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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026년 1월 3일 토요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제1독서 : 1요한 2,29―3,6
복 음 : 요한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오늘의 묵상
이 철구 요셉 신부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왜 참될까요?
그의 증언은 상상이나 소문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듣고 본 것으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증언하였고,
덕분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시며,
세상의 죄를 없애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사명에 충실하였고, 자신의 증언으로
‘구원의 문’이신(요한 10,9 참조) 예수님께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저마다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는
올바로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소중합니다.
작은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듯,
우리도 주님의 은총 안에서 작은 일에도 충실한 일꾼,
주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충실한 일꾼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자매님께서 공무원 시험에 힘들게 합격한 후에,
민원을 처리하는 부서에 배치되었습니다.
공무원 시험 합격과 동시에 행복도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생각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매일 사람들에게 시달려서 스트레스만 쌓여갔습니다.
점차 직장에서 보내는 하루가 끔찍했습니다.
‘힘들다. 짜증난다’라는 말만 하는 자기인데,
자기와 달리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선배는 너무나 밝은 모습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이분 역시 자기와 똑같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데
기쁘게 일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선배님! 힘들지 않으세요?
저는 사람 상대하는 게 너무 힘든데, 선배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자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민원인을 향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해.
‘당신이 나를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민원인이 없으면 우리는 직장을 잃겠지. 그러니 감사한 것 아냐?”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 때문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늘 자기 안에만 갇혀 있습니다.
자기 힘든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여깁니다.
감사의 이유보다 미움과 원망의 이유만 찾고 있는 모습입니다.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 괜찮다고
말할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합니다.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 때 문설주에 피를 발라
죽음을 면하게 했던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파스카의 어린양으로서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죄’는 누구의 죄를 말할까요?
바로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점을 분명히 알기에,
제자들과 사람들이 예수님께 향하도록 철저히 자신을 낮춥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줄 뿐”이라며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돋보이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듯, 우리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중심에 있을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을 드러내려고 노력합니다.
겸손하지 못한 모습이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어제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신원과 사명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한 ‘예수님의 신원과 사명’을 말해줍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로 ‘양’(탈리야)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곧 ‘유월절의 어린 양’과 ‘주님의 종인 어린 양’입니다.
첫째로, ‘어린 양’(하말), ‘새끼 양’, ‘아기’(아들)을 의미하는데,
‘지고 가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곧 나무, 과일 또는 임신한 여인이 아이를 ‘지고 간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시 ‘양’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어린 양’이란 ‘속죄양’으로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 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 양’을 상징합니다(탈출 12,1-13).
둘째로, ‘어린 양’이란 ‘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라고 하듯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인 메시아’를 상징합니다(이사야 53장).
그러니 ‘어린 양’이란 표징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고 있으며, 동시에 세상의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가져오는 ‘메시아’로 증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체험한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그에게 돌아와 새 시대를 알렸듯이
이제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시작되는 ‘새 시대’를 알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어린 양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 성령으로 입히신 옷입니다.
속죄양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깨끗이 빨아 입히신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어린 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은 대속으로 자신을 내어놓기에 억울함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향이 있는 ‘봉헌’의 삶이요, ‘향하여’ 바치는 삶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내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피어나고 있고,
그분을 향하여 바치고 있는 봉헌된 삶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조 욱현 토마 신부
1. 요한의 증언: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증언한다.
이는 단순히 죄의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파스카 어린양(탈출 12장)과
이사야서의 고통받는 종(이사 53장)을 성취하는 구속의 신비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세상 죄의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분은 어린양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순수하고, 겸손하시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니, 이는 진정한 어린양의 본질이다.”
(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36,7)
2. 성령을 주시는 분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요한 1,33)으로 증언한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파스카 신비와 깊이 연결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선물이자,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성 바실리오 대주교는 성령의 역할을 이렇게 강조다.
“성령께서 우리를 죄에서 정화하시고, 다시 창조하시며,
하느님의 자녀로 양자 삼으신다.”(De Spiritu Sancto, 15,36)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은 단순한 제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을 뜻한다.
3. 교회의 가르침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드러내셨다.”(608)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교회는 파스카 신비를 거행할 때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힘으로 새로워진다.”(전례 6항)고 가르친다.
4. 삶의 적용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어린양이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
나의 신앙 고백은 요한처럼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요한 1,34)라는 증언이 되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려 노력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어린양을 바라보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결심해야 한다.
그분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에페 2.14)는 제게 인상적인 성서 말씀입니다.
1989년 한국에서 44차 세계 성체 대회가 있었습니다.
성인품에 오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방문했던 성체 대회입니다.
그때 한국 교회에서 정한 주제 성구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것은 평화였습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정책을 폈습니다.
러시아,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도 ‘기본 합의서’를 만들었습니다.
