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름다운 5060카페에 가입 한지는 2015년도 이니까 어언
11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 오기도 하였고
글재주가 워낙에 없어서 눈팅만 하엿답니다.
제가 오형이다 보니 오형방에다 글을 올렷는데 몇몇분 외는
관심들도 안가지고 어떨땐 단 한분만 댓글을 다시더군요.
물론 저를 오래전 부터 알고 있는 용띠 갑장들도 있지만
하는 일이 워낙에 바쁘다 보니 모임에 참여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글은 순수한 나의 조금 비참 했던 어린시절부터 살아온
이야기지만 두서 없지만 솔직하게 하나씩 기억해 올려 보겟습니다.
또 같은글을 다른곳에는 공개를 하여서 보신 분들도 계실겁니다..
아마도 제 생각엔 어렷을적에 당했던 슬픈 추억들이 밑바탕이
되어서 오기로 똘똘 뭉쳐서 살아왔기에 지금의 조금은 여유로운
황혼의 여유로운 노후 삶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답니다.
그럼 74년간 내가 걸어온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올려 보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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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찾아 천리 먼길을 ..
나는 내 나이 다섯살때 나를 낳아준 바람둥이 아버지로 부터 버림 받은
어머님과 두동생들 하고 무쳑 어려웠던 어린시절을 보냇답니다.
어머니께서 생활고로 초등학교 저학년시절 여동생과 나는 계모랑 살고 있던 아버지
한테로 보내져서 학교를 다녓는데 왜 자기가 놓은 자식이 아니면 눈에 가시
처럼 보이는지 알게 모르게 계모 한테 모진 학대를 많이 받앗답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경산에 외갓집에서 살고 계시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싶어
어린 여동생 손을 이끌고 대구에서 경산이 40리길 (16키로) 인데 걸어서
찾아갓다. 무더운 여름날 책가방을 둘러메고 걸엇더니 발이 퉁퉁 붇고 피가 났다.
경산 외갓집에서 어머니와 만나 부등켜 안고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흘리며
많이도 울엇다. 다행이 토요일이라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서 하룻밤을 자고서
일요일 오후 아버지가 사시는 대구집으로 갔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아버지한테 회초리도 아닌 맨주먹으로 얼굴이며 가슴을 사정없이 얻어 맞앗다.
자식이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은것은 지극히 당연한일 일텐데~ㅠㅠ
그당시의 공포감과 애절한 여동생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어린마음에도 죽이고 싶도록 아버지가 미웠고 "오냐 두고보자" 라고 복수심
에 이글거렷다. 계모는 말릴생각도 않코 더 두둘겨 팻으면 하는 눈치엿다.
그후 어머니는 강릉에 사촌 오빠가 강원여객 사장으로 있어서 도와주겟노라
해서 식당업을 하려고 강릉으로 막내동생만 데리고 가셧고 여동생과 나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중 무슨 이유인지 아버지와 계모가 크게 싸우고는
헤어지게 되엇다. 당시 미 8군에 노무과장을 하시던 아버지는 당장에 우리가
짐이 되엇던지 강릉에 너희들 엄마한테 찾아 가라고 햇다.
어떻케 어머니 사시는 강릉에 주소를 알았던지 할아버지께서 메모지에
적어준 강릉시 성남동 51-19번지 경미식당으로 찾아 가라며 차비와 몇푼의
돈을 달랑 쥐어 주며 반야월역에 데려다 주셧다.
그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강릉을 가려면 영천에서 한번 영주에서 한번 환승
그 당시의 왜늠들 말로 노르까이(환승) 해야만 갈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니 11살인 내가 8살먹은 여동생을 데리고 크다란 책보따리
와 옷보따리를 들고 가야하는데도 할아버지나 아버지 두분다 어린 자식새끼들만
찾아 가게 만들었으니 야속도 하엿지만 엄마를 만날수 있다는 마음에 너무나 기뻣다.
어린 나이 엿지만 조금은 영특하엿던지 주소 달랑 한장들고 엄마 찾아 천리
먼길을 그당시로는 꽤 무거웟던 책보따리 옷보따리 그리고 어린 여동생까지
데리고 길을 나섯으니 요즘 애들은 11살이라면 아마도 쉽진 않을것이다.
영천에서 서울행으로 갈아타고 영주에 가려면 밤 11시50분에 도착한다.
그런데 무거운 보따리 두개나 들고 뒷사람들 한테 떠밀려서 여동생이 기차
바퀴 사이로 빠진것이다. 나도 모르게 "시도뿌 시도뿌" 러고 부르짓으며 기차
바퀴밑으로 들어가 여동생을 구해 데리고 막 나오니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햇다.
