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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심 12화 - 본향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12 (끝)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내가 살던 나라에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곳곳에 경찰들이 지키고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검문했고 반경 5km 이내로는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철저한 격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길어도 몇 달이면끝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경찰들의 눈을 피해 걸어서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상보다 봉쇄가 길어지고 거리의 분위기도 점점 더 흉흉해졌다.
봉쇄가 길어지고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확산하자 현지인들은 이를 중국인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했고, 나중에는 무차별적으로 아시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눈앞에서 목격하니 ‘정말 이러다가 가족들 얼굴 한번 다시 못 보게 되는 것 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려움과 그리움이 눈 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은 전면적인 봉쇄까지는 하지 않고 있고 방역도 비교적 잘 된 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니 더욱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봉쇄로 인해 한 동안 출입국이 불가능한 상황 이 이어지다가, 잠깐 출국만 가능하도록 허용이 되었다.
그때 그 나라에 살던 대부분 한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편도 항공권 가격이 평소의 두 배가 넘었지만 그 돈을 지불하고 도 표를 구할 수 없었다. 너도나도 한국으로 가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나는 그래도 여행사에서 일했던 시절의 인맥을 사용해서 어렵사리 항공권을 구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는 마스크를 세 겹씩 겹쳐 쓰고 비즈니스석 비용을 주고 이코노 미에 앉아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내가 2주간 격리할 공간을 위해 동생은 어머니 집으로 이동했고, 내가 동생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왔지만 어머니와 동생과 부둥켜안지도 못하고 그저 멀리서 얼굴만 보고 반갑다고 인사해야 하는 상황이 못내 아쉬웠다.
격리하는 동안에는 가족과 영상통화로 그리움을 달랬다. 한국에 와서도 영상통화라니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영상통화 중에 “서윤아, 네 동생이 많이 아프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격리 때문에 멀리서 인사하던 동생의 눈에 초점이 흐렸던 것 같았다.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 것이겠거니 했었는데 알고 보니 동생은 심한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 씩씩하던 아이가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을까?
내가 해외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어머니와 동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자기를 위해 서는 돈을 잘 쓰지 않으시고 양말에 구멍이 나면 기워서 다시 신으실 정도로 절약정신이 투철하신 분이었다. 그렇게 아끼고 벌어서 모아둔 돈이 상당했다는 걸 알기에 엄마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필요없는 일이었다. 동생도 규모 있는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었기에 나는 나만 걱정하고 챙기면 되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들어왔을 무렵에는 이미 모든 것이 무너져 있었다.
우리 가족은 투자사기를 당해서 그동안 모아온 모든 돈을 잃고야 만 것이었다. 함께 투자했던 동생은 너무나 좌절한 나머지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돈을 아끼시고 모으시던 분이 왜 투자를 하려고 하셨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동생의 상태는 심각했다. 몇 번이고 자살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정신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옷을 여러 겹 껴입어도 추워했고 불면증에 시달릴 뿐 아니라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너무 걱정이 되어 격리가 끝나자마자 동생을 돌보기 시작했다. 가족이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이것은 새로운 시련의 시작이었다. 동생의 건강도 건강이었지만 사기를 당한 집이 으레 그렇듯 어머니도 마음의 병이 깊었다.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싸우기가 일쑤였다. 서로 사랑하고 행복해야 할 집이 지옥이 되고야 말았다. 집에 있으면 너무 진이 빠지고 괴로워서 밖에서 볼일을 보고 귀가할 때에도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그때가 장마철이었는데 비를 맞으며 집 밖에 서서 많이 울었다. 나중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아는 언니들의 집을 전전 하기도 했다. 결국 나중에는 집에서 독립해서 살 수 밖에 없었다. 우울한 나날들 속에서 내 마음속은 번민으로 들끓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나는 왜 북한에서 태어났는지, 왜 한국에까지 왔는지 등등 온갖 질문 들이 마음에서 올라왔다. 죽고 싶은데 이렇게 죽으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왜 이런 상황이 나에게 온 것일까? 정말 사후세계는 있는 것일까?’ 내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들로 가득 찼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답을 풀어 낼 수 없었다.
이렇게 내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무렵, 숙명여자대학교 학부 시절부터 나의 지도교수님이셨던 소은희 교수님께서 내게 연락을 주셨다. 학업에서도, 신앙에서도 항상 나에게 조언해 주시고 도움을 주셨던 고마운 분이었다. 해외에서도 종종 연락드렸고, 평소 같았으면 귀국 후 먼저 찾아뵈었을 텐데 고단한 삶에 경황이 없어 연락을 드리지 못했더니 교수님이 먼저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서윤아, 너 한국에 와서 뭐 하고 있니?” 교수님의 질문에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대뜸 “교수님, 저 죽고 싶어요.”라는 대답 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물으시는 교수님께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놓고 죽고 싶다는 소리만 했다. 내 상태를 확인하신 교수님은 내일 자신의 집으로 꼭 오라고 하셨다. 다음날 교수님 집에 찾아가서 차를 마셨다. 교수님께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며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셨다. 나는 교수님 앞에서 펑펑 울며 많은 것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입니까? 교수님? 왜 태어났고 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겁니까. 잘사는 듯 보였는데 지금에 와보니 엄마는 이렇고 동생은 이렇고….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죽고 싶은데 진짜 천국이 있는 건가요?” 교수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무례하게 들릴 수 있었겠지만, 나는 정말 절실하고 간절했다. “교수님은 항상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시는데 교수님이라서 그게 가능한 거잖아요. 저는 지금이라도 죽고 싶어요. 그러면 저는 천국에는 못 가겠죠….” 다 토해놓고 나니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서윤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며,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교수님, 웃기는 소리 좀 그만하세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저만큼 가난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평생을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고, 또 지옥과 같은 지옥 같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천국이 어떻게 제 것이 됩니까?” 그때 나는 그동안 쌓인 불만을 믿고 있던 교수님께 대들 듯 이 쏘아붙였다. 그 동안의 정체성의 혼란과 고단한 인생의 이유에 대해 펑펑 울며 쏟아놓는 내 모습을 보고 교수님은 함께 우셨다. “교수님은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저는 어느나라 사람인가요?” “서윤아,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백성이야. 그러니 이 땅에서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아. 하나님은 너를 알고 계시고 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니까.”