기본 합의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남과 북은 의견대립과 분쟁 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50년 가까이 이어오던 ‘냉전’ 체제도 무너졌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세계 성체 대회가 한반도에 평화의 물꼬를 트고,
냉전으로 갈라졌던 세계에 평화의 물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2009년 성지순례 중에 ‘에페소’를 방문했습니다.
에페소에는 유대인 회랑 유적지와 로마의 도시 유적지가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성당 유적지와 성모님의 성당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에페소의 성모님 성당에는 많은 순례객이 찾았고,
성모님의 전구를 구하는 편지가 있었습니다.
저도 성모님의 전구를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에페소서는 하느님의 신비와 위업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치와 화해로 드러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바로 일치와 화해의 장소임을 이야기합니다.
에페소서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와 위업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 일치와 화해를 이루시고
모든 사람을 한 백성으로 불러 모으시어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이 위업에는 인종이나 성별의 차별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화(義化)는 그분이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인간이 그것을 믿음으로 받게 됩니다.
이 선물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주어집니다.
성령은 변화와 화해를 이루는 힘으로써
다양한 은총의 선물들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드러납니다.
에페소서에서 복음 선포는 적대감과 갈등을 완전히 뒤엎는 하느님의 위업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망가진 관계를 회복할 신비로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모든 것을 일치와 화해로 이끌 이 중요한 계획의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적대감으로 갈라서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금욕과 극기보다는 세상으로 들어가셔서
가난한 이, 외로운 이, 병든 이, 이방인, 세리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혈통과 능력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으로 주어지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가난한 사람이
참된 행복을 얻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으러 다니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그리고 종교는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꿈입니다.
그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꿈은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그 꿈은 세상의 모든 권한을 가지신 분께서
기꺼이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2026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는 우리의 겸손과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는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는 사랑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 끝마다 모두 보았네.”
떠오르는 주님도 아름답지만, 저무는 세례자 요한도 아름답습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과제가 있으니,
그것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대체 무엇을 말입니까?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
그리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은 또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입니다.
불행하게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정체성에 대한,
그리고 나란 존재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인식은
우리 신앙의 근본이요 기초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세자의 전면에 서서히 떠오르고 계시는 예수님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초집중하며,
그분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드디어 그 작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자신의 눈앞으로 지나가시는 메시아를 확인한 세례자 요한은 지체 없이 외쳤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36)
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랜 세월 공들여 양성시킨 제자들을
조금의 미련도 없이 그분께 인계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에게 눈짓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머뭇거리는 제자들의 어깨를 툭 치고, 등을 떠밀면서,
저분을 따라가라고 귓속말을 건넸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교육시킨 애제자들을 떠나보낸다는 것,
스승으로서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만 바라보고 환호하고 박수 치던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자신을 떠나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상실감이랄까 허탈감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의 본질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공들여 쌓은 탑들을 떠나보냈습니다.
새로운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환히 떠오르도록,
멋진 배경이 되어준 세례자 요한의 삶이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앞에 서 있는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멋집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정체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막 동녘 하늘을 환히 밝히며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 같은 분인 반면,
자신은 그저 후 불면 즉시 꺼져버리고 마는
한 자루 촛불일 따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뜨는 해도 아름답지만 저무는 달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막 신축된 초현대식 별장도 아름답지만,
허물어져 가는 고성(古城)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떠오르는 주님도 아름답지만, 저무는 세례자 요한도 아름답습니다.
“나는 저분을 몰랐다.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으라는 선포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속죄 제물로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과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합해진 상징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3.5)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믿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시고,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분입니다.
2)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두 번이나 나오는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과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들은,
“내가 ‘예수님이 메시아’ 라고 증언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직접 보았기 때문에 말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인간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일러 주셨고,
그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가 진리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체험으로 확증된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언제나 항상 믿음이 먼저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하느님께서 일러 주셨다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느님을 안 믿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는 종파들이 있습니다.
그 경우는 하느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은 하나입니다(요한 10,30).
3) 요한의 증언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의 제자들 가운데 몇 명은 그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에게로 갔지만,(요한 1,37)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그의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요한 3,25-30)
<세례자 요한은 자기 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가라고 밀어내지는 않았습니다.
믿음이란, 억지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제자가 아니더라도,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에게 간 사람들이 몇 명은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했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의 임무 수행은
겉으로만 보면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실패일까?
아닙니다.
그의 임무는 ‘선포와 증언까지만’입니다.
요한의 선포와 증언을 믿고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은,
사람들이 각자 스스로 할 일이고, 요한의 책임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예언자입니다.
4) 주님의 ‘부르심’은 당신을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초대인데,
그런데 구원을 받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고,
우리의 권리도 아니고, 주님의 자비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주장하면서,
내놓으라고 요구해서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과정은 ‘나의 몫’이고, 결과는 ‘주님의 몫’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헛된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자비를 간청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하느님 관상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제 저는 겸손한 자기 관상에 관해서 묵상과 나눔을 하였고,
오늘은 겸손한 하느님 관상을 할 거라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하느님 관상에 관해 묵상하는데
이때 떠오른 생각이 바로
‘겸손하다고 해서 다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은 아니다.’였습니다.
