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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수상 동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불랑제를 뜬금없이 언급하는 레닌의 반응에 파우코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레닌은 숨을 몇 번 돌리고는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자, 자네가 우스트랼로프는 이미 리베르가 우파랑 접촉했다는 사실을 안다고 그랬소.”
“예. 다만 그게 특별한 공작에서 비롯된 건 아니고, 7월 혁명 직후 혁명에 반대하는 우경 사회주의자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우스트랼로프가 우파와 접점이 있단 게 중요한 거고. 그리고 우파에서는 우스트랼로프를 사탄 취급하거나, 유일하게 말 통하는 인사를 취급하거나 둘 중 하나거든.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만.”
레닌은 어느새 진중한 표정으로 파우코이에게 자신이 생각한 사건의 뒷배경을 설명하고 있었다.
“즉 우스트랼로프는 자기를 사탄 취급하는 트루도비키나 다른 자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도 대략 알고 있을 거란 말이오. 아마 작스가 암살당한 직후 발로 뛰면서 상황을 파악했겠지. 마침 사회혁명당 전당대회에도 갔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서 총을 맞았다고요?”
“그렇소. 자기한테 총을 쏠 거란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지. 그래서 내가 거절하고 양보한 방탄조끼를 입은 것이고! 아마 적당한 연출을 할 생각이었나 본데, 설마 한 놈이 소총을 얼굴에 쏠 줄은 몰랐겠지.”
레닌은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썼다. 파우코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레닌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나, 병원에 가 봐야지. 범인이 누구인지 들어봐야겠어!”
*
레닌이 파우코이만 데리고 찾아올 줄 짐작 못 했던 일리야는 표정 관리를 했다. 레닌이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 자체는 했었기 때문에 아예 대비가 안 된 것은 아니었다. 파우코이와 레닌이 의자를 끌어와 앉자, 일리야는 골골 앓는 척을 그만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회복이 빠르네, 일리야 동무.”
“본래 저 같은 사람이 건강관리를 철저히 해서 더 오래 삽니다, 레닌 동무. 무슨 일이십니까?”
“그거 아나? 당중앙의 위원 중 자네만 나를 주석 동무라고 안 불러.”
레닌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그 사실이 전혀 불쾌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일리야도 레닌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1912년의 ‘무당파’였고, 트로츠키가 무당파를 벗어나 볼셰비키로 간 뒤에는 유일한 무당파였다.
“그래. 범인이 누구라던가?”
“권총을 쏜 파니 카플란은 본래 사회혁명당 좌파이지만, 독일과의 평화협정을 반대하여 콜차크에게 축출된 트루도비키에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레닌은 잘 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는 계속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일리야의 표정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살짝 굳었다.
“제가 배후를 눈치챘다는 걸 알고 오셨군요.”
“솔직히 나도 방심했지. 자네는 속임수를 전혀 못 쓸 사람 같았거든.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어. 그러니 말해보게. 범인이 누군가?”
일리야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아꼈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은 레닌이 미간을 찌푸렸다. 인제 와서 일리야가 범인을 옹호할 이유는 없었다. 또한 레닌은 일부러 병실에 파우코이만 데리고 왔고, 그것이 일리야가 무엇을 말하든 바깥에 함부로 새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임은 일리야도 잘 알 터였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범인의 정체가 레닌을 매우 껄끄럽게 할 때만 가능할 터였다.
“설마 트루도비키가 아닌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레닌 동무. 율리우스 마르토프 동무는 현재 레닌 동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마르토프 동무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레닌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며 일리야는 고개를 숙였다.
“선배 멘셰비키들이 범인이군. 맞나?”
일리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레닌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당황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병상에 누워 계신 플레하노프 동무는 아닐 거야. 누구인가. 세르게이 잉게르만? 베라 자술리치? 설마 파벨 악셀로드? 파벨 선배님이신가? 정말로?”
“아시다시피 잉게르만 동무는 칩거 중이시고, 자술리치 동무는 비판은 하실지언정 저희를 적대하지는 않습니다.”
“파벨 선배님이군.”
레닌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네가 말하지 않은 이유를 알겠어. 그래, 나는 플레하노프 동무, 자술리치 동무가 나를 얼마나 비판하든 겸허히 받아들였지. 그분들은 나의 경쟁자가 아닐세. 아무리 가는 방향이 다르든 나의 선배이지. 무엇보다 플레하노프 동무는 나와 입장이 의외로 다르지 않고.”
