칙을 실시하였습니다. 이것은 귀족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을 폐지하고 군주의 절대적 권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상앙은 법에 대한 신뢰와 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엄벌주의(嚴罰主義)의 원칙을 고수하였습니다. 그것은 필부필부(匹夫匹婦)라 하더라도 반드시 상을 내리고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림으로써 법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었으며, 엄벌로써 일벌백계를 삼아 나라의 불법과 법외(法外)를 없앤다는 원칙이었습니다. 형(刑)으로 형(刑)을 없애는 이형거형(以刑去刑)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법가적 방식에 의해서만이 감히 법을 어길 수 없고(民不敢犯), 감히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民莫敢爲非) 사회 즉 무형(無刑)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논어’를 읽을 때 이목지신(移木之信)의 일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무를 옮긴 사람에게 천금을 줌으로써 백성들의 국가에 대하 불신을 없앴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상앙이었지요.
상앙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만 법가 이해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비자’를 읽기로 하겠습니다.
3) ‘한비자(韓非子)’ 예제(例題)
國無常强無常弱 奉法者强 則國强 奉法者弱 則國弱(有度)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法不阿貴 繩不撓曲 法之所加 智者弗能辭 勇者弗敢爭 刑過不避大臣
賞善不遺匹夫 故矯上之失 詰下之邪 治亂決繆 羨齊非 一民之軌
莫如法 屬官威民 退淫殆 止詐僞 莫如刑 刑重則 不敢以貴易賤
法審則上尊而不侵 上尊而不侵則主强 而守要 故先王貴之而傳之
人主釋法用私 則上下不別矣(有度)
阿貴(아귀) : 귀족에게 아첨함. 辭(사) : 말씀. 이유를 달다.
決謬(결류) : 그릇됨을 결단함. 羨(출선) : 法外를 물리침. 羨은 列外.
齊非(제비) ; 올바르지 못한 것을 가지런히 함.
屬官(속관) ; 勸勉. 屬은 勵의 잘못. 易賤(이천) ; 천한 자를 업신여김.
法審(법심) ; 법이 자세함.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먹줄이 굽히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지자(智者)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용자(勇者)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함에 있어서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줌에 있어서 필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고, 아랫사람의 속임수를 꾸짖으며, 혼란을 안정시키고 잘못을 바로 잡으며, 예외(例外)를 인정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에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위압하며, 음탕하고 위험한 짓을 물리치고 속임과 거짓을 방지하는 데에는 형보다 나은 것이 없다.
형벌이 엄중하면 귀족이 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하며, 법이 자세하면 임금은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다. 임금이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으면 임금의 권력은 강화되고 그 핵심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이 이를 귀중하게 여기고 전한 것이다. 임금이 법을 버리고 사사롭게 처리하면 아래 위의 분별이 없어진다.”
법지상주의(法至上主義)의 선언입니다. 법치는 먼저 귀족(貴族), 지자(智者), 용자(勇者) 등 법외자(法外者)에 대한 규제로 나타납니다. 법 위에 군림하거나, 법을 지키지 않는 사회적 강자(强者)들에 대한 규제에서 시작합니다.
주(周) 이래로 규제방식에는 예(禮)와 형(刑)이라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공경대부(公卿大夫)와 같은 귀족들은 예로써 다스리고, 서민들은 형으로 다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는 서민들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법가는 주대(周代)의 이러한 예(禮)와 형(刑)의 구분을 없앱니다. 귀족을 내려 똑같이 상벌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유가는 반대로 서민을 올려서 귀족과 마찬가지로 예로써 다스리자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의 이러한 방식을 현실을 외면한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의 주장이라고 조소하는 한편, 유가는 법가적 방식을 비열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어쨌든 법가는 공평무사한 법치를 주장하며 어떠한 예외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가의 법치원칙은 누구를 위한 법치인가 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법제와 구별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법가의 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법가비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 역시 군주는 아니더라도 지배계층이 권력을 강화하고, 권력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지요. 대부(大夫)는 예(禮)로써 다스리고 서민은 형(刑)으로 다스린다는 과거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범죄(犯罪)와 불법행위(不法行爲)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 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행위로 규정됩니다. 전혀 다른 2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소위 범죄와 불법행위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도 전혀 다릅니다. 범죄행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가혹한 것임에 반하여,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그 인간 전체를 범죄시하여 범죄인(犯罪人)으로 단죄하는 데 반하여, 불법행위에 대하여는 그 사람과 그 행위를 분리하여 그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불법성을 인정하는 불법행위자(不法行爲者)정도입니다. 이것은 주나라 이래의 관행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역설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법가의 법지상주의가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군주를 위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폄하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은 물론 사회구조에 대하여 매우 허약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법가의 군주권을 강화하는 이론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만이 전국시대의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하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울 것이며, 인(仁)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질 것”(法之爲道前苦而長利 仁之爲道偸樂而後窮)이라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한비자’ 유도편(有度篇)에서 천명되고 있는 이 법지상주의는 글자 그대로 법을 가장 높은(至上) 데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법이 가장 높은 것일 수 있기 위한 필수요건이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법가에서도 이 점이 간과되지 않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가 주장한 법의 기본 성격을 종합하여 보면 1)법의 성문화, 2)전국적으로 공포된 공지법, 3)전국적인 법의 통일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형식적 측면입니다. 형식도 매우 중요합니다. 형태가 일정한 그릇에 담아서 올려놓는 것입니다.
