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이 만난 '평생 工高교사' 박석진, 기능의 興亡을 말하다
당시 최고 학생들 가르치려 밤 새우며 몰래 연습도…지금은 기초 기술 수업
가난했던 '1% 人材'들… "기술로 대한민국 잘살게 하겠다" 밤샘 연마
이젠 실력보다 '간판'만 중시… 굳이 전문대 안가도 되는데
회사선 工高출신 안쓰려… 마이스터校성공여부도 기업이 데려가느냐에 달려
■1973년
1973년 1월 31일 청와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앞에서 오원철(吳源哲) 경제2수석이 보고를 시작했다. "(…) 방위산업의 근간은 기계공업입니다. 우리 기계공업은 아직 유치원 단계입니다." 한국기계공업의 싹이 튼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0일 뒤 경북 구미시 공단1동에 현판이 내걸렸다. '금오(金烏)공업고등학교'. 교훈은 정성(精誠)·정밀(精密)·정직(正直)의 '3정'이었다. '정성들여 정밀하게 도면대로 끝까지 정직하게 작업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가칭 '삼정공고', 나중에 금오공고로 바뀌게 될 프로젝트는 1970년 11월부터 시작됐다. 포부는 원대했다. "동양 최고의 공고(工高)를 만들라!" 그 지시에 따라 6만평의 부지가 마련됐다. 그곳으로 전국의 가난한 인재들이 모였다.
금오공고 설립에는 비원(悲願)이 있었다. 한국인을 얕잡아본 일본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정(日政)때부터 "조선인은 정밀작업을 못하는 민족" "한국인이 기계공업?"이라며 비웃었다.
기자가 찾은 금오공고의 교문은 아치형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우측에 검은 돌이 놓여있었다. 한국 남자의 나쁜 기질, 처음엔 열심히 하다 적당히 끝내는 습성을 없애겠다는 '3정'의 힘찬 필체가 30년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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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를 마치자 박석진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학교에서 보낸 세월이 유수와 같습니다. 그동안 학생들과 참 행복했습니다." 밀링기계에서 튀는 불꽃에 그가 몸담았던 공고의 역사가 엿보이는 듯하다. / 이재우 기자 jw-lee@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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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박석진(朴碩珍·58)의 아버지는 6·25때 전사(戰死)했다. 어머니는 1년 뒤 외아들을 남기고 재가(再嫁)했다. 두살배기는 자동차 정비소를 하는 작은아버지 품으로 갔다. 그 뒤 정비소는 그의 놀이터가 됐다.
박석진의 몸속에는 목수(木手)였던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많은 부품을 만지고 손에 항상 기름이 묻어있었다. 중학교 때 전국 모형 항공기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1974년 대구공고 자동차과를 졸업했다.
박석진은 경북 경산에 있는 ㈜제일합섬에 들어가 섬유 기계를 다뤘다. 1976년 하루하루 기계에 기름을 먹이고 관리하던 그에게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모교인 대구공고에서 기능인 지도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을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그는 기꺼이 수락했다. 그는 낮에는 기계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밤에는 경북산업대 기계과를 다녔다. 그는 "당시에는 제일 유망한 학과가 전자과보다는 기계과였다"고 말했다.
정식 교사가 아닌 기능지도 교직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에게 1978년 4월 또 다른 제의가 왔다. 전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금오공고에 기술교사로 오라는, 꿈 같은 일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일곱, 그로부터 지금까지 31년간 그는 공고 교사직을 천직(天職)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다른 학교에 전근간 기간을 제외하고 금오공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기간만 2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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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정부의 금오공고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개교 2년 만에 학생들이 정밀가공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다. 1975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처녀 출전해 금 1, 은 2, 동 1개를 따기도 했다. 정부도, 교사도, 학생도 자신감을 얻었다.
재능있는 청소년이 3년 만에 정밀가공을 할 수 있는 우수한 기능공으로 변했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비웃던 정밀작업을 우리도 할 수 있었다. 금오공고의 성공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특성화 공업고등학교가 잇따라 생긴 것이다.
―당시 금오공고 수준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그때는 지금과 달랐어요. 공고와 상고(商高)에 최고 인재들이 몰렸습니다. 금오공고는 교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일해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최고 시설, 최고 학생, 무엇보다 배우려는 열의가 넘쳤습니다."
―요즘의 특목고 같네요.
"지금의 외고(外高) 과고(科高)가 부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왔지요.
