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당산 위치도
대부분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위에서 트레킹을 한다.
고무당산(古武當山)은 한단 무안시(邯郸 武安市) 태항산맥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태항산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하며 중국의 신화(神話)인 북유기(眞武大帝)의 전설 발원지이고 중국에서 유명한 도교 성지라고 한다.
명나라 말 소림사에서 나온 장삼풍(張三豊) 무당파를 탄생시키고 도교(道敎) 진무파의 시조인 진무대제가 최초로 수행한 곳이라고 전해진다고 한다.
고무당산에 태극 종사인 장삼풍(張三豊)의 동상이 있어 태극권의 발상지임을 알리고는 있으나 장삼풍이 호북성에 위치한 무당산(武當山)에서 수행하였기 때문에 무당산이 도교(道敎)수행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고무당산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무당파와 관련된 고건축물과 무당파의 유산이 호북성에 있는 무당산에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참고로 태극권은 5세기 북위의 소림사에서 보리달마가 창시한 불교무술에 비교되는 도교종파 중 최대파벌인 장삼풍의 무당파에서 유래된 무술로서 현재 소림사의 소림권과 양대 권법이라고 한다.
고무당산은 오랜 세월 땅이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면서 생성된 태항산의 다른 산봉우리들과 비슷하지만 눈으로 보기만 하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험준한 봉우리를 따라 정상까지 트레킹이 가능한 산이라고 한다.
아침에 숙소에서 출발하여 고무당산으로 가는 길에 한단(邯鄲)시를 거쳐서 가게 되는데 한단 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조(趙)나라의 도읍이었다고 진시황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도시와 관련된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유명한 고사성어(故事成語)도 있으며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된 곳이기도 하다.
한단에서 한참을 더 가면 경량호라는 댐이 나오는데 이 댐은 한단시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댐이라고 하며 관광지로도 개발이 되어 있다.
경량호를 지나서 30여분 정도를 더 가자 고무당산이 뿌연 연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마천선교와 채홍교가 흐릿하게 보인다.
겨울을 제외하고는 아침 일찍이는 연무가 끼이지 않으나 낮이 되면서 기온이 올라가면 연무가 끼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경량호 댐... 고무당산을 가기 위해서는 이 위로 버스가 지나간다.
지금 건기라서 호수에 물이 많이 빠져 있다.
호수에 물이 차면 이렇게 변한다고... 인터넷에서
물이 차 있을 때의 모습..인터넷에서
이 옆으로 버스가 지나간다.
희미하게 고무당산이 보인다.
마천선교고 보이고... 선명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고무당산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케이블카를 타고 상부승강장까지 올라가는데 절벽같이 생긴 곳에 계단들이 있어서 걸어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온전한 트레킹을 하려면 밑에서부터 올라가야 하겠지만 태항산 일정이 또 이틀이나 남아 있기도 하고 너무 힘이 드는 코스이기 때문에 나이드신분들 체력안배 차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게 되었다.
고무당산 입구
고무당산 표지석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절벽에 나 있는 돌계단
케이블카에서 내리자 도화봉쪽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반용도 쪽으로 출발하기 시작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산행지도의 아랫길인 반용도를 따라 고무당산의 제일 높은 곳인 금정을 거쳐서 마천선교를 지나고 채홍교를 건너서 벽하사쪽으로 해서 다시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한 바퀴를 도는데 세 시간 정도가 걸린다.
반용도에서 보이는 채홍교
마천선교도 보이고
모퉁이를 돌면 금정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급정과 마천선교 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
보이는 곳이 긴산종이 있는 곳이다.
금정에는 진무대제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소원을 빌고 가지만 퇴락하여 전설속의 진무대제의 사당이라고 믿을 수가 없다.
금정에서 마천선교쪽으로 산행을 진행하는데 천선교를 통과하려면 돈을 내야한다.
좌우에 시야가 트여서 전망이 좋으련만 연무가 가득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채홍교를 건너서 길을 잘못 들어서 진산종 쪽을 들르지 못하고 을 들르지 못하고 도화봉쪽으로 올라가서 옥황상제의 셋째딸을 모신 사당(祠堂)인 벽하사(碧霞祀)에서 한 숨을 돌리고 승강장 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급정 쪽으로 보이는 허름한 집들에 사람이 있다.
진무대제 라고 쓴 것으로 보아 사당 같은데 너무 초라하다.고 낡았다.
일행들이 마천선교를 건너고 있다.
바천선교쪽에서 바라본 금정
봉우리마다 도교와 관련된 건물들이 있다.
일행들이 채홍교를 건너고 있고...
봉우리를 오르내리려면 이런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연무만 없다면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사진들의 경치를 볼 수 있겠지만 연무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아쉽다.
이런 곳에 올 때는 연무가 짙어지지 않는 오전에 일찍 올라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고무당산의 사진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시길....)
주변경관을 보지 못하는 것과 무당산의 태극권이 태동한 곳이라고 하여 무당파의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했지만 너무 초라한 도교의 진산대제의 사당과 벽하사만 보고 가는 것이 아쉽다.
도화봉과 벽하사...도화봉은 야생복숭아 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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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황상제의 세쌔딸을 모시는 사당인 벽하사...옥황상제의 세째딸을 모시는 사당이 제주도에도 있는데 이름이 다르더만...