권력의 자의성을 방지하고 권력을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화는 군주권력의 강화이면서 동시에 군주권의 제한이기도 합니다. 법이 군주보다 높을 때 비로소 지상(至上)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가는 법지상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이 지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듯이 공개성, 공정성 그리고 개혁성이었습니다. 이 3가지의 성격은 법가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서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의 덩어리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지향적 사관이 아닌 변화사관에 입각하여 낡은 틀을 허물고 새로운 잠재력을 조직해내기 위해서는 이 3가지의 내용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만큼 단호한 권력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러한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는 시대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요. 그러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정치상황은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춘추시대 약 3백60년간은 중앙정부의 권위가 무너지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대의명분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진의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1백83년간의 전국시대는 어떠한 정신적 중심도 남아 있지 않고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적나라한 시대입니다.
주종실(周宗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오로지 힘에 의한 패권의 추구만이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한비자의 표현처럼 대쟁지세(大爭之世)입니다.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명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제후들은 인의(仁義)의 기치(旗幟)를 팽개쳐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정도(正道)와 이단(異端), 고도(古道)와 신설(新說)이 우후죽순처럼 각축하는 혼란의 극치를 보이게 됩니다. 빈번한 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동력 있는 기능과 구조를 갖춘 강력한 정부가 요청되게 됩니다. 정의(正義)나 명분(名分)보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책대안(政策代案)이 요구되기에 이릅니다.
치자(治者)는 더 이상 성인이거나 군자일 필요가 없으며 탁월한 전문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이러한 변법과 개혁에 대한 저항이 훨씬 줄어든 시기였음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식인을 요구하게 됩니다. 소위 법술지사(法術之士)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법가(法家)의 ‘법(法)’은 오늘의 법학(法學)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통치론(統治論), 지도자론(指導者論), 조직론(組織論) 등 오늘날 정치학(政治學)분야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훨씬 광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새로운 정치상황의, 새로운 대응과정에서 형성된 학파이기 때문입니다. 천하쟁패를 둘러싼 약육강식의 살벌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래의 낡은 방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그것도 광범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明主之所導制其臣者 二柄而己矣 二柄者刑德也
何謂刑德曰 殺戮之謂刑 慶賞之謂德
爲人臣者畏誅罰而利慶賞 故人主自用其刑德 則群臣畏其威而歸其利
(二柄篇)
“임금이 신하를 제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수단(자루)이 있을 뿐이다. 두 가지 수단이란 형(刑)과 덕(德)이다. 형과 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형이라 하고, 상을 주는 것을 덕이라 한다. 신하된 자는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 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형과 덕을 행사하게 되면 뭇 신하들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고 그 이로움에 귀의한다.”
위의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세상의 간신들은 그렇지 아니하다. 자기가 미워하는 자에게는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즉 임금을 움직여서 죄를 덮어씌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는 역시 임금의 마음을 얻어서 상을 준다. 상벌이 임금으로부터 나가지 않고 신하로부터 나가면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신하를 따르고 임금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형덕을 잃은 환란이 그와 같다. ··· 호랑이가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은 발톱과 이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발톱과 이빨을 개에게 내어주어 그것을 쓰게 한다면 호랑이는 반대로 개에게 굴복 당할 것이다.”
