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려타곤(懶驢 坤) 29-5
소구는 그런 팽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죽으시오. 개봉에 있는 당신들의 집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소. 당신들의 가족들도 당신들이 백초당을 배반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면, 집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오. 당신들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당신들이 백초당을 배반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결과 백초당은 폐허로 변했고 내 누이는 죽었소. 그러니 더 이상 내 살심을 자극하지 말고 이제 그만 죽으시오."
네 사람은 허무한 얼굴로 온 몸을 적시는 비를 퍼붓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친구 하나 잘못 둔 탓에 이렇게 죽는구나.'
'남궁진호가 오대세가를 전부 망하게 하는 구나.'
'도망친 자식들은 무사할까?'
'허무하군.'
네 노인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소구의 머리 속으로도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약속이나 한 듯이 네 노인은 일제히 자신들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천령개를 내리쳤다. 그들은 이미 남궁진호와 진하정이 어떻게 죽었는지 본 상태였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고 그들에게 남겨진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네 명의 노인이 동시에 풀썩 하는 소리를 내며 땅으로 쓰러지고, 소구는 다시 살기를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멀리 동정호의 한 가운데 있는 군산이라 불리는 섬을 바라보았다. 아직 죽여야 할 자가 둘이 더 남아 있었고 그들은 저곳에 숨어 있었다.
소구는 납작하게 변해서 죽어 있는 진하정의 시신 옆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이 있던 자리에서 하나의 금빛 반지를 집어들고 일어선 소구는 암울한 얼굴로 비바람으로 파도 치고 있는 동정호를 바라보았다. 그 한 가운데 보이는 섬을 바라보는 순간 그곳에 모여 있는 자들의 악의와 그들이 느끼고 있는 공포가 소구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백초당을 망하게 하고 청방을 없애고 그들이 무림을 지배하는 일원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무리들의 생각이 머리 속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소구 속에 자고 있던 또 다른 소구가 깨어나 속삭였다.
'죽여, 저들 전부가 모두 덤벼들어도 널 이길 수는 없어. 저들을 살려두면 귀찮은 일이 많아질 거야. 저들 또한 너와 네 형제들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이야. 이미 누나가 죽었어. 다른 형제들까지 죽게 하지 않으려면 모여 있을 때 몽땅 다 죽여버리는 거야. 양심? 그런게 무슨 소용이야? 저기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너를 적으로 삼았다는 의미라고. 죽여 죽이는 거라고, 네가 안 죽이면 저들이 널 죽이려 들거야. 정의? 무슨 말라비틀어진 정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의 행동이 어떤 것인지 아주 어릴 적부터 너는 겪어보지 않았어? 열 살도 안된 너를 죽이려 든 것이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의 행동이라는 것을 겪어보고도 몰라? 저들은 겉으로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고 뒤로는 너와 네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는 적일 뿐이야. 그러니 하나도 남김 없이 몽땅 다 죽이고 세상을 피로 씻는 거야. 너는 무적이야. 이 세상에 너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어. 네 앞을 가로막고 네 일을 방해하고 너를 적으로 삼는 자는 모조리 다 죽여버리는 거야.'
끊임없이 죽이라는 목소리가 소구의 마음을 잠식해 들어가면서 처음 악양의 하늘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처럼, 소구의 몸은 점점 사악하고 잔혹한 기운을 품은 붉은 혈광에 감싸여 지기 시작했다.
이성이라 불리는 감정은 점점 소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대신 파괴와 살인의 충동이 소구의 마음을 점령해가고 있었다.
"저기를 봐!"
군산에 모여 있는 무림인이라 불리는 사람 중의 누군가가 악양 쪽의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악양의 하늘 위로 어제 저녁 그들을 공포에 물들이던 붉은 혈광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끔찍한 마기를 뿜어내는 그 붉은 혈광이 먹구름으로 검게만 보이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하늘을 붉게 물들인 붉은 광채는 서서히 동정호 쪽으로 움직이면서 거대한 동정호의 수면조차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꽈르릉!'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세상을 뒤흔들었다.