레닌은 과거를 회상하든 허공을 이리저리 더듬는 듯했다.
“파벨 선배님이 스톡홀름에서 귀국하지 않은 이유가 그저 불만 때문일 줄 알았어. 하지만 우리 당을, 특히 아무리 노선이 달라도 1902년부터 당원이었던 자네를 죽이기 위해 공작을 했다니.”
“저, 수상 동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파우코이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레닌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혹시라도 원로 멘셰비키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소리를 할 거면 꿈도 꾸지 마시오. 그자들이 소비에트에 질려 망명을 떠나든 스스로 해산해버리면 좋겠군.”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체포하고 탄압하면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부정하는 거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단어를 만든 게 플레하노프 동무이고, 이스크라를 창간한 것도 그들이야. 그런데 그들을 탄압해야 한단 건가?”
파우코이와 일리야는 고개를 숙이며 그런 말을 하는 레닌이 너무 감상적으로 변한 게 아닌가 걱정을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든 레닌의 눈빛은 어느새 불꽃이 튈 정도로 날카로웠으며 표정은 냉정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의 범인에 대한 소문을 흘린다면 멘셰비키들은 지금 지도부에 바짝 숙일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가 자기들을 봐주었다는 걸 자기들도 알 테니까. 자네도 그래서 총을 맞은 것 아닌가.”
레닌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파우코이가 당황하는 사이, 일리야도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뜨렸다. 총에 맞아 실명한 자와 그의 상관이 서로 낄낄대며 웃는 광경을 보며 파우코이는 두 눈을 깜빡였다.
“파우코이 동무, 감시의 눈을 소홀히 하지 마시오. 내부에도 적이 있을 수 있는 법이니까. 친구는 곁에 둬야 하지만, 적은 더 곁에 두고 항상 지켜봐야지. 내 말 명심하시오. 동무.”
*
언제 총을 맞았냐는 듯 한쪽 눈에 큰 흉터를 남긴 채 복귀한 일리야는 거리 측정용 지팡이를 들고 소회의실에 들어갔다. 레닌, 트로츠키, 마르토프, 스피리도노바와 보그다노프, 옘마 골드만이 자리한 소회의실은 실무 회의라기보단 각 정파의 수장이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모양새였다.
일리야가 파니 카플란의 배후를 밝히자 스피리도노바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건 안도의 한숨에 가까웠다. 트루도비키의 공작은 이미 러시아 전역에 익히 알려져 있었고, 사회혁명당 입장에서는 카플란이 정말로 트루도비키에 회유되었다고 밝혀지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리야가 그다음 악셀로드가 세 번째 총탄의 배후라고 밝히자 보그다노프는 입을 쩍 벌렸고 마르토프와 트로츠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일리야의 말을 반박하거나 거짓말이라고 외치는 대신 황망하다는 듯 탄식만 내뱉을 뿐이었다. 옘마 골드만은 고개를 저으며 침묵을 지켰다.
“이럴 수가.”
“설마. 아니, 충분히 가능해. 하지만….”
말빨 아니면 죽고 못 살던 천하의 트로츠키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시조 중 한 명이 볼셰비키에 대한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사실에는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르토프 지도부 하의 멘셰비키가 현 지도부를 지지한다는 것을 아는 그들로서는 어떻게 반응하기조차 난감한 사안이었다.
“일단 이전에 말한 대로 칸네기서는 제국군 잔당으로, 카플란은 정신병자로 발표할 것이오.”
“동무. 저희 당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트루도비키와는 완전히 절연하였으니 카플란에 대해 어떻게 발표하든 상관없습니다.”
스피리도노바의 말에 레닌은 고개를 내저었다.
“동부전선 사령관 중 한 명인 미하일 무라비요프가 연락을 해 왔소. 아시다시피 무라비요프는 사회혁명당의 지지자이지. 그에 따르면 우리 동무들이 전부 알고 있을 전직 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인…. 블라디미르 볼스키 동무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후퇴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하오. 볼스키 동무는 콜차크 쿠데타에 반대한 사회혁명당 우파 인사들을 이끌고 있고, 우리와 합류하고 싶다더군.”