체(體)로서의 법(法)과 그 체의 기반 위에서 용(用)으로서의 술(術)을 활용함으로써 군주가 세(勢)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한비자의 주장입니다. 법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고, 술은 신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법은 문서로 편찬하여 관청에 비치하고 널리 일반백성에게 공포하는 것이며, 술은 임금의 마음 속에 은밀히 숨겨두고 신하들을 통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가를 법술지사(法術之士)라고 부릅니다.
한비자를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꼽는 것은 법(法)과 술(術)에 세(勢)를 더하여 법가사상을 완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상앙(商鞅)의 법(法)과 신불해(申不害)의 술(術)을 종합한 한비자의 법술사상(法術思想)은 이제 신도(愼到)의 세(勢)를 도입함으로써 절대군주제에 필요한 제왕권(帝王權)의 이론을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 군주에게 위세가 없으면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신도의 세치(勢治)입니다.
요(堯)임금도 필부였다면 세 사람도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며, 걸왕(桀王)도 군주의 위세를 누렸기 때문에 천하를 어지럽힐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군주는 세위(勢位)를 믿을 것이지 현지(賢智)를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 신도의 주장입니다. 법과 술로써 반드시 확립해야 하는 것이 군주의 세(勢)입니다.
이러한 한비자의 사상은 그것이 군주철학이란 점에서 비판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비자의 군주철학은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야말로 난세를 평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 주왕실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서 시작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혼란 역시 임금의 권위가 무너짐으로서 시작된다는 것이 한비자의 인식입니다.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권력을 확고히 하지 않는 한 간특한 무리들을 내쫓을 수 없으며, 칼을 차고 다니며 법을 무시하는 법외자(法外者)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혼란과 혼란으로 말미암은 인민의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강력한 중앙(中央)을 확립하는 것임을 한비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중앙권력을 창출하기 위하여 한비자는 관료제를 주장합니다. 위의 예제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한비자가 상벌(賞罰)이라는 이병(二柄)을 놓지 말 것을 강조하는 까닭은 군주가 신하들을 효과적으로 통어하기 위함입니다. 관료제는 군주의 일인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에 등장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관료제란 사사로운 통치방식을 지양하고 제도와 조직을 통한 통치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법가의 법치(法治)부분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관료의 임명, 직책과 직권, 승진, 포상, 겸직(兼職) 등에 관한 엄격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관료제도가 분업화(分業化)와 전문화(專門化)를 통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매우 치밀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료들을 통어함에 있어서 군주 개인의 감정과 편견을 배제하고 오로지 그 명(名)으로서 그 실(實)을 독책(督責)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른바 형명참동(刑名參同)의 이론입니다.
놀라운 것은 ‘한비자’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러 개념이 이렇듯 서로 긴밀하게 통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시종 일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형태가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가 법가에 의하여 통일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라는 권력형태는 진(秦)을 거쳐 한(漢)으로 이어지고 다시 역대 왕조를 거쳐 20세기 초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짐으로써 2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예제는 망징편(亡徵篇)에 있는 구절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일곱 가지 징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위에서 전개한 논리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하겠습니다.
凡人主之國小而家大 權輕而臣重者 可亡也 簡法禁而務謀慮 荒封內而恃交援者 可亡也 群臣爲學 門子好辯 商賈外積 小民右仗者 可亡也 好宮室臺榭陂池 事車服器琓好 罷露百姓 煎靡貨財者 可亡也 用時日 事鬼神信卜筮而好祭祀者 可亡也 聽以爵不待參驗 用一人爲門戶者 可亡也(亡徵篇)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는 크고, 임금의 권세는 가벼운데 신하의 세도가 심하면 나라는 망한다. 법령(法令)을 완비하지 않고 지모와 꾀로서 일을 처리하거나, 나라를 황폐한 채로 버려 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 신하들이 공리공담을 쫓고, 대부의 자제들이 변론을 일삼으며,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면 나라는 망한다.
궁전과 누각과 정원을 꾸미고, 수레, 의복, 가구들을 호사스럽게 하며,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재화를 낭비하면 나라는 망한다. 날짜를 받아 귀신을 섬기고, 점괘를 믿으며 제사를 좋아하면 나라는 망한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만 따르고 많은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한 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면 나라는 망한다.”