그야말로 위기 일발의 순간이 아니엿나 싶엇다. 휴~ 지난 이야기지만 한숨이 나온다.
그기서 강릉가는 열차를 바꾸어 타려면 꼬박 4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역 대합실에서 꾸벅 꾸벅 졸다 깻다 하지만 그시간은 정말 춥고 지루한 시간이엿다.
드디어 새벽4시 강릉행 열차를 타고서 봉화 철암 도계를 지나 삼척으로
들어서는데 푸른 바다에 파도가 넘실대고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광경이 환상이엿다.
자고있던 동생을 흔들어서 '미애야 바다다 바다 한번 봐라? 라고 외치며 깨웠다.
그때의 그멋진 바다 때문에 내가 바다를 유난히 좋아 하는지도 모르겟다.
강릉역에 도착하여 커다란 보따리 두개와 여동생을 데리고 딸랑 주소한장 들고서
먼거리에 있던 중앙시장에 성남동 51-19번지 경미식당을 물어 물어 찾아갓다.
엄마는우리가 올줄은 꿈에도 몰랏던 어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슬픔과 놀라움에
부둥켜 안고 많이 우셧다 동생과 나도 어머님을 끌어안고 펑펑 목을 놓아 울엇다.
그당시를 생각하니 도저히 나도 모르게 이순간에도 눈물이 주루륵 흐른답니다.
하지만 위에 글은 제가 어린시절 겪엇던 사실 그대로 랍니다.
어린시절과 사춘기때에 많은 고초와 시련이 있었길래 세파를 이겨낼수
있엇던 강인한 정신력과 인내심이 길러 지지 않앗나 싶고 오늘의 조금은
여유로운 내가 있지 않앗나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아픈 이야기가 6편까지 있으나 혹시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올리도록 하갰습니다 물론 나의 슬픈 사연을 읽어 보신님들도계실겁니다
아래사진은 우리 삼남매가 외할머님과 함께 강릉 경포대에 가서 찍은겁니다.
제 막둥이녀석은 현재 전곡에서 관급 토건공사를 맡아서 기반은 딱았고
아들과 딸 둘다 육군 중령으로 국방에 일조를 하고 있으며 내가 요즘 대구에서 공사
를 하는것은 여동생이 못난 신랑 발로 차 버리고 35년전 부터 홀로 살며 때밀이를
하다가 우연히 부동산에 손대어 재미를 보아 여러군데 주택이나 상가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어서 세입자가 바뀌기만 하면 오빠 도와 달라고 해서 달려가서
비지땀을 흘리면서 도와 주고 온답니다.
후편을 보시면 아시겟지만 다시 대구로 내려간 그때에
외할머님께서 저희들을 어머님 한테 도로 데려다 주고서
경포대 호수로 동생들과 같이 가서 함께 찍었던 사진 입니다
제가 3살때 모습인데 그당시 경기가 걸려
거의 죽음의 문턱 까지 갓다가 용한 침쟁이의
침한방으로 가까스레 살아났을때 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맙습니다 섭이2님 건강과 행복이
늘 곁에 머무는한해가 되사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글 잘 읽었습니다
무책임한 어른들 때문에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군요
그런데도 잘헤쳐오셨다니 다행입니다
후편을 기대하겠습니다.
나국화님 고맙습니다.
그런 처절함이 있었길레
지금의 넉넉한 제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 하세요
파란만장 했던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한편의 영화 처럼 애처롭네요
어머님도 미인 이시고 똘망한 눈매의 수리산 님 역시 총기가 가득하십니다
어린나이에 어떻게 그 먼길을 주소 한장만 들고 찿으셨는지 대단하세요
♡♡♡
리즈향 운영자님 께서 저를 칭찬해 주시니
참으로 영광 입니다. 저도 노인복지관에서
열심히 봉사도 했답니다 11년전부터요 아마도
조금 영특 했다고는하나 지금도 눈물이 흐르죠
안겪어 본사람들은 이해를 못할겁니다.
Happy New Year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정에 행운이 함께하시고 건강하시길 두손모아 빕니다
대단하시네요.
그때의 우리들은
정신력과 참을성이
강해지요.
응석도 편해야 부릴 수
있는거니깐요.
다음편을 기다릴께요.
고생하셨어요.^^
네 다음편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고샐끄,ㅌ에 낙이 아니라 골병이
든다지만 저는 낙을 얻었답니다
건강 하시고 모든 일이 다 이루어
지는 2026년 한해가 되시길 응원 드립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뭔가 저와 비슷한 환경이셨네요.
세살 아래였던 제 여동생은 계모한테
맞아 죽었는데, 수리산님은 세살 아래
여동생이 잘 살고 있다니 앞으로는
행복한 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적토머님께서도 그런 경험이 ..
