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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38. 진시황 秦始皇편 ?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22 15.02.16 10: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진우 풀이 사마천 사기열전 38. 진시황 秦始皇편 ?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

진시황 秦始皇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장양왕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볼모로 조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의 첩에게 반하였다. 장양왕은 그 첩을 아내로 맞아 진시황을 낳았다.

진시황은 진나라 소왕 48년에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에서 태어났는데 이름 조정(趙政)이라 하였다. 진시황은 13세 되던 해 장양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당시 여불위는 재상이었다. 이사(李斯)가 여불위의 빈객이 되었으며 몽오, 왕의, 표공 등이 장군으로 있었다. 진시황은 나이가 어린데다 막 즉위하여 대신들이 국사를 처리하였다.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해, 진시황은 만 20세가 되어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다. 노애가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위조하여 도성의 군사와 호위 군사, 관아의 기병, 융적의 우두머리, 가신들을 동원하여 기년궁을 공격하였다.

진시황은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함양에서 싸움이 벌어져 수백 명의 머리가 베어졌다. 노애가 달아나자 노애를 생포하는 자에게는 100만 냥, 죽인 자에게는 50만 냥의 현상금이 걸렸다. 결국 노애와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잡혔다. 가담자 20여 명의 목을 잘라 높은 곳에 매달고 수레로 사지를 찢어 본보기로 보였으며 그 일족을 멸하였다. 죄가 가벼운 자에게는 종묘에 쓸 땔나무를 구하는 귀신(鬼薪) 형벌을 내렸다. 이 일에 연루되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촉(蜀)으로 쫓겨간 것이 4,000여 가구에 이르렀다. 그들을 모두 방릉에 살게 하였다.

다음 해에는 상국 여불위가 노애의 반란에 연루된 것이 밝혀져 면직되었다.

진시황이 유세객들을 추방하는 축객령(逐客令)을 제정하려고 하자, 이사가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간언하자 취소하였다. 한(韓)나라를 먼저 취한 후 다른 제후국들을 위협하자는 이사의 계책을 받아들여 이사에게 한나라를 공략하게 하였다.

대량(大梁) 사람 요(?)가 진시황을 찾아와 아뢰었다.

“진나라의 강대함 때문에 제후들이 연합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불시에 공격해 오지 않을까 걱정이옵니다. 폐하께서 황금을 풀어 제후국의 대신들을 포섭함으로써 그들의 정책을 교란시킨다면 제후들을 모조리 소탕시킬 수 있사옵니다.”

진시황은 그 계책에 따랐다. 요를 우대하여 자신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의복을 입게 하였다. 그러자 요가 도망치려 하였다.

“진나라 왕은 높은 콧등, 긴 눈, 맹금 같은 가슴, 승냥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 덕이 부족하고 맹수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 어려울 때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머리를 숙이지만 일단 뜻을 이루고 나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잡아먹을 인물이다. 지금은 평민인 나에게 몸을 낮추고 있지만 나중에 뜻을 이루면 천하의 백성이 모두 그의 노예가 될 것이다.”

진시황은 그 말을 전해 들었으나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요에게 머물기를 권하며 군사(軍事)를 관장하는 국위(國尉)에 임명하였다. 당시에는 이사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12년, 여불위가 죽자 몰래 매장하였다.

17년, 내사 등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 왕 안(安)을 사로잡았으며 한나라 땅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하였다.

18년에는 대군을 일으켜 조(趙)나라를 공격하였다.

19년에 왕전, 강외가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고 조나라 왕 천(遷)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중산(中山)에 주둔하였다. 진시황은 한단으로 가서 자신이 조나라에서 태어났을 무렵 외가에 원한을 진 사람들을 모두 생매장시켰다. 진시황은 태원, 상군을 거쳐 돌아왔다. 얼마 후 진시황의 어머니인 모태후가 서거했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수백 명을 이끌고 대(代)에 가서 스스로 대나라 왕에 즉위하더니 연나라와 손잡고 군대를 상곡(上谷)에 주둔시켰다.

다음 해,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시켜서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였다. 진시황은 형가의 사지를 찢어 본보기로 삼고 왕전, 신승(辛勝)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연나라와 대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 군대에 대항했으나 연나라 군대는 역수(易水) 서쪽에서 격파 당했다. 진시황이 군사를 증원하여 왕전에게 보냈다. 왕전은 연나라 태자 단이 이끌던 군대를 격파하고 도읍인 계성(?城)을 점령하였으며 태자 단의 목을 베었다. 연나라 왕은 요동으로 달아났다. 왕전은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22년, 왕분(王賁)이 하구(河溝)의 물을 끌어다가 위나라 도읍 대량(大梁)을 물에 잠기게 하여 함락시켰다. 결국 위나라 왕이 항복하였다.