이 망징편에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역조명할 수 있는 대목이 많습니다. 나라는 작은데 대부의 영지가 크다는 것은 국가는 채무가 많고 기업이나 개인에게는 돈이 많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업 특히 금융부문의 채무를 나라에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나라를 황폐하게 내버려두고 동맹국의 도움만 믿고 있으면 망한다는 구절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인들이 그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아놓고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구절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계화시대에 역행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까?
소위 개발독재기간동안 국민들이 비싸고 질이 좋지 않은 국산품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하여 자본축적을 한 것이 재벌입니다. 불법으로 유출시킨 자본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국제경쟁력을 이유로 해외투자와 해외 이전에 열중하는 오늘의 경영방식을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는 상품논리, 세계화논리,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실물적 측면을 직시하는 관점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제조업은 해외로 이전될 것입니다. 그리고 국내의 제조업기반은 공동화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외자는 국내로 유입됩니다.
중간기술수준밖에 보유하지 못한 한국자본은 국내시장을 내주고 해외시장으로 이전합니다. 결국 한국은 자본주의국가로서의 자본의 토대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노동자와 소비자로써만 국민경제를 구성하게 됩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처럼 신기술과 신상품을 선도적으로 창출할 수 있거나, 거대자본으로 금융시장을 독점적으로 경영할 수 있거나, 아니면 막강한 군사력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키거나, 전쟁특수를 만들어내고 그 효과를 누릴 수 있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렇지 않는 한 경제는 망하는 것이지요.
제1세계의 중하위에 매달려 그 추락을 지연시키는 것이 고작이지요. 재물을 다른 나라에 쌓는 일은 2천 5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경제적 의미가 다른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鄭人有且置履者 先自度其足 而置之其座 至之市 而忘操之 已得履
乃曰 吾忘持度 反歸取之 乃反市罷 人曰 何不試之以足 曰 寧信度
無信自也 (外儲說左上)
儲(저) : 貯, 또는 聚. 모아서 저축하다.
탁(度): 본뜨다. 본을 뜬 것.
寧(녕) : ···할지언정.
“정나라 사람으로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뜨고 그것(度)을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시장의 신발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다시 시장에 왔을 때는 장은 이미 파하고 난 뒤였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발로 신어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답변은)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
장에 신발 사러 가는 사람이 발의 본을 뜬 탁을 가지러 다시 집으로 가는 이야기입니다. 탁을 가지러 구태여 집까지 갈 필요가 없음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탁을 가지러 집까지 가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위 예제의 핵심은 사람들의 반문에 대한 차치리의 답변에 있습니다. 직접 신어보고 신발을 고르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말에 대한 차치리의 대답이 매우 엉뚱합니다. 탁은 믿을지언정 내 발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구절입니다. 책에도 소개한 구절입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구절로도 기억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여러분도 차치리가 참 어리석고 우습지요?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내가 바로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탁이란 책입니다.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론 제자백가들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학문과 이론의 비현실성과 관념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해서도 따가운 일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兒說)에 관한 이야기도 같은 뜻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송나라 사람 예열은 대단한 능변가로서 흰말은 말이 아니라(白馬非馬)는 변론으로 직하(稷下)의 변자(辯者)들을 꺾었다. 그러나 그가 흰말을 타고 관문을 지날 때 백마의 통행세를 물지 않을 수 없었다.”
藏書策 習談論 聚徒役 服文學而議說
世主必從而禮之 曰 ‘敬賢士 先王之道也’
夫吏之所稅 耕者也 而上之所養 學士也 耕者則重稅
學士則多賞 而索民之疾作而少言談 不可得也
立節參民 執操不侵 怨言過於耳必隨之以劍
世主必從而禮之 以爲自好之士
夫斬首之勞不賞 而家鬪之勇尊顯 而索民之疾戰距敵 而無私鬪 不可得也
(顯學篇)
索民之疾而少言談(색민지질이소언담) : 농민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고 학자는 언담을 줄이라고 索(요구)하는 것.
立節參民(입절참민) : 절의를 내세워 사람을 모우다. 參은 聚, 作黨.
執操不侵(집조불침) : 지조를 지킨다하여 침해를 당하려하지 않음.
自好之士(자호지사) : 스스로 명예를 지키는 선비.
距(거) : 拒. 막다.