"이 학교가 원래 한일협력기금으로 설립됐습니다. 한마디로 애국선열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생긴 학굡니다. 일본에서 설비도 가져왔고, 교수들도 기술을 배워왔어요. 그 기술을 다른 학교 선생님들께 가르쳐주기도 했고요. 연삭이나 정밀측정 같은 첨단기계는 금오공고에만 있었습니다."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지요.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전국의 군(郡)과 면(面)의 추천을 받아 들어왔어요. 감히 대한민국 1%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면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어요.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작업 방법을 찾아오기도 했죠. 그때 거의 모든 학생이 0.001㎜를 다루는 정밀가공기능사 자격증을 땄어요."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힘들었겠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저도 한쪽에서 몰래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일부러 사업체 현장도 많이 돌아다녔고요."
―규율이 엄했지요.
"규칙적으로 정해진 생활을 했어요. 일종의 사관학교인 셈이죠. 아침 6시에 기상해 밤 11시에 잠을 잤죠. 아침마다 구보를 했고 외출·외박도 쉽지 않았죠. 군사학이라는 과목이 있어 현역 군인들이 와 수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군대'네요.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는 자율학습이 있었어요. 기능대회 준비 훈련을 받는 아이들은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았죠. 당연히 선생님들도 학생들과 생활을 함께했어요."
―방과후에도요?
"학교 내에 교직원 아파트가 있어서 함께 뒹굴고, 먹고, 자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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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능인의 초석 /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은 1973년과 1975년 2차례 금오공고를 방문했다. 그는 이곳에서 산업입국의 희망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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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능인의 영예 /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수상한 금오공고생들은 떠들썩한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카퍼레이드를 하기도 했다.
금오공고를 비롯한 전국의 공고생들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旗手)'를 자임했다. 국가는 그런 학생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금오공고생들은 전원 기숙사에서 살고 학비를 면제받았으며 옷, 신발, 속옷까지 지원받았다.
최고 기능공을 활용하기 위해 졸업한 뒤 군 기술하사관(RNTC)으로 복무하게 했다. 한 달에 한 번 외박이 가능할 정도로 꽉 짜인 생활을 했지만 당시 학생들은 '배워서 내 나라를 잘 살게 만들겠다'는 의욕에 가득찼다.
―교사로서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덩달아 신이 났지요. 동고동락(同苦同樂)이란 말이 꼭 그럴 때 쓰는 겁니다. 함께 발가벗고 목욕을 다니고, 산에도 함께 올랐어요. 학생들이 학교에서는 저를 선생님으로, 학교 밖에서는 형님으로 모셨어요. 집도 자식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과 자식이 열외라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기술을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만 생각했습니다.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발바닥에 땀이 차도록 현장을 돌아다녔어요. 아이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기 위해 밤을 새우기도 일쑤였지요."
―박 선생은 어떤 종목을 가르쳤나요?
"저는 밀링을 지도했어요. 다각형 부품을 생산하는 기계였죠. 90년도부터는 정밀기기를 가르쳤죠. 주로 정교사보다는 기능올림픽 출전하는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기능올림픽은 몇학년 때부터 준비합니까.
"보통 기능올림픽에 참가하는 학생은 3학년이지만 준비는 입학할 때부터 하지요. 3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기술을 연마하는 겁니다."
―힘들다고 그만둔 학생도 있나요.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우는 학생은 있었어요. 그럴 때면 마음이 아팠죠. 오랫동안 떨어지면 어머니 품이 그리울 나이잖아요. 그래도 참 지혜로운 아이들이었어요. 학교가 힘들다고 자퇴한 아이는 거의 없었죠."
―그렇게 훈련하니 기능대회에서의 결과도 좋았겠네요.
"지방 기능대회를 포함해 제가 가르친 학생 60여명이 수상했죠. 전국대회에서는 10개 정도의 메달을 땄습니다."
―학교 전체로 보면 어땠습니까.
"엄청납니다. 1973년 개교 후 1979년까지 6년 만에 전국기능대회에서 65개의 메달을 땄고 국제 기능올림픽에서는 13개의 메달을 땄으니까요."
―정말 대단했군요.
"70년대에는 금오공고가 기능올림픽을 휩쓸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77년부터 국제기능올림픽에 5회 연속 참가해 메달을 따냈습니다. 1978년에는 5·16 민족상도 받았고 '기능경기대회 및 국제 기능올림픽 최우수교'로 선정됐었죠."
