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염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침 거울 앞에서 수염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머리는 말이 없는데, 수염은 늘 부지런하다.
아침에 깎아도 저녁이면 다시 고개를 내민다.
마치 “나는 아직 경기 중이다”라고 말하듯이.
처음엔 농담처럼 생각했다.
머리가 수염으로 이사 간 건 아닐까.
위에서 살던 애들이 아래로 내려와
턱 밑에 탁구장 하나 차린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이삿짐이 아니라 분업이었다.
젊을 땐 머리가 나를 대신해 앞에 섰다.
머리 모양 하나로 첫인상을 만들고,
가르마 하나로 나이와 기분을 가렸다.
그 시절엔 머리가 에이스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머리는 슬그머니 물러나기 시작했다.
항의도 없고, 작전 타임도 없다.
몸은 이미 결론을 내린 듯했다.
“머리 장식은 이제 됐고,
생존 신호(체모)는 유지하자.”
그 자리를 수염이 채웠다.
수염은 꾸밈이 아니다.
드라이도 필요 없고, 스프레이도 없다.
그냥 자란다. 공처럼 튀지 않고,
묵묵히 네트를 넘긴다.
탁구를 치다 보면 이런 공이 있다.
화려하진 않은데
자꾸 넘어오고,
자꾸 살아남는 공.
요란한 스매시는 사라지고
이상하게 이런 공이 마지막에 남는다.
수염이 딱 그렇다.
누가 보든 말든,
오늘 하루를 살았다는 표시처럼
턱 아래에서 조용히 자란다.
요즘은 수염 깎는 것도 엄청 귀찮다.
수염은 하루도 안 거르고 출근한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건 살아 있다는 증표니까.
몸이 나에게 붙여준
가장 성실한 근무 기록 같다.
인생이든 경기든
굳이 전부 이길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 수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그 말을 대충 흘려듣고,
수염을 정리한 뒤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수염 덕분에
오늘도 얼굴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 탁구시인
첫댓글 ㅎㅎ윗동네서 살다가 아랫동네로 이사를 왔군요
허락도 안받고?
오늘도 수염은 말했죠
또 찾아왔으요 하고ㅎ
친하게 지내세요ㅎ
허락도 안 받고 이사 온 게 제일 문제입니다.^^
그래도 매일 안부 인사는 성실하더군요.
이쯤이면 그냥 이웃으로 지내야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맞아요.
머리는 감출 수 있어도
수염은 매일 존재를 증명하네요.^^
그래도 깎을 일이 있다는 게
아직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머리도 싱싱하게 젊음을 자랑하고
그거까지는 좋은데
왜 눈썹까지 젊다고 난리 치는지
손질하기 성가셔요
그건 축복이 과한 경우군요.^^
머리도 모자라 눈썹까지 젊으면
손질이 일이 되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바쁘다는 증거라
부럽습니다.
쥔장 허락도 없이
털이 이사를 했네요
그래도 살아있음의 증표요
거울 한번 보라는 명령이겠죠?
지인 남편분
탈모고민으로 당진까지
다녀왔다고
병원의 초라함
인산인해의 탈모인
당진 탈모만 검색어에 넣어도 나오던데
탈모인들의 스트레스가 느껴졌네요
말씀처럼
수염은 살아 있음의 증표이자
거울 한 번 보라는 조용한 명령 같아요.
탈모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이 정도 수염은
감사해야 할 일로 느껴집니다.
남자들은 얼굴에서 저 억센 털이 자라니 얼마나 귀찮을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
나이 들어가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탈모와,
그에 비해 건재한 수염에 대해서 재치 넘치면서도 깊이있게 써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머리 숱이 줄어서 꽤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염색을 중단하고 펌도 최소화했더니 숱이 조금 늘었어요! 넘 기뻐요. ㅎㅎ
읽으면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습니다.
탈모도, 수염도
결국은 몸이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거겠지요.
염색을 멈추고 펌을 줄였더니
숱이 늘었다는 말씀에서
조급함을 내려놓을 때
몸이 먼저 답해 준다는 걸 다시 배웁니다.
기쁜 소식까지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자가 수염이 안나는 이유는? 남정네들 말하길 속아지가 좁아서랍니다
그럴까요? 융통성이 없고 속창시도 없고 비구발발 호둘갑 떨어대다
일생을 마치는 여자의 속창시 그래서 수염도 못자라는 여자 앉아서
오줌누는 여자 ㅠㅠ 저는 시인님이 부럽습니다 제게 없는 수염과의
진지한 대화가 말입니다.
수염이 없어서 못 나누는 대화도 있고,
수염이 있어서 괜히 늘어나는 생각도 있더군요.^^
속이 넓다, 좁다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마다 몸이 맡은 역할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웃음 섞인 말씀으로 읽어주시니
수염 이야기도 덕분에 사람 이야기가 됩니다.
탁구시인님은 오늘은 수염을 가지고 기기묘묘하게
적용하시면서 우리들에게 훌륭한 글을 선사합니다
거기에는 상상력과 가치있는 내용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염 하나 붙잡고 시작했는데
말씀처럼 결국은 사람 이야기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받아주셔서 글이 한결 편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