“서적을 쌓아놓고 변론을 일삼으며 제자를 모아놓고 학문을 닦고 논설을 펴면 임금은 반드시 이들을 예우하여 말하기를 어진 선비를 존경하는 것은 선왕의 도라고 한다. 무릇 관리가 세금을 거두는 것은 농민들로부터이고, 임금이 세금으로 기르는 것은 학사(學士)들이다. 농민은 무거운 세금을 내고 학사는 많은 상을 받는다. (이렇게 하고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고 언담(言談)을 삼가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의리(義理)를 내세워 도당을 모으고 지조(志操)를 내세워 (조금도) 침해받지 않으려 하며, 듣기 싫은 말이 귓전을 스치면 반드시 칼을 들고 따라가 해치는 무리들에 대하여, 임금은 반드시 이들을 예우하여 말하기를 명예를 중히 여기는 선비라고 한다. 무릇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적의 머리를 벤 병사는 상을 받지 못하고 사사로운 싸움을 한 자는 대접받는다. (이렇게 하고서도) 백성들로 하여금 목숨을 바쳐 전쟁터에서 적을 막고, 사사로운 싸움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구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유가(儒家)와 협객(俠客)입니다. 유가의 비현실적 공리공담과 협객의 불법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변설은 임금의 총명을 흐리게 하고 협객의 불법적 행위는 법질서를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법가로서는 마땅히 엄금해야 할 일입니다.
한비자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다섯 가지의 부류를 오두지류(五蠹之類)라 합니다. 참고로 소개합니다. 첫째가 학자(學者)입니다. 이유는 선왕의 도를 빙자하고 인의를 빙자하며, 용모와 의복을 꾸며서 변설을 그럴듯하게 하며 법을 의심하게 하고 임금의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그리고 둘째가 언담자(言談者)로서 세객(說客)입니다. 거짓으로 외력을 빌어 사복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대검자(帶劍者)로서 위의 예제에서 비판하는 협객(俠客)입니다. 국법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네번째 근어자(近御者)로서 임금의 측근(側近)입니다. 뇌물로 축재하며 권세가들의 청만 들어주며 수고하는 사람들의 노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번째 상공지민(商工之民)을 들고 있습니다. 비뚤어진 그릇을 만들어, 즉 사치품을 만들어 농부의 이익을 앗아간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子圉見孔子於商太宰
孔子出 子圉入 請問客 太宰曰
'吾已見孔子 則視子猶蚤蝨之細者也 吾今見之於君'
子圉恐孔子貴於君也 謂太宰曰
'君已見孔子 亦將視子猶蚤蝨也' 太宰因不復見也(說林篇)
子圉(자어) ; 송나라 대부. 商(상) : 宋을 가리킴
蚤蝨(조슬) : 벼룩과 이. 見之(현지) : 그를 (임금께) 그를 보이다.
恐孔子貴於君也(공공자귀어군야) : 공자가 임금께 귀하게 여겨질까 두려워.
"자어(子圉)가 상(商)나라 재상에게 공자를 소개하였다. 공자가 (재상을 만나고) 나오자 자어가 들어가서 (재상에게) 공자를 만나본 소감을 물었다. 재상이 말하기를 '내가 공자를 보고 나니 자네가 마치 벼룩이나 이처럼 하찮게 보이는구려. 내가 공자를 임금께 소개해 드리려고 하네.' 자어는 공자가 임금에게 귀하게 여겨질까 두려워서 재상에게 말했다. '임금께서 공자를 보시고 나면 장차 임금께서 재상님 보기를 벼룩이나 이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자 재상은 다시는 (공자를 임금께) 소개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인(人)의 장막(帳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임금이 어진 사람을 만날 수 없도록 하는 측근들의 이해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군신관계는 이해관계에 있어서 서로 대립적이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신하는 어떻게 해서든지 군주를 속이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며 무사안일을 추구하고 복지부동(伏地不動)한다는 것이지요.
반대로 군주는 이들 신하들을 철저히 독책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하가 군주의 이목을 가리는 것(臣閉其主), 신하가 국가의 재정을 장악하는 것(臣制財利), 군주의 승인 없이 신하가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는 것(臣擅行令), 신하가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것(臣得行義), 신하가 파당을 조직하여 군주를 고립시키는 것(臣得樹人)등 신하가 군주를 가리는 것이 거듭되면 군주가 고립되고 실권하는 것은 물론이며 급기야 국가가 찬탈 당하게 된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한비자'에는 법가사상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세사(世事)와 인정(人情)을 꿰뚫는 많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이야기를 읽게 되면 한비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냉혹한 마키아벨리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한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인간적 면모를 조사한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한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악양(樂羊)이라는 위(魏)나라 장수가 중산국(中山國)을 공격하였습니다. 때마침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습니다. 중산국 왕이 그 아들을 인질로 삼아 공격을 멈출 것을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중산국 왕은 드디어 그 아들을 죽여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냈습니다. 악양은 태연히 그 국을 먹었습니다.