세차게 파도치고 있는 동정호의 수면 위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소구의 모습을 발견한 자들은 서둘러 배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군산에 모여 있는 군웅들의 숫자는 물경 삼백에 이르고 있었지만, 지금 오고 있는 자는 그들 전부가 덤벼들어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살심과 파괴에 대한 욕망 그리고 피에 대한 갈증으로 미쳐가고 있는 소구는 될수록 천천히 군산을 향해 움직이면서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군산이라 불리는 호수 한가운데 모여 있는 저들도 사람이었고 그들 또한 혼자일 수는 없었다.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부모이며 누군가의 선배이고 누군가의 후배이며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군가의 정인이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의 스승이고 누군가의 제자일 것이다.
인간은 절대로 혼자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을 지배해가고 있는 살심(殺心)에 대항하는 소구의 또 다른 마음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소구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이성과 감정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소구의 몸은 아주 천천히 군산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동안, 군산에 모여 있는 무리들은 서로 먼저 배에 올라 군산을 탈출하려고 아수라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이고 미친 듯이 파도치는 동정호의 수면 위를 걸어서 다가오고 있는 자가 뿜어내는 살기는 인간이 뿜어내는 기운이라 할 수 없었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공포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이제 군산이라 불리는 섬에 단 둘만 남아 있는 운룡회의 두 사람은 서로를 씁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칠호의 말대로 우리는 어딘가 숨어 있어야만 했어."
"살려고 발버둥친 일이 오히려 모두를 죽게 만들어 버렸군."
"어떡할텐가? 저자와 싸우겠는가?"
"난 칠호가 싸우지도 않고 단지 소식만 듣고 홍방을 해체하고 잠적해 버려서 그를 비웃었지."
"나도 마찬가지야. 수면천마 방소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칠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알게 된 거야."
"애초에 백초당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졌을 것을---."
"우리가 악마를 깨우는 꼴이 되었군. 칠호의 말대로 방소구라는 자는 정말 악마로 변해 버렸으니---."
군산이라 불리는 작은 섬 한 가운데 칠층 높이의 탑 꼭대기 층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핏빛으로 물든 동정호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 파도 사이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수면천마 방소구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죽게 되겠지만 저자도 오래가지 못하겠군. 심마(心魔)에 빠진 것 같지 않나? 저렇게 광기에 물든 눈을 한 자가 오래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네."
군산은침(君山銀針)이라 불리는 군산에서만 난다는 차가 들어 있는 찻잔을 들어올린 무당파의 임지한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이 맛을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로군. 저자는 광기에 빠져서 미쳐 날뛰다 죽겠지만 그전에 우리가 먼저 죽을 거야."
"자네 문파의 제자들은 어떻게 했나?"
"모두 어디든 숨어 있으라고 했지. 저렇게 미쳐 있는 자가 우리만을 죽이고 끝낼 리가 없지 않는가?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아니 저자가 사라질 때까지 숨어 있으라고 했네. 자네는?"
임지한과 마찬가지로 종남파의 장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남명이었다. 그에게는 종남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 겨우 열밖에 안 남은 종남의 제자들이지만-- 그들만으로 종남의 맥을 이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신분을 잊고 평범한 생활을 하라고 했지. 무림의 일에는 아예 끼어 들지 말라고 했네."
"잘했군."
임지한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올 때 선착장 쪽에서 요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다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광채가 번뜩일 때마다 허공으로 조각난 육편이 비상하는 광경이 보이면서 그들의 눈을 괴롭게 했고, 들려오는 비명과 고함이 끊임없이 그들의 귀를 괴롭혔다.
바로 다음 순간 온 몸에 핏빛의 강기를 두르고 있는 소구의 몸이 그들이 머물고 있는 탑을 스치고 지나갔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머물고 있는 탑이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하고, 녹색과 은색의 광채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허공으로 탈출한 둘의 눈에 거세게 퍼붓고 있는 비바람으로 파도치고 있는 동정호의 수면 위에 조각난 배의 조각들과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시신들이 보였다.
먹구름 아래 허공 위에 치솟아 올랐던 두 사람의 몸은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고, 그들 은 떨어져 내리면서 군산에 있던 무림인 중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한 사람이 소구의 손에 붙잡혀 두 쪽으로 찢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군산에 모여 있던 자들 중에 이제 살아 있는 것은 그들 둘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둘은 서로를 허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불과 일각이 채 안돼는 시간에 군산에 모여 있던 군웅들 수백이 전멸한 것이다.