―금오공고뿐 아니라 당시 공고 전체의 대우도 괜찮았지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으로 인해 수출이 증가하고 많은 기업이 성장하던 때였어요. 대기업들은 우수한 기능인들을 경쟁적으로 데려갔지요. 기업들은 '우리 회사가 뛰어난 기능인들을 데리고 간다'며 광고도 많이 했지요."
―그 후에도 금오공고는 승승장구했습니까?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학교 지원이 줄었습니다. 설립자가 죽고 직접적인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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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興亡)1979년 10월 26일 이후 금오공고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왜 금오공고만 예산을 많이 받아가느냐"는 볼멘소리가 들렸다.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받던 예산은 지자체로 넘어갔다.
교사들의 특별 수당도 없어졌다. 차차 학생들의 실습비도 줄었다. 당시에는 경제가 발전하면서 단순 기능인보다는 기술·연구 인력이 필요해졌다. 전두환 정부는 1981년 '공업교육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 방안이 뭡니까.
"공업 교육이 일반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과 통합됐습니다. 기능인 육성 중심이었던 공고 교육도 변화의 바람을 맞은 거죠."
―어떤 변화인가요.
"제일 중요한 게 실습(實習)이라는 단어가 빠진 거지요. 실습을 하지 않으면 기능을 배우는 데 지장이 옵니다. 대신 '합리적 수행' '생산성 향상'이라는 문구가 포함됐습니다."
―공고의 위기가 그때부터 시작됩니까?
"금오공고의 경우 지원이 끊기고 '다른 학교와 똑같아졌다'고 느낀 건 사실이죠.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군(郡)과 면(面) 추천 입학도 없어졌습니다."
―당시 학교 분위기는.
"예전보다 학생들의 수준도 떨어졌죠. 그래도 금오공고는 기술하사관으로 취직이 보장됐기 때문에 꾸준히 인기가 있긴 했습니다."
―다른 공고들은 어땠나요?
"경제가 발전하면서 학생들은 전문계보다는 인문계로 진학해 대학을 가려고 했습니다. 자연히 공고 지원자 수도 줄었죠. 70년대에는 서울공고나 수도공고를 나오면 바로 대기업에 취직이 가능했는데, 80년대부터는 공고를 나와도 전문대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많아졌죠."
―학생과 학부모들의 의식이 변하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사회가 고학력화, 인문화, 첨단산업화되자 공고는 인문계를 못 가는 학생들만 가는 것으로 여겨졌어요. 당연히 산업현장에 비상이 걸렸지요."
―1989년 기능장려법이 생긴 데는 이유가 있었군요.
"공고를 더 많이 세워 직업교육을 활성화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 법이 효과를 거뒀나요.
"기능인의 대우가 나아지자 전국에 국가 지원을 받은 학교가 많이 세워졌어요. 모두 첨단장비를 가진 좋은 학교들이었죠. 그러나 곧 학교들은 학생 수 부족이라는 문제를 낳았어요."
―그렇게 지원하는데 왜?
"저출산 현상에 따라 아이들의 수가 줄어든 것이죠."
―금오공고가 1995년 사립에서 공립으로 전환됐지요.
"설립자인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재단은 있었지만 책임감을 갖고 학교를 운영하는 분들이 없었어요."
―그래서요.
"학교를 운영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어요. 그 와중에 학교를 팔아 산 밑으로 이전하려는 재단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교사들은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문교부에 국립 전환을 요청하기도 하고 국방부, 청와대, 국가안전기획부, 경북 교육청 등 수없이 많은 곳에 국립화 청원서를 넣었습니다. 피켓을 들고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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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능인의 미래 현재 금오공고 정문 모습. 멀리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글이 쓰여 있는 기능탑이 보인다. / 금오공고 제공
■재도약
박석진은 1999년 경북 김천의 한 공고로 자리를 옮겼다. 순환근무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2005년 다시 금오공고로 돌아왔다. 1970년대 열의에 차 기술을 습득하던 아이들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리를 옮긴 학교는 어땠나요?
"그 학교는 내 자리가 아니었어요. 기술 연마보다는 전문대 진학에 초점을 맞춘 학교였죠. 학생들도 열심히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요. 결국 기술을 가르치고 싶어서 다시 금오공고로 왔죠."
―그렇지만 이미 공고의 '몰락'은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YS 정권 때 기능 인력의 축이 전문대로 옮겨갔어요. 공고 지원 예산이 전문대로 많이 빠져나갔고, 전문대의 수도 엄청나게 늘었죠."