위나라 임금이 도사찬(堵師贊)에게 악양을 칭찬하여 말하였습니다. "악양은 나 때문에 자식의 고기를 먹었다." 도사찬이 대답했습니다. "자기 자식의 고기를 먹는 사람이 누구인들 먹지 않겠습니까?" 악양이 중산에서 돌아오자 위나라 임금 문후(文侯)는 그의 공로에 대하여 상은 내렸지만 그의 마음은 의심하였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악양식자(樂羊食子)의 이야기입니다.
악양식자와 반대되는 이야기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노나라 삼환(三桓)의 한 사람인 맹손(孟孫)이 사냥을 나가서 사슴새끼를 잡았습니다. 잡은 사슴새끼를 신하인 진서파(秦西巴)를 시켜 가지고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미사슴이 따라오면서 울었습니다. 진서파는 참을 수 없어서 새끼를 놓아주었습니다.
맹손이 돌아와서 사슴새끼를 찾았습니다. 진서파가 대답하였습니다. "울면서 따라 오는 어미를 차마 볼 수 없어서 놓아주었습니다." 맹손이 크게 노하여 그를 쫓아내어 버렸습니다.
석달 뒤에 맹손이 다시 진서파를 불러 자기 아들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맹손의 마부가 말했습니다. "전에는 죄를 물어 내치시더니 지금 다시 그를 불러 아드님의 사부(師父)로 삼으시니 어쩐 까닭이십니까?" 맹손의 답변이 다음과 같습니다. "사슴새끼의 아픔도 참지 못하거늘 하물며 내 아들의 아픔을 참을 수 있겠느냐?"
이 이야기의 말미에 달아 놓은 한비자의 멘트가 있습니다.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巧詐不如拙誠)
교사(巧詐)가 졸성(拙誠)보다 못하다는 의미를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나는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읽습니다. 아무리 교묘하게 꾸미더라도 결국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지요.
나는 한비자의 이 한 구절 때문에 한비자는 매우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문장은 뛰어났지만 말은 더듬었다는 기록도 그러한 면모를 뒷받침해 줍니다. 동문수학 친구인 이사의 속임수에 빠져서 죽임을 당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펼치는 이론과는 반대로 한비자는 오히려 우직한 졸성(拙誠)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전편(問田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계공(堂谿公)이 한비자에게 충고합니다.
"오기(吳起)와 상앙(商鞅) 두 사람은 그 언설이 옳고, 그 공로 또한 대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오기는 사지가 찢겨 죽었고 상앙은 수레에 매여 찢어져 죽었다. 지금 선생은 몸을 온전히 하고 이름을 보전하는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걱정된다."
이 충고에 대한 한비자의 대답이 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보게 합니다. 동시에 법가사상의 의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한비자의 답변은 그 요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선왕의 가르침을 버리고 (위험하게도) 법술을 세우고 법도를 만들고자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지럽고 몽매한 임금(亂主暗上)의 박해를 꺼리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한 몸의 화복(禍福)을 생각하여 백성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 것은 탐욕스럽고 천박한 행동입니다. 선생께서 저를 사랑하여 하시는 말씀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저를 크게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림이든 노래든 사상이든 나는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魂)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비자의 이러한 인간적 면모가 적어도 내게는 법가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4)법가 유감(法家 有感)
법가에 대한 비판으로서 가장 먼저 드는 것으로 법가(法家)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군주(君主)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애민(愛民)사상이 아니라 군주의 권력을 중심에 두는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비민주적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비민주적 성격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면에 있어서도 군주권력에 과도한 무게를 두었기 때문에 시스템으로서의 관료제도를 실패로 이끌었다는 것이지요. 관료의 역할과 임무를 최소화(最小化)함으로써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관료제의 효율성을 살려내지 못하였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법가의 현실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법가는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당대의 사회적 과제에 대하여 새로운 대응방식을 발빠르게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학파들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법가가 추구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방책(方策)에는 민부(民富)의 기초가 없다는 것이지요. 부강(富强)의 물적 토대가 허약하다는 것이지요.