“네?!”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처음 듣는 그 말에 내 머리는 망치로 맞은 듯 번쩍했고 내가 모르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서윤이가 대학교에서 앰버서더로 활동을 했잖니. 네가 숙대를 대표하는 앰버서더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를 이 땅에도 특파원으로 파견하신 거야. 그러니 너는 북한 사람도, 남한 사람도, 미국 사람 도 아닌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란다.” 교수님이 계속 말씀하셨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을 바라봐야지, 이 한 쪽 아래서 저 멀리까지 내다보려고 하니 볼 수도 없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이란다. 하나님은 너를 그렇지 만들지 않으셨는데, 너는 계속 네 힘으로 해 보겠다고 하니 많이 고단했을 것이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교수님의 입을 통해 나에게 전해 주시는 성령의 말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흐느껴 울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들과 말들이 일견 충격적이기 더 했지만,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사망의 길을 걷고 있던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세계의 말씀들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께 다시 여쭈었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먼저 하나님 말씀을 알아야 하니 성경을 봐야 해.
그리고 진짜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할거야.” 사실 그전에도 성경 공부를 하자고 교수님께 서 여러 번 권하셨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핑곗거리를 대며 피할 수도 없었고 죽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온라인으로 매일 밤 1:1 성경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말 성경책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교수님께서는 중국어 성경과 우리말을 함께 공부하자고 하셨다.
그렇게 교수님께서 몇년 전에 선물로 주셨던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같이 공부하니 그동안 몰랐던 말씀의 의미를 더 깊게 깨달아졌다. 과거에는 성경 말씀 한 장을 읽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말씀 구절 하나하나가 살아 서 나와 함께 숨 쉬는 것만 같았다. 밤낮으로 말씀을 들었고, 그 일이 너무나 행복했다. 이동할 때도 오디오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다녔고, 잘 때도 말씀을 듣다가 결국 날밤을 새울 정도로 말씀이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성경 공부를 통해 삶의 새로운 세계와 비전을 보게 된 나는 동생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교수님하고 성경 공부하면서 여동생을 다시 예전처럼 살리고 싶어 기도했고 예수님께 동생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동생은 예전부터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뭐하러 교회 다니냐며 비판을 했었다. 그러니 성경 공부를 하자고 동생에게 선뜻 권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했던 소원이 이루어져 동생이 용기를 내어 우리 집에 와서 내 옆에서 자연스럽게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생은 하나님을 만난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안 되었던 동생이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점차 치료가 되는 놀라운 과정을 겪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이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고 다시 살았더니, 그리고 이 가정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우리 집을 구원하여 주신 것이다. 내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오직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동생 뿐 아니라 어머니까지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얼마나 놀라운지... 제삼자가 어떻게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신 분이심을 나는 고백한다. 낙심하고 괴로워서 자책 하며 울 때도 늘 나와 함께 하셨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달란트를 주셨음을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잘나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 들이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이제 나의 꿈은 180도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명성을 얻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그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어졌다. 또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헌신하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졌다.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세상 지식은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참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이 진리와 복음을 모르는 과거의 나와 같은 북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전에는 그들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기도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떠 올라 안타까웠고 울면서 기도하게 하셨다. 꼭 나처럼 헤매고 있는 그들의 심령들을 위로하며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앰버서더가 되리라 다짐했다. 이런 마음이 점점 더 커져가던 어느 날 교수님은 나에게 신학을 공부해 보기를 권유하셨다. 제대로 배워야 통일이 되면 북한의 아이들에게, 또 고향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권면해 주셨다.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기에 내가 고 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겼다. 나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과거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가 결정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 이 가장 좋은 길임을 이제는 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은혜 가운데 진행되어 감리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원에서의 3년이란 기간 동안 순조롭게 술술 풀린 일들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일도 있었다. 이 길이 안락하고 쉬운 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대학원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부조리하고 부당한 가운데서도 너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계신다. 세상은 나의 주변을 흔들고 나를 끊임없이 유혹 하며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나의 우직한 결단이 나를 살게 함을 다시금 고백한다. 그 결단은 바로 “사람을 위해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다.”라는, 사 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다. 그와 같은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생명 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명이다.”
“나는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다. “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도 대답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숙제를 끝내면 하나님 계시는 본향으로 가는 것이다.” 이 모든 질문에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근본 지혜와 지식을 배우게 된 것은 더없는 기쁨이며 작은 실천임을 고백한다.
살겠다고 몸부림쳤지만 죽어 있었고, 밑동이 잘려버린 나무처럼 죽었던 삶이 다시 뿌리를 이어내려 갈 수 있게 해주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고 한 영혼을 귀하게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하다. 이제 본향, 나의 고향인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이곳에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단 한 가지, 그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김서윤 전도사님의 탈북민 수기 “이끄심”을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오픈도어선교회