다행이 우리 삼남매는 사회적이나
가정적으로도 다 괜찮아 졋답니다.
건강과 행복이 늘 곁에 머무는
한해가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수리산2
어머님이 계시기때문에 그래도 삼남매가 다
괜찮아진 것 같아요 저희 5남매는 제가 다섯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온갖 풍파를 다 겪었죠.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감동으로 마음이 먹먹합니다.
참으로 장하십니다!
어린 여동생 데리고 엄마 찾아 그 먼 길을 갔던 열한 살 아이,
영특하고 굳세고 장한 소년이었습니다.
이어질 이야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갑니다.
달항아리님 글을 참 너무 잘 쓰시던데
저는 겪었던일일체 거짓없이 쓰다보니
두서도 없답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덕에 애들이고 우리도넉넉한 노후가
되었답니다 감사합니다.
남성방에 가셔서 사진 한번 봐주세요
글 감동적으로 잘읽었어요^^
오늘 참 고마웠습니다 수고가 많으셔습니다 좋은밤 되세요
고생많으셨습니다.
저도 고생해봐서
알지요.
그럼요 그당시에는 고생한
사람들이 참 많았답니다
물론 이제는 성공 하셧겠지요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운이
가득 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에 그 어린나이에
동생까지 데리고 엄마찾아 갔던길
고생끝에 이제는 옛말하며 사시죠
대구아줌마라 경산부터
친근감에 더욱 반갑게 읽었습니다
제가 어린시잘에는 대구 중앙초등과
대봉국민학교를 다녔답니다. 경산에
원통먹국수 건물을 제거 손수 지었답니다
경상도 3대 맛집이라고 하더곤요
건강하시고 정 아님 가정에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에나.
그 어린 나이에 그 먼 천리길을 어린 동생을 데리고 가다니.
그래도 지금은 여유롭게 사시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러게요 조금은 영특했나 봅니다
요즘 11살짜리면 철부지 갯지만 그때는
살기위해 그런 힘이샐깅것 같습니다
고운 저녁 되세요
ㅠㅠ 어쩜 이렇게 아픈 사연이 있나요 다음 편도 올려 주시고
삶의 방은 본인의 이야기를 쓰는 방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진솔하게 써 주시면 잘 읽고 댓글 달겠습니다
너무 슬픈 이야기 그리고 에필로그 까지 슬프면서 잘 지내시는
현재 생활까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운선님 혹시 강원도쪽이 아니신지요?
예전에 운선남의 글을 잠깐 본적이 있었거던요 제가
강릉 옥천 초등과 강릉중학교 촐신 이라서요 어무튼
졸필에 너무 과찬이십니다 감ㅅ합니다
어려운 시절이 있었군요..
감동적이고..
마음 한편으로는 슬픕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네 그슬픔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다고봅니다
산사나이님 다녀가신 흔적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슬퍼요ㅠㅜ
산전수전 다 겪으셨네요
네 그래서 초반에는 대명을 산전수전 이라는
대명도 달았답니다 그런데 이겨나왔답니다.
자금도 가끔은 그시절이 생각이 나서 동생들과
같이 울고 한답니다..
아픈 삶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힘겨움을 디딤돌 삼아 삶의 승리자로 우뚝 선 대단하신 분이시로군요. ^^*
대단하지는 않탑니다 다먄 어린시절에
보았던 십계에 감명을 받아서 그렇케 살아
가리라 마음을 먹고 한번도 빠둘어진길
가지 않았던것은 잘한일 같아요
다녀가신 흔적에 경위를 표합니다.
어린시절의 어려움을 잘 극복해내셨네요~~
지금은 편안하시다니 참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푸른강님 이 제 사는것은
넉넉해 졋으니 기부도또 노인복지관에
내일도 봉사를 간답니다 11년째 봉사를
하는데 집사람의 권유때문이랍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하신하루가 되세요
어려운 시절의 드라마를 보는듯한 모습에 가슴이 울컥하네요
그당시 고생하는건 흔하게 볼수있었지만
수리산미의 고생은 말로 다 할수없을 정도였네요
어려운 시절이 있으니 지금까지 건강하고 편안한 삶이 있지않았나 생각되네요
어려웠던 어리시절의 이야기 잘 보고있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절벽님 그당시 저와 같은 대구에서
살아서 일기로 힛트친 이윤복 군이 있었지요
하지만 말로는 별로 안 좋타군요 전 그 고생을
오기로 버텨와서 지금은 안전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내가 키운 자식들도 모두
잘되어 대기업 간부직으로 육군에 연대장으로
또 전문직으로 종사하기도 하고 육본에서 중령
계급을 달고 있기도 하답니다.. 성원에 어긋남
이 없도록 노력하게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