법가의 이러한 한계가 비록 천하통일이라는 현실적 과업을 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법가가 추구한 현실성(現實性)이 한대(漢代) 이후 유가(儒家)의 현실성에 그 지위를 넘겨주는 역설을 낳았다는 것이지요. 결국 법가의 현실성은 단기적(短期的) 현실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가비판에 대하여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사상가들에 관하여 함께 읽는 동안 그 사상의 장단점을 지적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자제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구성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진한(秦漢)을 하나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진(秦)과 법가(法家)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는 과정으로서, 그리고 한(漢)과 유가(儒家)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의 통치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었지요. 진(秦)과 한(漢)은 각각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이라는 역사적 임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떠한 사상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체 과정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상(位相)을 묻고, 결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법가의 장단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며, 법가의 특징을 규명하는 것이 법가의 개별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개별적 가치나 배타적 성격에 탐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관념론적 신조(信條)입니다. 다른 것과의 연관 즉 관계론에 대한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상이 갖는 한계란 실상 객관적 진리나 완성된 체계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 역사적으로 제약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역사적 제약의 상대적 표현이라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법가는 물론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읽은 모든 사상체계에 대해서도 똑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상은 모든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도도한 역사의 과정에서 출몰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철학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식을 제약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상은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법가적 대응양식 역시 당시 수많은 부국강병책의 하나였음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부국강병은 그 목표가 천하통일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천하통일은 궁극적으로는 전국시대라는 대쟁지세(大爭之世)를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제자백가들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법가의 경우 부국강병의 구체적 모델이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라는 데에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중앙집권적 관료국가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하고, 혼란의 재발을 막는 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법가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법가사상을 군주철학에 촛점을 맞추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지요.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법가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改革性)과 법치주의(法治主義)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상에 비하여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법가의 특징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구사회의 종법구조가 이완되고 보수적 저항성이 약화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공간을 충분히 향유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미래사관 변화사관이 그것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이 과거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개념입니다. 법치주의는 이러한 개혁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백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의 법치주의는 먼저 성문법의 제정과 신상필벌의 원칙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진보입니다.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예측가능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치주의 가장 발전된 형태가 관료제입니다. 관료제도는 시스템에 의한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료제에 대한 규제방식으로서의 군주의 술(術)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술치(術治) 때문에 법가가 권모술수(權謀術數)의 학(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기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성격과 관련된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란 무도한 시대이며 혼란의 극치를 보이는 시대입니다. 임금을 죽인 것이 36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2번이었습니다. 이러한 하극상과 혼란이 재발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법가에 있어서는 관료에 대한 견제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관료는 언제든지 제후(諸侯)나 대부(大夫)의 지위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료들의 이반(離叛)을 통제하고 견제하지 못하는 한 전기의 모순과 혼란이 반복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군주의 술치(術治)는 군주의 은밀하고 부정적인 권력이라기보다는 관료제라는 새로운 제도의 작동원리로서 이해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법가를 다시 읽는 우리가 결코 놓쳐서 안 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성과 법치주의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리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이사(李斯)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으로 법가를 끝내려고 합니다. 이사는 한비자를 이야기하기에도 좋고 진시황의 모신(謀臣)으로서 천하통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의 헌책으로 한비자를 진나라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한비자를 직접 만나본 진왕이 한동안 망설였다고 합니다. 아마 한비자의 언변이 매우 서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한 동안의 망설임이 한비자에게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이사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한비자를 죽이자는 진언을 합니다.
"한비자는 한(韓)나라의 공자입니다. 그를 중하게 쓰면 진나라를 위하여 진심으로 진력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그를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장래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죄를 물어 그를 없애는 것만 못합니다."
이사의 진언에도 불구하고 한비자의 역량을 아까워한 진왕은 다시 한동안 망설이게 됩니다. 한비자를 일단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사는 틈을 주지 않고 옥중에 독약을 보내 자살을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진왕의 뜻이 아님을 안 한비자가 진왕을 만나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한비자를 옥에 보내기는 하였지만 그 직후 진왕은 마음이 변하여 한비자를 사면하려고 옥중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이미 한비자의 목숨이 끊긴 후였습니다. 한비자가 죽고 3년 후에 한(韓)이 멸망하고 한이 멸망한 뒤 10년 후에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전하는 이야기가 너무 극적이어서 신뢰감이 떨어지기는 합니다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극적 구조에 대한 갈증이 없지 않는 것이지요. 스스로 권모술수의 대가인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었던 이야기도 역설적이 아닐 수 없으며 특히 경쟁상대를 제거하기 위하여 동문수학의 우정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는 이사의 비정함을 통하여 전국시대의 사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합니다.