―공고도 결국 전문대 진학의 발판이 된 건가요?
"옛날에는 100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이제는 기초만 가르치고 전문 기술은 대학에서 배우는 식이 된 것이죠. 공고만 졸업한 것보다는 전문대를 나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간판도 그렇고 사회에서는 그것을 더 원하니까요."
―모두가 전문대학에 진학하는 게 바람직합니까.
"낭비죠. 모두가 전문대를 진학해 오히려 기능인력이 모자라는 상황이 벌어졌으니까요. 전문대에 들어가 업그레이드된 기술을 배우고 기능인이 아닌 기술인이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는 거군요.
"구태여 전문대학에 갈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회사에서는 공고 나온 사람들을 잘 쓰려 하지 않아요. 공고에서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맞춤형 교육을 해 데려가면 시간이나 비용이 절약되는데도요."
―입사 때만 차별받는 건 아니겠지요.
"공고만 나온 사람과 전문대를 나온 사람이 동일한 일을 해도 보수 차이가 있어요. 승진 기회도 다르고요."
―지금 공고에서 전문대 진학 비율이 얼마나 됩니까.
"4분의 3 정도죠. 대학이 학생 개인이 요구하는 간판이나 자격 등 다양한 것들을 충족시켜준다는 점 때문입니다."
―결국 '간판'만 중시하는 풍토가 공고 교육을 왜곡시킨 거네요.
"(표정이 굳어지며)…."
―세태(世態)의 변화를 어떻게 느낍니까.
"기능인들이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 산업현장에서 보이지 않게 많은 이바지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요. 실력보다 간판만 중시하고, 그러다 보니 공고 교육도 바뀌게 된 겁니다."
이명박 정부는 "마이스터고를 졸업해 4년간 직장에서 일하면 대학 4년을 다닌 것보다 사회에서 더 나은 대우를 받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마이스터교 제도를 도입했다. 독일식 마이스터교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올 10월 신입생을 선발해 내년부터 21곳의 마이스터교가 개교한다. 박석진은 "마이스터교 제도가 잘 만들어졌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마이스터교가 성공할 것 같나요?
"이제 시작이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마이스터교에서 잘 훈련을 시켜도 결국엔 기업에서 데리고 가야 하는데 그게…."
―정부에서는 마이스터교를 나오면 군대와 보수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해 준다고 하잖아요?
"기업들이 이것을 요구할지 미지수인 거죠."
―아직 우리 사회가 마이스터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는 건가요.
"예전에도 특성화 학교, 특수목적 고등학교, 맞춤형 고등학교 같은 것이 많이 있었어요. 기업과 연계해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고 바로 취업을 한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결국 기업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죠."
―공고에서 마이스터 교육을 할 준비는 됐습니까?
"금오공고는 모바일 분야에서 마이스터교로 선정됐어요. 수십억원의 예산을 받아서 전문대 수준의 교육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마이스터는 아니지만 '영(young) 마이스터'로 키울 계획이죠."
―IT, 바이오기술 등 첨단 기술이 아니면 인정받기 어렵지 않나요?
"무슨 소리! 기계를 다루는 것은 가장 기초가 되는 기술이에요. 휴대폰 껍데기를 만들 수 없다면 안에 첨단 부품이 들어갈 수 없잖아요. 공고에서 가르치는 기계·전자공업은 산업의 주춧돌입니다. 이런 기능인들이 없다면 첨단 기술도 없겠죠."
첫댓글 저도 가고싶어했었던 학교 였었습니다...........우리의 미래에 『박정희』이름 석자 빼면 어떤 희망이 있을까....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공부를 꽤 잘하던 제 친구가 금오공고에 들어갔습니다. 당시만해도 금오공고 합격은 시골학교의 자랑일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군대 제대후 만난 친구의 모습은 그렇질 못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이후라서인지 의기소침해하던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금오공고 졸업할 정도면 상당히 우수한 머리를 지닌 학생들이었는데 이런 고급인력이 공돌이로 전락했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아마 그 친구가 일반 고등학교를 선택하여 정상적인 공부를 했다면 연, 고대 정도는 무난히 졸업하여 평범한 사회 생활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공고졸업후 하사관으로 의무복무하고 사회에 나와서 그 당시 다단계(피라미드) 회사에 다니며 그나마 군에서 모은 돈을 까먹는 것을 보며 가슴 아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