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2000년이 제 책상에 도래한 지 벌써 세 달 전서부터입니다.
지난 1999년 9월 30일,
지급기일 2000년 1월 3일짜리 어음을 발행했고,
새로운 회사 2000년 사업계획을 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 뜨기 전에 여명이 먼저 밝아오는 것처럼,
2000년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2000년은 벌써 제 가까이 와 있었던 셈입니다.
2,
드디어 2000년. 1월. 1일. 0시입니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설레발을 치고
신세기가 열립네! 새 천년이 왔네! 뉴 밀리엄이네 뭐네,
열광하고, 환호하며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하지만
사실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면 이날 역시
수 억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찬 바람 부는 겨울날 하나가 지나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냥 어제가 오늘로 이어지는 거에 다름 없습니다.
3,
세월이라는 우주선에 탑승하신 승객 여러분!
지금 즉시 20세기라는 헌 천년호의 모든 승객들은 21세기 새 천년호로 갈아타시게 됩니다.
환승에 대비하여 가급적 행장을 가볍게 꾸미시길 권고드립니다.
휴대품을 줄이는 간단한 요령을 알려드리니 참고하십시오.
그것은 낡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4,
사람마다 생애에 걸쳐
인생의 전기가 되는 중요한 때를 몇 번씩 마주하게 마련입니다.
새 천년의 첫날이야말로 그러한 때에 아주 걸맞는 날입니다.
저는 제 마음속의 찌꺼기이자 쓰레기인
미움과 원망, 나태와 태타, 불신과 거짓, 탐욕과 낭비, 가식이나 사치 등을 깨끗이 씻어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려고 합니다.
5,
2000년 = 00년 = ㅇ년입니다.
모든 숫자에 0을 곱하면 0이 되는 것처럼,
새해엔 제 나이 52세에도 0을 곱해 0세로 만들 생각입니다.
제 건강 상태가 막 태어난 아기 때의 완벽한 상태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저와 함께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21새기를 '젊어지는 세기' 로 정했습니다.
6,
21세기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아직 살아보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 도화지와 같습니다.
저는 열정의 붓을 들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행복이라는 테마의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연필이랑, 목탄이랑, 여러 물감과 파스텔을 혼합하여 담백하게 그릴 것입니다.
깨끗하고 소박하게 정성 들여 그리겠습니다.
7,
여러분!
2000년. 1월. 1일. 0시. 0분. 0초.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1,000년만에 찾아온 특별한 시점에서 비롯되는 무망한 도취에 빠져
공연히 흥분하고 열광하는 바람에 조금 소란하였습니다만,
지구는 여느 때처럼 한 치 오차 없이 공전과 자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 기온은 영하고, 약한 북서풍이 불고 있습니다.
미세 먼지는 양호하고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한 날씨입니다.
보람차고, 즐거운 나날이 평소처럼 계속 이어지시길 빕니다.
8,
20세기에는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해서 돈을 많이 없앴는데 새 세기에도 그럴 순 없습니다.
20세기에는 허황되고 무망한 것들을 쫓아다니느라고 헛심만 썼을 뿐 아무 실속이 없었는데 새 세기에도 그럴 순 없습니다.
20세기에는 남 못할 일을 많이 해서 욕도 많이 먹었는데 새 세기엔 그러면 안 되겠지요.
20세기에는 말만 많고, 말만 앞서고, 뭐 하나 실행을 제대로 한 것이 없습니다. 새 세기에도 그러면 큰일 나겠죠.
20세기엔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긴 했습니다만 관포지교 ( 管鮑之交 )나 간담상조 ( 肝膽相照 )랄 수 있는 좋은 친구를 한 명도 못 사귀었습니다. 새 세기엔 꼭 지음 ( 知音 )을 한 사람 만드렵니다.
9,
2000년 1월 1일, 현재.
지구에서 숨 쉬고 있을 모든 사람들은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륙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똑같은
새 천 년의 동기동창입니다.
세대차가 있을 수 없으며 신분 차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차별이나 구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들 완벽하게 평등합니다
전 인류가 한뜻으로 뭉친 새천년의 정회원입니다.