이사는 BC 221년, 진왕(秦王) 정(政)을 보좌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모든 권력을 군주에게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기틀을 만들어나갑니다. 그때까지의 사회구조였던 봉건적 지방분권제도를 청산합니다.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고, 법령을 새로 개정하였으며,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합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 사상의 통일을 꾀했던 것도 이사의 주도 하에 이루어집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봉건제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이사는 시황제에게 주나라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할 것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이사는 봉건제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비록 왕자나 동족을 제후로 봉하더라도 대를 거듭할수록 혈연이 멀어져 결국은 이반(離叛)하게 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어 군에는 군수, 군위(郡尉), 군감(郡監)을 두고, 군 아래에 현을 두어 현령, 현위, 현승(縣丞)을 임명하여 민정(民政), 군사(軍事), 감찰(監察)의 3권을 분담하게 하였습니다. 치밀한 제도적 개혁입니다. 이들 지방장관들은 모두 중앙정부의 통치자인 황제에 의하여 임면되도록 함으로써 황제의 명령은 중국 전역에 신속하게 하달되었습니다.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은 중국의 정치제도상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국가체제가 1911년 신해혁명 때까지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였지요?
진의 통일과 이사를 이야기한다면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방금 언급한 분서갱유(焚書坑儒)입니다. 통일 직후 강력하게 추진되는 중앙집권적 개혁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차츰 봉건제 복원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반동적 움직임에 대하여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사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분서갱유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인 처사라고 비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에 이사가 진언한 분서(焚書)관련 내용에 의하면 첫째로 박사관(博士官)이 주관하는 서적은 제외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약(醫藥) 점복(占卜) 종수(種樹) 등 과학기술 서적도 제외하였습니다. 사관에게 명하여 진(秦)의 전적(典籍)이 아닌 것은 태우고, 민간에서 소유하고 있는 책을 거두어 태우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규모의 분서는 차라리 항우가 함양궁을 불사를 때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 관부(官府)소유의 서적이 서적의 압도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분서의 규모가 아니라 분서의 이유입니다. 이사의 건의에는 다음과 같은 분서의 이유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만 배워 당세(當世)를 비난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나가서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비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잣거리에서 시서(詩書)를 이야기하거나,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를 모두 멸족시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봉건제를 복구하려는 구사회의 저항이 완고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에게 있어서 분서갱유는 이러한 반혁명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갱유(坑儒)에 관한 것입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많습니다. 우선 땅에 묻힌 사람의 숫자가 4백60명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별로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갱유의 발단이 된 것은 불사약을 구하던 방술사(方術士)인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 도망한 사건이었는 것이었습니다.
진시황이 갱유의 영을 내린 이유는 그들이 “나를 비방하고 나의 부덕(不德)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사(御使)를 시켜 요괴한 말로서 백성들을 미혹케 하는 자들을 조사하게 하자 서로 고발하여 법령을 어긴 자가 4백60명이었는데,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알려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유학자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분서갱유라는 표현도 한(漢)나라 유학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사와 한비자의 인생을 일별하면서 느끼는 감회는 역사란 참으로 장대한 드라마라는 새삼스러운 느낌입니다. 한비자는 스스로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어 비운의 생애를 끝마칩니다. 마찬가지로 이사 역시 BC 208년 7월(2세 황제 2년) 함양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었습니다. 진나라 최대의 공신이었던 이사는 법가적 단호함과 공평무사함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간신 조고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비명에 가고 맙니다.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는 이사에 대하여 그 공적이 주공(周公)에 비견할 만함에도 불구하고 주살(誅殺)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정적 과오는 역시 윗사람의 의중을 당자보다 먼저 헤아려 영합하기에 급급하였고 스스로 공명정대한 원칙을 견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간신 조고(趙高)의 사설(邪說)에 부화(附和)하여 적장자(適長子)인 부소(扶蘇)를 폐하고 서자인 호해(湖亥)를 옹립한 것은 정도(正道)를 배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표방한 법가의 공명(公明)함과 공평(公平)함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비극이었으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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