23년 진시황은 왕전을 강제로 다시 불러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전은 진(陳)에서 평여(平輿)까지의 땅을 평정하고 초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초나라 장군 항연은 창평군을 옹립하여 초나라 왕으로 세우고, 회하 남쪽에서 반기를 들었다. 왕전과 몽무(蒙武)가 항연의 군대를 무찔렀다. 창평군이 죽자 항연도 자살하였다.

25년 진시황은 왕분에게 대군을 주어 요동을 공격하게 하였다. 왕분은 연나라 왕 희(喜)를 사로잡았다. 회군하는 길에 대나라를 공격하여 대나라 왕 가(嘉)를 사로잡았다. 왕전은 초나라의 강남 지역을 평정하고 월나라의 왕을 항복시킨 후 회계군(會稽郡)을 설치하였다.

26년 제나라 왕 전건(田建)이 상국 후승(後勝)의 계책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며 진나라와의 왕래를 끊었다. 진시황은 왕분으로 하여금 연나라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분은 제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천하가 통일되었다.

천하를 통일하게 되자 진시황은 비로소 황제라 칭하게 되었다. 진시황은 시호에 대해서도 분부를 내렸다.

“왕이 죽은 후에 생전의 사적에 따라 시호를 추서한 것은 마치 아들이 아비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시호를 추서하는 법을 폐지하노라. 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으니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후세에는 이세(二世), 삼세(三世)와 같이 순서를 붙여 만세에 이르기까지 길이 전해지게 하라.“

진시황은 화덕(火德)을 가지고 있던 주나라를 진나라가 대신하였으니 수덕(水德)에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일년의 시작을 모두 10월 초하루에 거행하였다. 의복, 깃발, 부절의 색을 모두 검정색으로 하였다. 수는 6을 기본으로 삼아 부절과 법관을 여섯 치, 가마의 너비는 여섯 자, 여섯 자를 한 보, 수레 한 대를 말 여섯 필이 끌게 하였다. 황하의 이름까지 덕수(德水)로 바꿨다.

승상 왕관 등이 진시황에게 황자들을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 같이 먼 제후국의 왕으로 삼기를 청했다. 진시황이 이 의견을 대신들끼리 상의하도록 하자 대부분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이사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주나라의 문왕, 무왕은 많은 자제들과 일족을 왕으로 봉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후손끼리 서로 멀어져 나중에는 원수처럼 서로 싸웠사옵니다. 결국엔 주나라 천자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사옵니다. 지금 천하는 폐하의 힘으로 통일되어 군과 현으로 나뉘어 있사옵니다. 제후를 두지 않고 황자나 공신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시는 것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하고 천하를 편안케 하는 방법일 것이옵니다.”

진시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멈추지 않아 천하가 고통을 받은 까닭은 제후국의 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천하를 평정하였는데 또다시 제후국을 세운다면 전쟁을 조장하는 꼴이 될 것이다. 백성들의 안녕과 천하의 안정을 위해 제후국을 세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천하를 36개 군(郡)으로 나누어 군마다 행정장관인 수(守), 군사장관인 위(尉), 감찰장관인 감(監)을 두었다. 천하의 병기를 함양에 모은 뒤, 그것을 녹여 종거(鍾?)와 12개의 동인상(銅人像)을 만들어 궁전 안에 놓아두었다. 또한 법률과 도량형, 수레의 폭,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였다.

진시황은 천하를 순수하면서 천자의 위엄을 높였다.

29년, 진시황은 동쪽으로 순수하던 길에 양무현(陽武縣)의 박랑사(博狼沙)에 이르러 자객의 습격을 받았다. 자객을 놓치자 10일간 전국을 수색하도록 명령하였다.

32년, 진시황은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에게 전설 속의 선인(仙人)인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아오라 하였다. 노생은 바다에 들어갔다가 왔다면서 예언이 적힌 글을 상주하였다.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

이에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군사 30만명을 주어 북쪽의 호인(胡人)을 공격하게 하여 하남 지역을 점령하였다.

34년, 진시황은 부패한 관리들을 유배시켜 만리장성을 쌓거나 남월 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이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약, 점복, 농업과 임업에 관계된 서적을 빼고 모든 서적을 모아 불태우게 하였다.

35년, 구원에서 운양까지 산을 깍고 골짜기를 메워 직선으로 길을 닦게 하였다. 죄인 70여 만명을 동원하여 아방궁을 짓거나 여산에서 노역을 하게 하였다. 관중에 궁전 300채를 지었으며 함곡관 동쪽에 400여 채의 궁전을 지었다.

노생이 진시황에게 권하였다.