1905년 당시 유부남이었던 볼스키와 잠깐 연인 관계였던 스피리도노바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언급되자 당황을 숨기지 않았다. 레닌과 이네사 아르망과의 관계를 아는 다른 참석자들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볼스키 동무를 받아들일 생각이고 동무들도 그에 동의하리라 생각하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카플란과 트루도비키 간의 관계가 발표된다면, 볼스키 동무와 트루도비키 반대파의 합류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모르잖소?”
“잘 생각했어. 율리아노프.”
마르토프가 짤막하게 말하자 레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 중요한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듯 양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파벨 선배, 아니 악셀로드에 대해서는 어떠한 발표도 하지 않을 것이오. 비록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다른 살림을 차렸고 당명조차 달라졌지만 본래 모두가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소. 악셀로드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건 자충수이지. 대신에….”
레닌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피리도노바를 바라보았다. 스피리도노바는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빗나가지 않습니다.”
스피리도노바와 레닌의 대화에서 상황을 깨달은 마르토프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반박 발언을 하지 못했다. 파벨 악셀로드가 암살되는 것이 그나마 가장 평화롭게 상황을 종료하는 길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준 일리야 우스트랼로프 동무는 앞으로도 공산당과 다른 당을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해줄 것이오. 그걸 위해서, 중앙집행위원회와 별개로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고 우스트랼로프 동무를 그 최고 책임자에 임명할 것이오. 우스트랼로프 동무?”
“예. 발표하겠습니다.”
일리야는 그렇게 말하고는 참석자들에게 문서를 나누어주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문서를 받은 참석자들은 첫 장에 적힌 기관의 이름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 기관은 전러시아 정치협상회의라는 기관입니다. 약칭 정협으로, 정협은 러시아 내에서 사회주의 정치단체의 설립의 자유와 활동의 자유를 보장할 기관입니다. 또한, 이 기관은 연기된 1920년 7월 선거를 통해 구성될 것입니다.”
살짝 쉰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가며 일리야는 팔과 눈에서의 통증을 점점 잊어갔다. 그는 계획의 첫 번째 단계를 밟고 있었다. 오직 골드만이 그런 일리야를 미약한 의심이 섞인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
파벨 보리소비치 악셀로드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와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창립자입니다. 이전에 나온 보그다노프와 마르토프가 레닌과 같은 연배라면, 악셀로드는 그 위의 대선배입니다.
그러나 다른 멘셰비키들보다도 소비에트 러시아를 너무 과하게 반대하여 내전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긍정하고 응원하기까지 했습니다.
볼스키의 가담은 실화입니다. 이미 체포되어 있던 스피리도노바가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느꼈을지는 모르지만요.
하여튼 지난 댓글은 대부분 정확했지만, 총격 사건은 완전한 자작극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맞은 것이죠. 일리야가 ‘아직’은 완전한 자작극을 할 정도로 변하진 않았거든요.
첫댓글 악셀로드 그인간 존나 과하긴 하네요...
선 씨게 넘었죠...
막고라는 곧 나오겠죠?
아직 일리야가 방법은 가리는 인물이라서 다행입니다.. 레닌이 아니라 진짜 우스트랼로프를 노린거였다니 ㄷㄷ
뭔가 점점 rp 소설보다 더 심도깊게 파고드는 느낌이네요 ㄷ 아무래도 일본과 그리스처럼 우스트랼로프가 활약하기 힘든 것들은 그냥 지나가버릴 수도 있겠네요. 엔딩을 상상하기 힘들다!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파트가 없진 않기 때문에 핵꿀잼인 파트(...)는 넣을 생각입니다.
그리스에서 자캅카스SSR 측 대표인 미코얀을 강력히 편들며 터키에서 영토를 왕창 뜯어내는 데 일조한 것도 있긴 합니다. ㅋㅋㅋ
그때 동석한 치체린은 완화된 요구안을 제시했었지만요.
@E.E.샤츠슈나이더 전 그때 치체린을 편들었죠.
너프 없는 원작의 음모력 최대치 마르텔이라면 바로 눈치챘을 것 같다는 느낌이네요. ㅋㅋㅋㅋ
사실 마르텔도 일리야가 조작을 했을지도 모른단건 의심을 했습니다 ㅋㅋ 그 이상은 리베르를 더 조사해야 하는데, 리베르는 마르텔의 상관 제르진스키의 처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