도화봉에서 본 케이블카 승강장과 용두봉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을 서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데 빗방울이 날리며 날이 어두어지는 느낌이다.
케이블카에서 바깥을 보니 절벽에 난 계단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언제 내려가려고....
계단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버스를 타고 임주로 향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우측을 바라보니 커다란 장삼풍의 동상이 보이고 건축물들을 짓느라고 분주하다.
산행을 끝내고 버스를 타고 임주로 가서 숙박을 하였는데 내일의 일정은 태항산 대협곡과 도화곡을 들러서 만선산까지 가는 일정이다.
한단지보(邯鄲之步) 이야기
공손룡(公孫龍)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사상가(思想家)로,자신의 학문(學問)과 변론이 당대 최고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장자(莊子)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그는 자신의 변론과 지혜를 장자와 견주어보려고 위(魏)나라의 공자 위모(魏牟)에게 장자의 도(道)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장자의 선배인 위모는 공손룡의 의중을 알고는 안석에 기댄 채 한숨을 쉬고 하늘을 우러러 웃으면서,"우물 안의 개구리가 밖의 세상(世上)을 볼 수 없다."라고 말하고,"가느다란 대롱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송곳을 땅에 꽂아 그 깊이를 재는 꼴."이라며 비웃었다.그리고는 이어서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자네는 저 수릉(壽陵)의 젊은이가 조(趙)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그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엎드려 기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걸세. 지금 자네도 장자에 이끌려 여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는 그것을 배우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네 본래의 지혜를 잊어버리고 자네의 본분마저 잃게 될 걸세."이 말을 듣고 공손룡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도망쳤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말이 비롯되었으며,이는 자기 본분을 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는 지각없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웃어준 이야기로"한단학보(邯鄲學步)"와 같은 말이며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고사성어라고 한다.
한단지보의 고사성어 이야기다.
전국시대의 일이라고 한다.
한단지방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멋있고 품격이 있었다.
연(燕)나라에 살던 한 청년이 이 소문을 듣고 그 걸음걸이를 배우고자 한단으로 갔다.
청년이 한단에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소문대로 매우 아름다웠다.
청년은 매일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관찰하고 흉내를 내었다.
그러나 한단 사람들처럼 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걷는 방법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몇 달 동안 연습을 했지만 한단 사람들처럼 걷지를 못하고
자신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렸다.
모든 것을 포기한 청년은 고향 연나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러나 걸음걸이를 잊어버린 청년은 엉금엉금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자신의 本分을 잊고 억지로 남의 흉내를 내면 실패한다는 의미다.
한단지몽(邯鄲之夢)
당나라 현종 때, 도사 여옹(呂翁)은 한단 지방의 주막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낡은 옷차림을 한 노생(盧生)이라는 청년도 쉬고 있었다. 노생은 자신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사나이로 태어나서 가난에 찌들리는 이 꼴이 무엇입니까?」여옹이 말했다.「즐겁게 얘기하다가, 갑자기 가난을 탓하다니 어찌된 일인가?」「저는 그저 목숨만 붙어있을 따름이라 조금도 즐겁지 않습니다.」「그런 어떻게 해야 즐겁겠는가?」노생은 출세를 해서 부귀영화를 누려야 사는 보람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생은 점점 잠이 오는 걸 느꼈다. 여옹이 자루 속에서 베개를 꺼내 노생에게 주면서 말했다.「이걸 베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테니.」그 베개를 베고 잠이 든 노생은 꿈을 꾸었다.어느 부호의 집에 도착한 그는 그 집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 후 출세의 운도 틔어, 정사를 잘 다스리고 훌륭한 무공도 세워서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청렴하고 덕망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모함을 받아 일시 좌천되었다가 3년 뒤 다시 조정으로 올라가 천자를 보필하는 명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또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을 받아 잡혀가게 되었다. 노생은 울면서 아내에게 말했다.「내 집은 본래 산동 땅이요. 좋은 밭 몇 마지기가 있어 추위와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소. 어째서 벼슬을 하려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료. 차라리 다시 낡은 옷을 입고 푸른 망아지를 타고 한단의 길을 가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구려.」이렇게 말하면서 칼을 뽑아 자살하려고 했지만, 아내가 말려 죽지 못했다. 같이 잡힌 사람은 모두 사형 당했지만, 그는 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몇 년 뒤 무죄가 판명되어 다시 재상이 되었다. 그 후 50년 동안, 노생은 다섯 명의 아들과 열 명의 손자, 그리고 미녀들 틈에서 극진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았다. 마지막 임종 시에는 황제가 보낸 명의의 보살핌 속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노생이 기지개를 켜면서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옹이 있었고, 잠들기 전 밥을 짓고 있던 집주인은 여전히 밥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게 전과 다름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이 모든 게 꿈이었든가?」여옹이 웃으며 말했다.「인생 만사가 다 그런 거라네.」노생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감사를 드리면서 말했다.「영화와 치욕, 부귀와 빈곤, 삶과 죽음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이는 선생께서 제 욕망을 막아주신 것입니다. 다시 가르침을 받지 않더라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노생은 여옹에게 두 번 절하고 떠나갔다.이 꿈이 한단 지방에서 꾸었기 때문에 <한단지몽>이라고 하고, 밥을 한 번 짓는 동안 꾸었다고 해서 <황량일취몽(黃粱一炊夢)>이라고도 한다
첫댓글 잘 보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