우리가 일치단결하여 할 일은 오직 하나! 푸른 별 지구를 위하여!
10,
희망찬 새천년의 첫날의 여명이 밝아옵니다.
뜻깊은 새 세기 첫 날을 맞이하여,
여러분들께서
지난날 따뜻하게 베풀어주신
깊은 후의에 감사드리며,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사랑이 넘치시고,
사업이 번창하시고,
하는 일마다 성공하시고,
바라는 일이 잘 이루어지시고,
댁내에 서광이 가득한 가운데
만복과 평안과 행운과 영광이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첫댓글 곡즉전님 덕분에 26년 전 기억으로 되돌아 가봅니다.
그 때의 설레임 희망 기쁨 비록 지금은 퇴색되었다 하지만 젊음이 넘치던 그 당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보는 행운을 잠시나마 누려 봅니다. ^^*
제가 탁구시인님께 뉴 밀레니엄때 써둔 글이 있다 했더니 보여 달래서 블로그에서 찾아 올렸습니다.
케케 묵은 글이라 한편 송구합니다.
항상 젊음을 지향하시기에 지난 2000. 1. 1이 새삼스러우신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21세기 26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한 세기의 넘어오는 감회를 명문장으로 이어오니 그 의미를 더욱 이해하겠군요
뭐든지 ,아름다운 글로 그 의미를 장식하면 좋은 명품의 작품이 됨을 이해하였습니다
그 때에도 이러한 글을 써 놓으셨군요 감사합니다
명문 아니고 중언부언 유치찬란합니다.
그땐 몰랐으나 지금보니 더 합니다.
지금 같으면 좀 더 낫게 쓸수도 있었을 것 같아 다소 아쉽습니다.
후배를 애호하시는 선배님 마음을 잘 간직합니다.
오늘 오전까지 매섭던 추위가 오후들어 많이 풀렸습니다.
항상 건강에 유념하십시오.
새 천년과 함께 저는 한국 나이 마흔에 진입했었지요.
20대 30대 때에는 40살이나 먹으면 무슨 낙으로 삶을 살거나, 하고 생각했어요.
심히 잘못된 생각이었지요. ㅎㅎ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리고 40대에 접어드는 그 1월의 감회가 좀 색다르긴 했지만 바로 평범한 일상이 지속됐고요.
그 때를 돌아보며 깊이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중 2때 마을 국민학교에 홍일점 서울 출신 여선생님이 한 분 부임해오셨습니다.
바로 저의 이웃집에서 하숙을 하셨기에 오가며 자주 보게 됐습죠.
깡마르고 안면에 죽은 깨가 꽃처럼 많았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도시적 세련미가 워낙 돋보여 제가 홀딱 반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처지에 인사 말고는 단 한마디 말 조차 걸 수 없었습니다.
첫 사랑이라긴 애매하고 아니라기도 뭐합니다. ㅎㅎㅎ
하여튼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마을 한다 하는 한참 선배 형님들이 모두 그 선생님을 밤하늘 별처럼 바라보고 계시더군요.
그걸 알자마자 저는 찬물 마시고 꿈 깨고 정신을 다시 차렸습니다.
40세 달 선생님을 상상하면서 갑자기 그 분 생각이 났습니다.
세월이 하도 많이 흘러 2,000년도가 고조선시대같습니다.
그 긴 시간들을 우리가 정녕 다 살아냈단 말입니까?ㅎ
저는 정반대입니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저로선 과거란 것이 최초의 기억이 있는 세 살때부터 지금 78까지 몽땅 뭉뚱그려
한 순간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 24시간은 장강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오늘 하루가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긴 하루를 어떻게든 더 길게 늘려야 합니다.
저는 그때 수술한다고 병원이었는데
무슨 컴퓨터가 어떻게 된다는둥 난리해서
서둘러 퇴원했었는데
그날이 그날이고
그 태양이더군요
그 단새 이만큼 살았다니
아득합니다
정확한 기억이십니다.