“신 등이 영지, 선약, 신선을 찾아다녔으나 몇 년 동안이나 헛수고를 했사옵니다. 아마도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사옵니다. 폐하께서 머무시는 장소를 신하들이 알게 되면 신선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받을 것이옵니다. 지금 폐하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나 아직 안정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폐하께서 거처하는 궁궐을 신하들이 알지 못하게 하신다면 불사의 약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진시황은 행차할 경우, 그 거처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

진시황이 양산궁에 행차하였을 때의 일이다. 산 위에서 승상의 거마(車馬)가 많은 것을 보고 언짢아하였다. 그날 함께 있던 수행원 하나가 그 말을 승상에게 전하니 승상이 거마의 숫자를 줄였다. 그러자 진시황이 노하여 수행원을 하나씩 심문하였으나 죄를 실토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양산궁 행차 때 수행했던 자들을 모두 잡아죽이라 하였다. 이후로 진시황이 행차한 곳을 아는 자가 없었다.

후생(侯生)은 노생과 모의를 하였다.

“진시황은 고집이 세고 사나워서 남의 말을 듣지 않네. 천하를 제맘대로 하고 있고. 옥리들만 중요하고 박사들은 푸대접이네. 승상과 대신들도 황제의 꼭두각시일세. 황제가 엄한 형벌로 위엄을 세우려고만 하니 관료들은 엎드려 눈치만 보고 있네. 황제는 날로 교만해지는데 신하들은 황제를 속이거나 비위를 맞추기만 하네. 이 나라의 법에는 두 가지 이상 방술(方術)을 겸할 수 없는데다가 만약 그 방술이 영험을 나타내지 못하면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네. 그러니 누가 감히 입을 열겠나? 게다가 황제는 모든 정사를 혼자 결정하다 보니 매일 읽어야 할 문서의 양이 저울로 달아야 할 지경 아닌가? 그걸 다 처리하지 않으면 황제는 쉬지도 않으니 그 권세욕은 끝을 알 수 없네. 이런 황제를 위해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해 주면 천하가 어찌 되겠나?”

그리고 바로 도망쳤다. 진시황은 후생과 노생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노하였다.

“짐이 천하의 쓸모 없는 책들을 거두어 불사르게 하고 선비들과 방술사들을 모아 태평성세를 만들고자 하였다. 방사들에게 천하를 뒤져 선약을 찾아오게 하였으나 한중은 한번 가더니 소식이 없고, 서불은 막대한 경비만 낭비하고 말았다. 그런 자들이 이제는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며 서로 고발하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짐이 노생 등에게 많은 것을 하사하였으나 도리어 짐을 비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상한 말로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다고 들었다.”

진시황은 어사를 시켜 방사들에 대해 조사하게 하자, 방사들은 서로를 고발하였다. 진시황은 그들 중 위법을 저지른 자 460명을 사형에 처한다 판결하고 함양에서 생매장하였다. 그러자 진시황의 장남인 부소가 간언하였다.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사오나 변경의 백성들은 귀속되지 않았으며 유생들은 <시> <서>를 암송하며 공자를 본받고 있사온데 폐하께서는 엄한 죄로 그들을 옭죄고 계시니 천하가 불안해지지 않을까 소자는 두렵사옵니다.”

진시황은 노하여 부소를 북쪽 변경인 상군(上郡)으로 보내 버렸다.

37년 10월, 진시황이 순수에 나서자 좌승상 이사가 수행하고 우승상 풍거질이 도성을 지켰다. 막내아들 호해가 따라가기를 간청하자 허락하였다. 진시황은 회계산까지 갔다가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평원에서 병이 났다. 진시황은 죽는다는 말을 싫어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말을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병세가 점점 심해지자 진시황은 부소에게 편지를 썼다.

“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와서 짐을 안장하라.”

편지를 봉인한 뒤 중거부령 조고에게 주었으나 조고는 부소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7월, 진시황은 사구에서 서거하였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서거했기 때문에 천하에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비밀로 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

진시황의 관을 온량거에 싣고 진시황이 총애하던 환관을 태웠다. 때가 되면 음식을 올렸을 뿐 아니라 신하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국사를 상주하면 환관이 대신 결제하게 하였다. 호해와 조고 등 몇 명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호해는 서법과 법령 등을 가르친 적이 있는 조고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고는 호해, 이사와 공모하여 부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뜯은 후 승상 이사가 진시황의 유언을 받은 것처럼 위조하였다. 호해를 태자로 삼았으며 부소와 몽염에게 죽을 것을 명하였다.

때마침 여름철이라 진시황의 온량거에서 시신이 썩는 악취가 진동하였다. 소금에 절여서 말린 물고기를 수레에 싣고 온량거를 따르게 하여 시신의 악취와 생선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였다.

함양에 도착한 후에 발상을 하였다. 호해가 제위를 계승하여 이세황제(二世皇帝)가 되었다.

9월, 여산에 진시황을 안장하였다. 진시황은 즉위해서 여산에 치산 공사를 벌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전국에서 이송되어 온 죄인 70만여 명을 시켜서 능을 만들게 하였다.

이세황제의 명에 따라 자식이 없는 후궁들을 모조리 순장시켰다. 그 일에 참여한 자들 역시 모두 능 속에 매장했다. 그런 후에 능 바깥에 풀과 나무를 심어 놓으니 능이 마치 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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