물론 교만한 사람이 하느님 관상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니
겸손이 하느님 관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겸손하면 자동 하느님 관상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인간적으로 겸손한 것만으로는 하느님 관상이 불가능하고,
영적으로 겸손해야만 하느님 관상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자 요한도 성령께서 주님 위에 내려오시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보는 것이 성령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성령의 눈이 없으면 성령도,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 위에 머무신 성령께서 세례자 요한에게도 머무셨을 겁니다.
관건은 이제 우리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성령의 눈을 지닐 수 있는가 그것입니다.
이를 위해 겸손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이 그저 인간적인 겸손이 아니라
어제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어야 합니다.
베드로나 프란치스코처럼 극적으로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되든지
클라라나 데레사처럼 자연스럽게 하느님 앞에 있게 되든지
어떻게든지 영적인 수동태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하느님 체험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고기를 잡으러 여느 때처럼 나갔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있는 힘이란 능력과 노력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이란 능력과 노력 두 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오랜 고기잡이로 능력이 갈릴래아에서 최고였습니다.
그날 밤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으니 베드로는 노력도 다했습니다.
그러면 평소 같으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어야 했는데 허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 허탕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모든 하느님 체험의 공식입니다.
나의 힘이 다했을 때 하느님의 힘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의 때가 다했다거나 그의 힘이 다했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능력도 다하고 노력도 다해 이제는 더 이상 힘이 없다는 뜻이고,
내 힘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내 힘이 하나도 없을 때 두 가지입니다.
다른 인간에게 힘을 빌리려고 들던지 하느님께 눈을 돌리든지.
그런데 인간에게 힘을 빌리려던 것까지 허탕이 되었을 때
그때 하느님께 눈을 돌릴 수 있게 되고
그때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심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은총의 때이고 영적인 겸손의 때인데
이때 받은 성령의 눈으로 하느님을 관상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개안(開眼)의 여정
“날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삽시다”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네"(요한1,16)
만년일력(萬年日曆), 평생 쓰는 일력이라 합니다.
난생 처음 듣는 생소한 말마디라
전혀 이해를 못하고 그냥 넘겨버린 실수를 한 것입니다.
해마다 나오는 일력이 아니라 해마다 반복하여 쓰는,
그래서 새로 살 것이 없는 계속 사용할 수 있는 <다산 어른의 하루> 라는 일력입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작년 사용했던 것을 다시 사용합니다만 또 새로운 느낌입니다.
진리는 늘 반복해도 새롭습니다.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입니다.
새삼 바꿀 것은 환경이 아니라 보는 눈임을 깨닫습니다.
사람이나 환경은 아무리 바꾸어도 끝이 없습니다.
좀 지나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요, 그 환경이 그 환경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총으로 마음의 눈이, 무지의 눈이 열리면 늘 새롭습니다.
늘 새로운 것들을 추구함도 중독이요 병임을 깨닫습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의 시대가 된 듯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추구가 마침내 무한경쟁의 AI시대에 이르게 됐지만
도대체 멈출 줄 모르는 발전의 끝은 인류의 종말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도 듭니다.
흡사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느낌입니다.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가
날로 고갈되고 훼손되는 현실을 보면 저절로 이런 느낌이 듭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이 새롭습니다.
“잠을 떨치고 새벽에 일어난다.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하루의 시작부터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다산>
“첫닭이 울면 정갈하게 씻고 옷을 입는다.
이부자리를 걷고 방과 마루, 뜰에 물을 뿌리고 청소한 다음 자리를 펴놓는다.”<예기>
오늘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어제에 이어 계속됩니다.
유난히 “본다”는 말이 많이 나옴이 주목됩니다.
참으로 깨달아 눈이 열린 각자(覺者)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직 세례자 요한만이 눈이 열려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알아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였다.’”
그 많은 사람 중 눈이 열려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알아 본 사람은 세례자 요한 하나였습니다.
그러니 구원자 예수님을 모르는 눈뜬 맹인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육신의 눈 떴다 해도 주님을 모르면 누구나 무지에 눈먼 맹인일 뿐입니다.
육신의 육안은 날로 어두워져도 날로 밝아지는 심안이요 영안이면 좋겠습니다.
한 번 눈이 열렸다 하여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노화여정과 더불어 날로 노쇠해 가도, 주님 성령의 은총으로,
날로 영의 눈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개안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개안의 여정과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성화의 여정이요
이것이 진짜 추구할 바 영적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심안이, 영안이 활짝 열린 각자입니다.
활짝 눈이 열린 사도 요한은
바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임을 일깨워주십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사도 요한의 깨달음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안의 여정은 날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원!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인간존재인지요.
그러니 하느님께 이런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고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이분을 모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안에 머물러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고, 날로 개안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날로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복음 선포의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