컴퓨터는 디지털이라 온, 오프, 즉 1과 2만 인식할 뿐
0을 알 수 없기에 온통 대 혼란이 일어날 거라 예측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흠체 없이 구렁이 담 넘듯 순하게 넘어갔습니다.
저는 당시 386인간 486컴퓨터를 안고 지냈지만 암시랑도 안 했습니다.
아득하다니요. 저는 엊그제 일처럼 느껴집니다. ㅎㅎㅎ
26년 전의 메모가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았다는 게 놀랍습니다.
새천년의 설렘을 걷어내고
시간의 본질을 이렇게 또렷하게 붙잡아 두셨군요.
특히 행장을 가볍게 하라는 3번과
아직 살아보지 않은 도화지라는 6번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효하게 닿습니다.
기록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생각의 힘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귀한 메모, 잘 읽었습니다.
글을 지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메모만 몇 자 남겼습니다.
지금 보니 유치 짬뽕입니다.
그나마 탁구시인님 언급이 있었기에 26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됐습니다.
2025년에 탁구시인님과 교분을 나누게 되여 크나 큰 보람입니다.
앞으로 뵙기도 하고 게시판을 통해 말씀도 나누면서
더욱 돈독해지길 기대합니다.
그 때 저는 어떠 했나 떠올려 봤지만 통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곡즉전님은 천재셨습니다 ㅎㅎ
천재는 커녕 돌 머리였습니다.
김시습 같은 천재가 운선님 말씀 들으면 어이 상실 머리가 핑 돌았을 것입니다.
세종이 어른도 들기 힘든 무거운 비단 한 필을 여섯살 김시습에게 하사하면서
너 혼자 힘으로 가져가고 힘이 안되면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김시습이 즉시 가능하다 고하고 그 무거운 비단 한 필을 거뜬히 갖고 나갑니다.
김시습의 선택은...?
비단 끝 한 자락을 허리에 감고 밖으로 걸어나가자 둘둘말린 비단이 술술 풀리며 따라 나갔다는 것입니다.
저라면 아마도 두 말도 않고 포기해버렸을 것입니다.
김시습은 생육신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200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내왔네요..
뭔가 시대가 엄청나게
바뀔것 같았던 상황은
구렁이 담 넘듯이 지나가고
여기서 돌아보니
참말로 많이 변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곡즉전님~
자갈밭이라도 이승이
좋다하니
우리
세월 세지말고
묵묵히 또 앞만보고
살아보아요..
제가 자갈밭 이승에 오래 머물려는 욕심의 대부분이
요석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래 살아야 오래 오래 요석님을 뵐 수 있거든요.
그거말고 다른 큰 욕심은 없습니다.
26년의 세월
아이엠에프도 있었고 해마다 불경기로 죽네 사네 했지만
모두들 잘 먹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서 살고, 물, 불 펑펑쓰고, 해외 여행 즐기고,
하고싶은 거 다하고 잘만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나날이 계속이어지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2000년 1월 첫날 까마득한 세월이 지만
돌이켜보면 참 가깝기도한 얹그제일 같습니다.
4반세기 흐르는동안에도 큰탈없이 지금껏 지내온것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4반세기라 하시니
과연 오랜 세월이 지났구나 실감합니다.
26년 긴 세월 동안 뭘 하고, 뭘 얻고, 뭘 배우고 지나왔는지 허무하기만 합니다.
답댓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한 세기의 변화를 경험하기도 쉽지 않은데,
천년의 전환을 직접 맞이한다는 것은 더욱 드문 일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때도 송년회와 신년회로 의미를 찾는데,
천년을 보내고 새 천년을 맞는다는 것은 각별한 감회가 있습니다.
그런 기념비적 순간에 대한 기록을 10개나 남기셨으니
대대로 가보로 삼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록이랄 것도 없습니다.
찾아보니까 본문과 같은 메모가 있어
옮겨 적었습니다.
탁구시인님께서 말씀이 없었다면
다시 꺼내 들 이유가 없을 글이었습니다.
늘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