운룡회의 독룡 남명과 검룡 임지한은 지상으로 떨어져 내려가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나 보군."
"저자를 호수 쪽으로 유인해야겠어. 저자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모두 죽이고 있어."
그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앞에 보이던 한 건물을 때려부수고 있던 방소구의 고개가 하늘로 향하고, 광기로 이글거리는 두 눈이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우리를 보았어!"
독룡이 다급하게 소리치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몸은 지상으로 떨어지다 동정호의 수면 쪽으로 움직여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다음 순간 허공 위로 붉은 선이 그어지면서 소구의 몸은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있던 하늘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밑을 노려보았다. 노리고 있던 자들은 동정호의 수면 위에 서서 허공 위에 떠 있는 소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저자는 지금 우리를 못 알아보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아. 하지만 저자는 끝까지 우리를 추적해서 죽이려 들 테고,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보이는 대로 모든 사람을 다 죽이려 들겠지.'
'어차피 죽을 거라면--, 독룡 자네 독룡환 가지고 있지 않나?'
'가지고 있네. 하지만 독룡환의 힘으로도 저자를 죽일 수는 없을 텐데?'
'내 은룡환의 단혼사로 저자를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겠네. 저자가 이대로 천하를 돌아다니게 하면 수 천 수만이 죽고 천하가 피로 젖을 것이네.'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물 속에서 같이 죽는 거지.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저자가 저렇게 이성을 잃고 세상을 떠돌며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우리가 책임져야 하겠지.'
'지금이라면 가능성이 있긴 있군. 저자는 이성을 잃으면서 상승의 무공은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단혼사라면 저자를 물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가능할지도--, 물 속에서 독룡환이 폭발한다면 동정호 근방의 마을과 성에 피해가 최소화 될 거야. 한 동안 동정호는 죽음의 호수가 되겠지만---.'
두 사람은 전음을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동정호의 수면 위를 교차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움직임을 멈춘다면 어떤 일도 해보지 못하고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결코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허공 위에 떠 있는 소구는 움직이지 않는 채 어지러이 교차하면서 동정호의 수면을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두 사람을 광기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어지러웠다.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둘을 공격하려고 하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잠시 동안 꼼짝 안하고 허공에 떠 있던 소구의 손에 동그랗고 붉은 주먹만한 빛의 구체가 생겨나고, 그것은 동정호의 수면 위를 달리고 있는 두 사람이 있던 지역으로 날아가면서 점점 커져갔다.
동정호의 수면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붉은 광채는 집채만하게 커지고, 동정호의 수면과 부딪치면서 한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
"꽈-- 아-- 앙!"
허공 십여장 높이까지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한 순간 소구의 눈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음 순간.
'세 에 엑!'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물기둥 속에서 가늘고 긴 은색의 투명한 줄이 튀어나와 소구의 발목에 감겨드는 순간, 흑색 장삼을 걸치고 있는 종남파의 장문이이자 운룡회의 흑룡인 남명이 물기둥에서 팽글팽글 몸을 회전하면서 소구의 몸에 달라붙어서 한 소리 고함을 터트렸다.
"지금이야!"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남명의 팔과 다리는 소구의 몸에 칭칭 감겨지고 한 순간 검은 흑룡의 환영이 소구와 남명의 몸을 휘감고 있을 때, 치솟아 오르던 물기둥 속에서 또 한 사람이 튀어나와 소구의 발목에 감긴 줄을 잡아 당기면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동정호의 수면에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나면서 그 안으로 부서진 배들의 잔해와 물위를 떠다니던 시신들이 모두 빨려 들어가고---.
"우 아 아!"
괴성을 내지르면서 허공에 버티고 있던 소구의 몸 역시 순식간에 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쿠 우 웅'
물 속 깊은 곳에서 둔탁한 폭발음이 터지고, 한 순간 동정호 천체가 물속에서 일어난 화광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 높이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면서 거대한 해일이 일어나 동정호의 수면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편한밤 보네세요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즐감합니다
즐감
감사 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독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